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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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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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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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1화 6월 10일 (1)

DUMMY

한율이의 상태와 나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있는 듯, 여학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쫓아다니다가 그제야 내게 재킷을 내밀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가 내민 재킷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고맙습니다.”



그리곤 가벼운 목례로 재킷을 받아 입으며, 미련 없이 연대 총학생회실을 나왔다.



‘단숨에 연대를 벗어나야 한다!’



여전히 공안당국은 나를 추적 중에 있으며, 지금 이 시간도 그들은 감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잠시 뒤.


나는 주변을 살펴 잡아 탄 택시 안에서 재킷 안주머니의 지갑을 꺼내들었다.



“부스럭..”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는 것처럼, 수배중인 내가 수배가 끝날 때까지 쓰기 위해선, 내 지갑에 어느 정도의 현찰이 있는 지 확인해야 했다.


내 기억엔, 오늘을 기점으로 폭발할 6월 항쟁은 6.29선언을 받아 내고도 일주일 이상이 지나야지만, 비로소 관련자들의 사면과 복권, 해금조치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표 12장에.. 만원 짜리가..’



살자고 주섬주섬 현찰을 세던 탓인지, 만 원짜리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얼어붙는다.


염병.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더니.. 겉멋이 아니었다.


세상에 이처럼 직접적이고, 날 것 같은 표현이 어디 있을까.



‘하.. 그래. 어차피 이 시절은 독재 아니면, 죄다 민주주의 빨갱이다. 근데, 이 피 값을 치르고도 그걸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빼앗기는 게.. 그게 무슨 민주주의냐? 난 못 준다. 썅.. 설령 그것이 역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반드시 내가 바꿀 테다!’



나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들릴 정도로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데 문득.



‘그래. 그니까는.. 우리 국장님이 집회 연설도 하고, 증언도 하면서 학생들에게 차가버져야 한다꼬 말 좀 하그래이. 그게 마, 다 그래야 더 뜨거버지는 법이데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YS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까. 혹시 그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뭔가..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나와는 겉돌던 것들이 보다 선명해 지고 있다.


그건 내가 이 현실과 시대를 바꿔 나가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 같은 거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의지와 나의 의지를 동일시하는 공감능력.


그리고 이를 위한 어떤 일도 무섭도록 냉정하고,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차가운 행동력이 그것이다.


알고도 못하고, 원해도 어려워서 주워 삼키기만 하는 그것 말이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6월의 용광로에서 나는 그것으로 내 정치적 입지를 더욱 더 단단히 다져야 한다.


그래, 맞다. 적어도 YS는 나에게 그것을 조언한 거였다.


일평생 무수한 정치적 도전과 결단을 해야 했던 그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비록 그 양반의 변화무쌍한 원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건 마르고 닳도록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나를 태운 택시는 민추협 사무실이 있는 무교동 인근에 도착했다.


나는 곧바로 택시에서 내려 사무실로의 잠입을 시도했다.


내게 붙은 감시자들이야 이동하면서 떨구면 그만이었지만, 이미 며칠 전부터 떨어진 갑호 비상령으로, 범국본의 중추와도 같은 민추협 사무실은 원천봉쇄 되어 경계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하긴, 뭐. 당국에는 민추협 사무실이 그야말로 적군의 야전사령부일 테니.’



나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익숙한 루트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찾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고, 선수끼리의 대결에는 언제나 그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한 거니까.


민추협 또한 이런 일에 대한 대비를 오랫동안 해왔기에 진입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




얼마나 눈을 붙였을까.


민추협 사무실의 소파에 기대 있던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여기저기 시민들에게 나눠 줄 소형 태극기와 범국본 명의로 된 서너 종의 유인물이 보였다.



‘읭? 마스크야 뭔지 알겠는데, 웬 치약하고 비닐 랩을 이렇게..’



그리고 한쪽으로 단정하게 모아 놓은 용도 모를 물건들이 보였다.



“정민당은 잠시 뒤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8,600여 대의원들의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서, 단독 입후보한 노태후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할 예정입니다. 이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이룩하는..”



라디오에서 오늘 있을 정의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뉴스를 빙자해 시끄럽게 광고 중이다.


