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색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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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검[飛劒]
작품등록일 :
2012.11.26 23:54
최근연재일 :
2012.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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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7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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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 사이더 라냐(2)

DUMMY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미묘한 피비린내에 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가방을 내팽개친 그는 부엌과 거실, 안방부터 살폈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이 잠겨 있던 작은 문을 향했다.

윤석은 현수가 어릴 때부터 이 방에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늘 잠가 두곤 했었다. 때문에 이 집에서 산 지 십수 년이 되도록 현수는 이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 문은 너무나도 허무하고 쉽게 열려버렸다.

"……!"

진한 혈향이 목을 틀어막아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방안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난투가 벌어졌는지 책상 위는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채 말라붙지 않은 피가 여기저기에 흥건했다. 책상 뒤쪽으로 익숙한 다리가 보였다.

"아, 아빠."

강현수는 덜덜 떨며 책상 뒤로 다가섰고, 이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아빠!"

처참한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사지가 뜯겨 선혈이 낭자했고, 잘려나간 오른손에는 바늘이 부러진 주사기가 허망하게 들려 있었다.

"이, 이, 이럴 수가……."

바닥에 닿은 손에도 흥건하게 피가 묻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잔혹한 참사와 충격 때문에 현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의 입에서 통곡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크흐흑……!"

울부짖던 현수의 귀에 불현듯 생소한 목소리가 잡혔다.

"알려 줄 테니, 저…… 좀 도와 주지 않을래요?"

"누구야!"

깜짝 놀란 현수가 벌떡 일어나자, 그 바람에 바닥에 고여 있던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교복 바지가 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옷장 문을 열어 보세요."

여린 목소리는 기품이 서려 있었고 차분했지만, 무척 고통스러운 듯 떨리고 있었다.

"옷장?"

주변을 둘러보자 문이 조금 열려 있는 큰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장 문을 천천히 열어 젖혔다.

"……당신이 강현수로군요."

안에 있던 것은 13, 14살쯤 되었을까 싶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평범한 보라색의 단순한 원피스에 군데 군데 피얼룩이 져 있었다. 검고 긴 머리는 앙증맞고 깔끔한 양갈래였지만, 표정은 그 머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고 깊이 있는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너, 눈이……."

무엇보다 와인 같은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가 현수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했다.

"제가 왔을 때에는 이미 일이 벌어진 직후였어요. 뱀파이어가 당신 아버지를 습격했던 거죠."

"뱀파이어…라고?"

멍한 현수가 못마땅했는지 소녀가 미간을 구겼다.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아마 지금도 뱀파이어들이…… 도시 각지에서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을 거에요."

"뭐?"

"뱀파이어들이…… 이곳을, 큭…… 첫 번째 사냥터로 삼았어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에 현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에 신고부터……!"

"경찰은 소용 없어요. 그들…도 인간일 뿐이니까."

"무슨 소리야, 경찰은 이미 뱀파이어를 여러 번 잡았었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도시에서 한 두 명씩 출몰한 뱀파이어를 그 자리에서 사살하거나 생포했던 것은 모두 경찰이었다. 그 때마다 다량의 인명 피해가 나긴 했지만.

"그 때랑 지금은 차원이 달라요! 윽……"

격하게 말을 하던 소녀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어, 어디 다친 거야?"

"아뇨, 다치진 않았지만…… 뱀파이어의 피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소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뱀파이어의 피?"

"뱀파이어의 피는… 우리에게 극독…… 여기에 당하면 힘을 쓸 수가……."

소녀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지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강현수가 손을 집어넣어 밖으로 꺼내려고 하자 그녀가 만류했다.

"저, 전 햇볕을 볼 수 없…어요. 햇빛 아래에 나가면…… 말라 죽는 게 우리……."

"우리?"

가면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저, 저는 지금…… 피가 필요해요…."

"피라고?"

피라는 말에 현수는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소녀의 몸에는 깊은 외상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소녀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피가 필요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너, 뱀파이어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저절로 거칠어지고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는……."

힘겹게 이어진 다음 말에 현수는 멍해지고 말았다.

"라비스, 라고 해요. 내, 이름은, 라냐……."

"라비스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어디서 사기를 치는 거야!"

버럭 소리쳤지만 현수 스스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피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라냐의 말과는 달리 낮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만약 이 라냐라는 소녀가 강현수를 노렸다면 벽장에 숨어서 직접 부를 것 없이, 방에 들어왔을 때 뒤를 쳤으면 되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하려 애썼다.

"좋아. 네가 뱀파이어가 아니라고 쳐. 왜 여기 있지? 왜!"

"그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 제발……."

애원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끝나갈 때쯤, 밖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큰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야?"

"사, 사냥이 시작됐어요……!"

사냥의 의미가 뭔지는 라냐의 얼굴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크, 젠장!"

와장창 박살이 나는 소리와 뱀파이어들의 광기 서린 웃음소리가 뒤섞여서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못박힌 듯 서서 창문만 노려보던 현수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라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를 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충분한, 양을 마신다면……. 낮에도 패널티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것 뿐?"

"우리는…… 기본적으로, 뱀파이어를…… 상회하는 육체 능력을… 지니니까, 대응할 수…… 있죠."

"그 말 정말이냐?"

"믿어 줘요, 제발……."

