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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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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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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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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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시국사범 (2)

DUMMY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밥 먹으라는 소리도 물리고, 거울 속의 김주혁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생각에 잠겼었다.


시간도 멈춘 것처럼 미동도 안 할 것 같더니만, 어느새 어스름히 새벽이 밝아 온다.



‘에이, 썅.. 거슬리네. 거슬려.’



그래. 깡패 새끼라고 나이를 뒤로 처먹은 건 아니다.



‘니미.. 네가 맞다. 그래, 맞아!’



주인이 되지 못하면 여전히 사람이 아닌 개새끼로 살아야 한다.


그저 전생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힘세고, 조금 더 큰 개새끼로 살겠지.


언제든 더 크고 더 힘센 것들한테 짓밟히고 버려지는 그런 개새끼 말이다.


그게 목에다 금 목걸이를 걸고, 소고기를 밥으로 처먹어도 어쩔 수 없는 개새끼 팔자다.


그리고 그건 너희 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할망구의 표정과 말투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전생의 나처럼, 그녀 또한 어쩌면 참회와 회한으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지.


개처럼 살다가 늙어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고, 그녀 또한 아무리 긍지 높은 예기(藝妓)라 해도 엄연한 기생.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건 나 같은 깡패새끼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다.


그래. 근데, 그러고 보니 문득 뜬금없이 궁금해지네.


혹시 너네 할망구도 나 같은 생각을 했었을까?


꽃도 화려할 때 지지 못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말라 죽으면 서러울 텐데.


하물며 꽃도 뭣도 아니었던 나 같은 넝쿨, 잡초들은..


깡패 짓을 해도 차라리 잘나가던 젊은 날에 칼 맞고 뒤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거든.


적어도 병상에서 늙어 죽던 나는 그게 백번 천번 나을 것 같았어. 그래서 궁금하다.


너희.. 아니, 우리 할망구도 꽃같이 예쁘던 젊은 날에 죽고 싶지 않았을까 하고.


여하튼.. 쩝, 그래. 좋다!


나 같은 깡패나 망나니 재벌 3세 정도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 할망구가.


아니, 그 할망구도 채우지 못한 너란 놈의 선택이..


그 선택이 뭔지, 도대체 얼마나 잘난 건지, 우선 한번 보자.


아무래도 그게 네가 할망구랑 떨어져 사는 이유인 것 같고, 또 그 빌어먹을 남영동에 끌려간 이유 같으니까.


뭐, 어차피 내가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고.


아, 대신 그게 뭐든!


나는 너랑 달라서 이 돈이고, 너희 할머니 돈이고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겠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사흘 굶어 담 넘지 않는 놈 없고, 거지도 차려 입어야 얻어먹는 세상이니까.




***




그날 아침.


이런저런 생각에 밤을 꼬박 새운 나는 일찌감치 청암정을 나섰다.


거실에서 마주친 할망구는 한도를 초과해서 쫙 빼 입은 나에게 눈빛을 반짝였지만,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고개를 숙였다.


넥타이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만 아니었다면, 넥타이와 넥타이핀도 했을 텐데.


전생에서 오래도록 시달려야 했던 교수형의 악몽 때문에 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갱년기가 한창이던 95년 쯤, 내가 봤던 드라마에서 ‘너 떨고 있냐?’라는 대사는.


하.. 다름 아닌 실재 나의 얘기였으니까.


나는 대청에 앉아서 미리 꺼내 놓은 구두를 신었다.


그리곤 방에서 가지고 나온 신문 뭉치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두 대의 차키 중에 무작위로 고른 차키 하나가 주머니 속에서 달랑거린다.


나는 마지막까지 내게 눈을 떼지 못하는 할망구의 표정을 뒤로하고 가볍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마도 할망구는 내가 다시 그 칙칙한 과잠바와 골덴 바지를 입고 집이라도 나가는 줄 알았나 보다.


‘내가 왜?’ 라는 말을 꾹 참고, 나는 어제 저녁 할망구의 차를 세워둔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쪽에서 할망구의 별표와는 다른 늘씬한 미국차가 나를 반긴다.


