큰 오해
"또 뭔 개짓거리 하려는 거야? 저번에 예의 없이 굴었던 건 내가 참았잖아."
도진을 집에 데려다준 보미는, 아까 확인하지 못한 마우식의 문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어차피 마우식이 뭘 하던 도진이 천재 재벌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주최하는 네트워킹 파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또 발생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네트워킹 파티가 바로 최보미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장소는 강남역 부근 웨스턴 BAR. 일반 BAR보다는 펍에 가까운 느낌이다. 귀에 때려 박는 음악이 쿵쿵 울리고 있다.
바텐더를 마주 보고 앉아있던 마우식이 보미가 온 것을 보며 바텐더에게 말했다.
"어이, 시실리안 키스 한 잔 줘. 아주 차갑게."
"괜찮아요. 차 가지고 와서."
술을 준비하려는 바텐더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손짓을 하고, 마우식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지? 얘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다리 아프지 않아?"
"대답이나 해. 니가 하려는 개짓거리가 뭐야?"
마우식은 자신의 블랙 러시안을 한 모금 마시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도진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봐? 최보미가 문자 한 통에 달려오는 건 처음 보는데. 이거 좀 섭섭해."
"도진 씨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니가 내 파티 망칠까 봐 온 거지."
"도진 씨? 하하, 됐고. 걱정하지 마. 그리 대단한 걸 준비한 건 아니니까. 그냥 소소한 이벤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지간한 걸로 재미 느끼는 게 어렵잖아. 다들 안 해본 게 없으니까."
"그 이벤트, 뭔지 설명해. 나를 납득 못 시키면 이번 파티에 초대하지 않을 거니까."
마우식은 분노 서린 눈빛으로 보미를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보미의 파티에 초대하지 않겠다는 말은 즉, 상류 네트워크에서 배제됨을 의미한다.
보미가 다시 허락하기 전까지.
그렇기에 마우식은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소 비굴하지만, 상관없다. 여태 살아 온 방식도 비슷하니까.
"진짜 별거 아니야. 정도진이 부자 부모님을 둔 건 맞지만, 컨설팅 일을 하기엔 능력이 아주 부족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말 그대로야."
마우식은 자기 직원을 시켜 알게 된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미에게 전부 공유했다.
이야기를 들은 보미는 흥미, 분노 등의 감정을 지나, 의아함만 남았다.
"그게.. 정말이야? 말도 안 되는데? 오늘 배창호 대표님 사무실을 나랑 같이 다녀왔어. 니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도진 씨가 오늘 보여준 모습은 설명이 안 돼."
"나도 마찬가지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런 놈이 여기서 멀쩡한 척을 하고 다니는지.. 그나마 내가 눈치 채서 다행이지. 너도 걱정하지 마."
마우식은 자신의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문자를 보여줬다.
-배창호: 우식 씨 안 와도 될 것 같아. 도진 씨의 컨설팅에 간만에 심장이 뛰거든! 미안해.
"내 밥그릇을 이상한 놈한테 빼앗겼어. 모두 속기 전에 진실을 알려줘야 해.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피해자들이 속출할 거야."
"큰 소란 되지 않도록.. 어디 한번 해봐. 나도 도진 씨가 어떤 말 할지 궁금하네."
보미는 이 말을 남긴 뒤, 바로 뒤돌아 나갔다.
'절대 그럴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찝찝한 마음과 의혹을 가득 품은 채.
******
"여보세요?"
"어! 아들~"
도진은 오랜만에 미국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했다.
"나 한국 잘 도착했어. 생각해보니까 연락을 안 했더라고."
"그러니까. 아주 효자 아들이야? 먼저 걸기도 뭐하고 해서 기다렸지. 어때, 지낼만해?"
도진은 여태 자신이 겪었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줬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한껏 작아졌다.
"이상한.. 사람들 아니지? 서울은 눈 깜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야!"
도진의 엄마가 의심하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도진의 부모에게 서울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억은 서울서 살던 친구가 돈을 들고 도망가 버린 것뿐.
이때 생긴 마음의 상처가 도진의 부모를 미국으로 이민 가게 만든 결정적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은 똑똑하니까 잘 할 거야."
"당연하지. 나 재능도 좀 있는 거 같아. 이제 전화 끊고, 문자로 계좌번호 보내놔 내가 용돈 보내줄 테니까."
엄마는 도진이 다 컸다며 뿌듯한 웃음을 짓고서는,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잉, 지잉, 지잉
이때 울리는 휴대폰. 문자가 세 통이나 왔다.
-엄마: 계좌번호 농협 321-1232 ····
'하, 안 받는다더니 속도 진짜 빠르네. 근데, 웬 한국 계좌? 설마 아직도?'
생각은 이랬지만, 도진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뿌듯한 기분.
자신의 돈을 떼먹고 달아난 친구가 혹여나 다시 돈을 보내오진 않을까 싶어 한국 계좌를 남겨둔 걸 보니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그다음 문자.
-최보미: 이번에도 힐스 호텔에서 파티 있어요. 금요일 오후 7시. 늦지 말고 오세요!
그다음 문자.
-농협 은행: 배창호 님께서 30,000,000원을 입금하셨습니다.
뭐?
'일, 십 ,···· 천만??'
무려 3천만원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도진의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20년 동안 세탁소 운영하며 모은 돈보다 많은 금액.
처음 미국서 출발할 때, 도진이 알바하며 모은 돈과 부모님께 받은 목돈을 합친 금액이 3천만원이었다.
도진이 감상에 빠져있는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가 온 것.