라냐의 애절한 눈빛을 한동안 마주보고 있던 현수는, 이윽고 기합과 함께 교복 겉옷을 벗어던졌다. 와이셔츠를 걷자 상처 하나 없는 하얀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좋아, 딱 한번만이야."

"……미안해요. 아플 거에요…… 평소 같으면 이렇게 안 하겠지만……."

"잔말 말고 빨리 해!"

라냐가 등 뒤에서 비수를 꺼내는 걸 본 현수는 팔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간 뒤 얼굴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팔에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다.

"크윽!"

날붙이가 깊이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간 것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곧 라냐의 입이 따뜻하게 닿더니 빨아먹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라냐가 다 됐다고 말하며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언제 고통스러워했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당신, 여신의 조각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건 몰랐어요."

"뭐?"

상처가 난 팔을 아까 벗어던진 교복으로 지혈하며 현수가 되물었다.

아니, 되물으려고 했다.

"역시! 멍청한 라비스, 함정에 걸렸군!"

난데없이 창문을 깨부수고 마른 체구의 남자가 들이닥쳤다. 쏟아지는 유리 파편을 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파묻은 그의 귀에, 미치광이의 그것과 같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게다가 인간까지! 카르네!"

"아~ 이걸로 자색수를 보충할 수 있겠지?"

깨진 창문으로 미끄러지듯 금발의 여자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몸놀림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분명 뱀파이어일 거라고, 강현수는 생각했다.

'2:1은 좀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불안해졌다. 얼핏 라냐를 보았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표정과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함정에 걸렸던 건 인정하죠. 너무 급해서 실수를 저질렀군요."

아까 애원했던 것과는 180도 다른, 도도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목소리에 뱀파이어들은 물론이고 현수조차 깜짝 놀라 흠칫했다.

'원래 저런 애였어?'

"뭐야. 왜 이렇게 쌩쌩해?"

"그럴 리가…… 분명 피를 마신 걸 확인했는데……. 설마, 저 뒤의 녀석이?"

"정답."

라냐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별안간 검은 불길이 손 끝에서 일어나며 길다랗게 번졌다.

"검은 불! 설마 그럼 저 녀석이 여신의 조각?"

"진정해, 카르네! 상대는 하나야.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성숙하다 못해 농염하기까지 한 대사가 끝나고, 현수의 눈 앞에 보인 것은 흑색의 미끈하고 거대한 낫이었다. 잘 벼려진 날마저도 시커먼 것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무거워 보이는 사이드를 젓가락처럼 가볍게 쥐며 라냐가 현수에게 눈짓했다.

"내 이름은 라냐. 사이더(scyther) 라냐에요. 거기 두 뱀파이어도 잘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사이더라고?'

멍하니 생각하던 현수는 그녀의 무기를 다시 한 번 보고서야 이해했다.

기역자로 꺾인 거대한 날, 길고 튼튼한 자루는 라냐의 무기가 사이드(scythe)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연약하고 어려 보이기만 하는 라냐의 이미지와는 그야말로 상극의 무기였다.

"사이더 라냐라고?"

"학살자 사이더 라냐? 하필이면……!"

두 뱀파이어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섰다. 라냐가 옅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낫을 들고 사뿐하게 쇄도했다.

"당신들의 처형자 이름이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뱀파이어들이 뒤로 물러서며 단도를 꺼내들었다. 방은 좁았기에 사이드보다는 단도가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몸놀림은 라냐가 한 수 위였다.

단 일격. 몸을 숙였던 라냐가 가볍게 낫으로 호를 그었다. 너무나 깨끗하면서도 빠른 동작에 현수는 일순간 그 장면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움직이느라 흔들렸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과 동시에 방안에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괴기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를 법도 했건만 현수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마음이었다.

'라냐 때문일까.'

힘든 기색은커녕 긴장조차 하지 않은 익숙한 몸짓으로 돌아서는 작은 라냐를 보며 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서둘러요. 두 명이 함께 대낮에 민가에 들어올 정도면 밖은 이미 아수라장일 거에요."

"나, 나도 가자고?"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란 현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런 때에 혼자 있으면 위험해요. 사냥감이 될 뿐이니까요."

진하고도 맑은 보랏빛 눈동자가 현수의 얼굴을 직시했다. 잠시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은 채로 있던 그는 라냐가 다시 한 번 재촉하고 나서야 일어섰다.

"알았어.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지?"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날아서 갈 테니까요."

"뭐, 날아?"

얼빠진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라냐의 등 뒤에서 검은 날개가 솟구쳤다. 깃털은 아니었고, 마치 불길 같은 미묘한 생김새를 지닌 날개였다. 다가가서 만져 보자 벨벳 같은 기이한 촉감이 와 닿았다.

"제 손을 잡아요.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꽉 잡아야 해요."

"무, 무겁지 않을까?"

라냐의 키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155cm 안팎. 게다가 몸 전체가 여리여리한 것이 체중도 40kg를 넘길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에 비해 현수는 178cm의 장신. 걱정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라비스는, 특히 여신의 조각을 통해 힘을 되찾은 라비스는 뱀파이어보다도 서너 배는 더 강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다면야……."

결국 떨떠름해하면서도 현수는 라냐의 팔을 붙들었다.

잠시 후, 깨진 창문을 통해 검은 날개의 인영이 비상했다.


작가의말

 

생존!

이번 연참대전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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