나는 녀석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곤 시동을 켜기 전에 조수석의 수납함을 열고, 신문 속에 대충 말아 온 돈뭉치를 던졌다.


천만 원이다.


이 당시 돈의 가치로 봤을 때, 대기업 초봉으로 꼬박 2년 반을 모아야 하는 돈.


나는 무심히 수납함을 닫고 돈뭉치를 말아왔던 조간신문을 조수석에 내려놨다.


누군가가 이른 아침 내 방문 앞에 두고 간 것이다.


키박스에 키를 꽂고 돌리자 기분 좋은 엔진 음이 난다.


잠시 후, 청암정을 벗어나 태원각을 지나고 있는 차 안에서 나는 무심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선 자연스럽게 어제 일을 떠올리게 하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이에 앞서 경찰은 지난 14일 오전 10시 51분경 심문에 들어갔으며 심문도중.. 심문도중, 허..”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의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묻어난다. 이어..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까, 박종천 군이 ‘억’하고 쓰러졌고, 중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숨졌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박군의 사인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는 가운데..”



역시나 박종천군의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래. 이게 시작이었지. 그 다음이 신군부의 보도지침을 거부한 동하일보의..’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신문을 훑었다.



- 동하일보. 1987년 1월 17일 -


- 속보. 한국대 박종천. 사망사건 -


- 수사 경관 2명 검찰 소환방침 -


- 의사. 좁은 수사실 바닥에 물기 -


- 왕진 갔을 때 이미 숨져.. -



운전을 하며 언뜻 언뜻 훔쳐본 1면의 머리기사들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뇌리에 박힌다.



‘도, 동하일보의 보도.. 의혹은 확산되고 신군부는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그리고 그건..’



나는 놀란 눈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살았던 세월에는 몰랐지만, 돌아온 시간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소름끼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만. 근데, 그렇다면..


16일. 내가 풀려난 어제는 박종천 군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서 동하일보가 단순사망이 아니라는 보도를 시작한 날이다.


역시. 내가 맞았다!


그래서 그렇게 황급하게 나를 내보냈던 거야.


남영동에서 고문의 흔적들을 치우고, 증거를 인멸해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물론, 그런 식으로 나온 건 그래도 할망구라서 가능했겠지만. 결코 돈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그래. 도중에 풀려난 건 그렇게 이해가 된다. 되는데..


애당초 처음부터 남영동에는 왜 끌려갔을까.



‘쓰읍. 김주혁 너 이ㅆ..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나는 룸미러를 통해 거울 속의 나를 노려봤다.


동시대에 박종천 군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하루 차이로 남영동에 끌려갔던 청년.


나는 나의 모습이 왠지 위태롭고, 안쓰러워 보였다.




***




김주혁 아니, 내 하숙집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겸사겸사 들렸던 학과 과사무실은 이 시국에도 일상의 시계를 돌리고 있었으니까.


참 나. 익히 징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쩝. 그래!


천지가 개벽해도 일상을 지탱하는 사람들은 위대하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의 세상을 유지하는 건, 온전히 이름 없는 그들이니까.


나는 과사무실 한쪽에서 누군가가 옮겨온 우편물을 통해, 내 하숙집 주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비록 나오는 길에 봤던 한국대학교의 교정은 내 로망과는 달리 더 없이 흉흉하고 쓸쓸했지만 말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같은 학교 학생 박종천 군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였다.


거기다가 대공수사관들은 물론, 전투 경찰까지 빈번히 학내로 진입하던 시대.


이른 바 ‘학원침탈’이 버젓이 자행되던 시대였으니 당연했다.


이제 막 인문대 건물에 ‘근조(謹弔)’ 현수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박종천 군의 언론학과와 나의 국사학과가 자리 잡은 건물이다.


그리고 1월의 매서운 찬바람에도 교정 곳곳에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들이 보였다.



‘씨X 새끼들..’



전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고, 가끔씩 나와 있던 시간들도 도피와 테러, 체포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나에겐 너무나도 뻔한 그림들이다.


놈들은 쉴 새 없이 무전을 치고, 비루한 눈으로 숨 가쁘게 주위를 훑었다.


아마도 들어오면서 봤던 진압 병력들에게 실시간으로 정보를 보내고 있는 거겠지.