"안녕하세요! 도진 씨 맞죠? 저는 배 대표님·· 아니다. 미스 김이에요!"
배 대표 사무실에서 봤던 미스 김의 전화였다.
'역시 그런 건가?'
돈 잘못 보낸 거구나. 0을 하나 더 붙인 금액이었구나, 생각했다. 3천만원은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니까.
'전화 받지 말걸.'
도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스 김이 다시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사업자 등록증 사본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세금 계산서를 끊어야 하거든요!"
어라?
"용건이 그것뿐입니까?"
"네! 죄송해요. 너무 저녁 시간에 연락드렸죠? 세금도 제가 담당하고 있는데, 오늘 일이 너무 바빠서 연락드리는 걸 까먹었어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
"괜찮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근데 제가 사업자 등록을 아직 안 해서.. 조만간 하면 보내드릴게요."
"넵! 알겠습니다. 천천히 준비하시고 연락 주세요! 편안한 밤 되시구요."
후우 다행이다.
도진은 자신의 황금빛 미래를 상상하며 단잠에 빠졌다.
********
어느덧, 도진의 두 번째 네트워킹 파티 날이 되었다.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로 보미를 기다리는 중.
"도진 씨, 여기!"
우와..
도진은 이제 보미가 편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만나는 것까지 하면 일주일에 무려 3번을 만나는 것. 더군다나 여태 만남의 농도는 꽤나 진한 편이었고.
하지만, 지금 멀리서 걸어오는 저 여자는 앞으로 계속 봐도 편해질 리가 없었다.
아예 다른 세상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세련되셨네요."
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보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도진 씨도 오늘 멋지네요."
"보내주신 정장 덕택이죠."
보미의 문자를 받은 다음 날, 도진의 집으로 정장 한 벌이 도착했다. 쪽지와 함께였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도진 씨, 미국과는 다르게 한국은 어느 정도 명품을 입어줘야 해요. 안 그러면 똥파리들이 꼬인답니다.
최보미가.-
마우식에게 어디 한번 해보라고 했지만, 보미는 결국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마우식의 말과 자신이 직접 본 도진은 너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일종의 투자인 셈.
"사이즈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눈대중으로 보낸 건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저번에 본 풍경과 비슷한 분위기. 다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복도에 사람이 얼마 없는 것이다.
"이상하다.. 오늘 참석하는 분들 수가 꽤 되는데."
보미와 함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괴랄한 풍경이 펼쳐졌다.
단상 같은 곳에 마우식이 올라서서 마이크를 들고 있었고, 주변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모여 있던 것.
마치 모두가 마우식의 연설을 보러 온 사람들 같았다.
도진과 보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마우식도 도진을 발견했다.
"여러분! 오늘의 주인공 정도진 씨가 이제야 왔네요! 하하!"
마우식의 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도진에게 쏠렸다.
이내, 이어지는 조롱 섞인 웃음소리들.
마우식은 도진에게 단상 위로 올라오라며 손짓했다.
'저 개새끼가!'
보미는 당장이라도 마우식을 끌어 내리고 싶었지만, 이미 판이 너무 커졌다.
마우식도 이것을 노렸을 터.
진퇴양난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도진이 단상 위에 도착하자, 마우식은 도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 세상이 어느 때인데.. 조사해 보면 니 사돈의 팔촌까지 다 알아낼 수 있어 새끼야!"
도진은 등골이 서늘했지만 덤덤한 척 맞받아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난 너네 속인 적 없어. 니들이 알아서 오해 한 거지."
부자 아니라고 말 할걸. 괜히 내버려 뒀나?
마우식은 도진의 말에 확신이 생긴 듯,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에게 소리쳤다.
"여러분!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여기 계신 도진 씨 부모님은 할리우드에서 큰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오잉?
도진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열광하고 있는 그때, 단 한명의 남자만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마우식은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이 굉장히 부자더라구요? 근데, 왜 이렇게 부티가 안 나죠?"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퍼스트 클래스만 타고 다닌 것도 사실이더라구요!"
관객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근데.. 아주 또라이 새끼더만?"
"뭐?"
"여기, 정도진 씨가 한국 와서 사업 하겠다고 까불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제가 하는 컨설팅 사업을 한다고 하네요. 여러분도 다 아시잖아요? 컨설팅이 얼마나 어려운 업인지."
"잠깐, 무슨 말이야."
"여러분이 이 요망한 애한테 사기 당하실까 봐 제가 직접! 정도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죠!"
도진은 반박을 포기했다.
마우식의 눈이 완전 훼까닥 돌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사업의 근간이 되는 경영을 공부하기는커녕! 매일 매일 K팝 가수들 뒤꽁무니나 쫒아다니는 놈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여자 아이돌 팬클럽을 만들어서 뉴욕 지부 회장도 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주변은 웃었고, 도진은 처음으로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들어 본 얘긴데? 하면서.
"얼마나 K팝을 좋아했으면 부자 부모님 놔두고 한국까지 기어들어 왔을까요! 저는 사실 도진에 대해 알아갈수록 국뽕이 찼습니다. 하하!"
관객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간간이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하는 말도 들린다.
"자, 마이클! 니가 대답해봐! 내가 말 한 것 중에 틀린 게 하나라도 있어?"
도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마이클도 여기 왔나?'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니가 무슨 말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발뺌하지 마 새끼야! 너 미국 이름 마이클이잖아. 내가 다 조사했어!"
'설마?'
"니가 말하는 마이클. 내 친구 같은데?"
마우식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듯, 거만하게 말했다.
"하하! 너가 궁지에 몰리긴 했나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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