여차하면 쏟아져 들어올 생각으로 대기하는 그 백골단(사복 체포조)과 전투경찰 병력들에게.


솔직히 대부분은 생업에 충실한 가장이라는 걸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저들에게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개새끼들의 냄새가 난다는 거다.


비록 시대와 권력이 만들어낸 또 다른 피해자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나는 잠시 들린 로망의 한국대학교를 나와 하숙집으로 향했다.


관악구, 신림동. 자동차에 열이 오르기도 전에 도착한 그 가까운 곳으로.


근데, 왜 문은 잠겨있고 나는, 하.. 왜 쪽팔리게 담벼락을 더듬고 있을까.


심지어 너무 자연스럽다.


일부러 날카롭게 깬 유리병을 촘촘하게 시멘트에 박아 세워 놓은 담벼락이 짜증났다.


더더욱 그 쪽 끝에서 결국 손가락에 걸린 대문 키는.. 염병.


당황스럽지만 나는 익숙하게 하숙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곤 채 몇 번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내 방을 찾아냈다.


자꾸만 깔끔하게 차려입은 수트에 뭔가가 묻은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본능보다 무서운 습관을 따라 기어들어간 내 방은.



‘하.. 이런 개새끼들이..’



난장판이었다.


나는 손바닥만 한 내 하숙방에서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던 의자를 세워 앉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그 가난한 공간을 살피던 내게.



‘드르륵..’



오래된 미닫이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쌤!”


‘뭐, 뭐냐, 너는?’



깜찍한 여고생이다.


느낌적으로 하숙집 딸내미가 분명하고, 아주 오랜 나의 연륜으론.. 이 녀석 조금만 더 크면 엄청나게 예뻐 질 관상이다.


하지만 나도 이젠 놀라지 않은 척 하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래.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오, 좋아! 자연스러웠어.



“쌤도 참.. 뭔 일이겠어요? 쌤 잡혀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다른 경찰 아재들이 이랬어요. 엄마가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케서 치우지도 못하고..”



그랬겠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진행이다.



“근데, 쌤. 오오올.. 오늘요, 까리한데요. 첨 봤어요. 쌤, 이래 입으신 거.”



아무리 차이가 나도 6살. 녀석이 나를 보며 눈을 반짝인다.



“어? 아.. 후후. 미안하다. 나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나는 더 없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헤.. 쌤.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안 그래도 쌤이 그냥 나 같은 애, 과외나 하실 분은 아닌 거 알았어요. 내가 무슨 바본가..”



이 녀석한테 불길하고, 미안한 신뢰가 보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걸 받아줄 생각도, 시간도 없다.


경험 상, 나와 엮여서 좋을 게 없고. 상황 상.. 김주혁 이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래. 어른들은 괜찮으시고?”



대신, 나는 진심으로 물었다.


전생의 내 가족들처럼, 혹시라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 다치게 하는 건 죽기보다 싫으니까.



“네? 아, 예. 뭐 아직까진..”



녀석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훗. 다행이다. 그러면 됐지.



“아, 쌤. 근데.. 이거.”



녀석이 이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책자 하나와 조그만 쪽지를 내밀었다.



“이거요, 왠지 경찰아재들이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아서..”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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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31 30화 6월 항쟁 (5) 23.05.24 169 5 9쪽
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5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90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5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22 21화 6월 10일 (1) 23.05.20 229 8 10쪽
21 20화 아! 이한율!!(6) +1 23.05.19 227 7 9쪽
20 19화 아! 이한율!!(5) +1 23.05.19 221 7 10쪽
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5 7 9쪽
18 17화 아! 이한율!!(3) +4 23.05.18 225 7 10쪽
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3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15 14화 태풍 속으로 (5) +2 23.05.16 273 8 9쪽
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13 12화 태풍 속으로(3) +1 23.05.15 266 8 11쪽
12 11화 태풍 속으로(2) +1 23.05.15 273 9 9쪽
11 10화 태풍 속으로(1) +1 23.05.14 318 10 11쪽
10 9화 시국사범 (5) +3 23.05.14 319 9 11쪽
9 8화 시국사범 (4) +1 23.05.13 324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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