전국적으로 심상치 않게 들썩이는 6.10 대회의 열기는 그에 밀려 아직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얘기는 들었어. 우리 잘생긴 막내 국장님. 고생 많으셨네. 자..”



여성부장 박영옥 누님이다.


벌써 연대 얘길 전해 들었는지, 나에게 믹스커피와 김밥 한 줄을 건네는 그녀의 눈빛이 안타깝다.



“고생은요, 뭘. 생때같은 젊은 친구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나는 그녀에게서 커피와 김밥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녀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이 시국에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절대 쉽게 넘어가진 못 할 거야. 암. 후..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상해야 이 망할 놈의 정권이 끝장날는지.. 아, 근데 우리 막내 국장님은 이렇게 말할 때 보면 꼭 무슨 노인네 같더라.”



아차. 나도 별 차이 없으면서, 젊은 친구 어쩌고 했으니..



“아, 정말요? 에이~ 누님이 너무 젊으셔서 그런 건 아니고요? 훗.. 쓰읍. 예.. 박종천 열사만큼이나 크게 문제가 될 거예요. 어쩌면 오늘 열릴 6.10 대회가 한율이 사건으로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 갈 수도 있고요.”



이럴 땐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


사실, 이런 사족들은 너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피해 슬쩍 걸쳐두는 얘기들이기 때문이다.



“또또.. 늙은 누나 놀린다. 얼른 먹어.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할 것도 많고, 힘내자.”



이제 막 40을 넘긴 영옥이 누님이 그새 바짝 긴장의 끈을 당기며, 유인물들을 소분했다.


문득, 청암정에 있는 예령이모가 생각이 났다.


비슷한 또래에 두 분 다 나에게는 참 친절한 분들이다.



“저.. 근데, 그보다 오늘 총재님은 공덕에, 민통당 당사에서 시작하시는 거죠?”



내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응. 아무래도 의장님은 이제 제1 야당의 총재로 움직이시는 게 여러모로 더 상징성 있으니까. 재야나 운동권은 다른 어른들도 많고, 우리도 있잖아.”



꿋꿋하게 자신은 민추협 의장으로 부르면서, 이 시국엔 YS가 민통당 총재로 불리는 게 더 적절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누님이다.


과연 YS 우먼다운 감각이다.



“그럼 누님. 전 우선 민통당 대회장부터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연대 일을 직접 전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남은 김밥을 입에 우겨 넣고 돌아서며, 커피를 원샷 했다.



“엥? 아유.. 여기도 할 일이 태산인데.. 하는 수 없지, 뭐.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고. 여긴 철야 대기조에, 이제 사람들도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영옥이 누님이 속속 사무실로 진입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답을 했다.



“아, 참! 이거 타고 가. 오늘은 아마 이게 제일 빠를 걸? 주혁이는 뭐, 오늘 좀 많이 돌아다닐 것 같기도 하고.”



영옥이 누님이 내게 대뜸 나무 십자가가 달린 키 하나를 던진다.


그녀의 애마, 화이트 썰라 50이다. 기억하기론 다행히 바구니 같은 건 안 달렸던 것 같다.



‘에이, 참. 가오 빠지게..’



나는 문득 청암정에 두고 온 내 수입 바이크가 생각났다.



‘미쳤다. 아쉽긴 해도 수배범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게다가 좁은 서울 골목골목을 다니기엔 이게 딱이지!’



번개같이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넵. 고맙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쪽팔리지만, 나는 키를 들어 순순히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오늘 하루, 어쩌면 이 투박한 전기자전거 모양의 스쿠터가 나를 지켜줄 적토마가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수배중인 거 잊지 말고, 원봉(원천봉쇄)된 데 잘 피하고. 또.. 너무 돌아오려고 애쓰지도 마. 여기나 거기나 다 같은 곳이고, 우리 막내 국장님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건네는 인사에 나는 손을 흔들어 답했다.


하지만 절대 가볍게 하는 인사말들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가까이 있었을 뿐.



‘빠당! 빠당! 빠다다다당..’



나는 진입한 루트를 반대로 거슬러 나와, 비밀통로가 시작되는 입구 옆에서 그녀의 스쿠터에 올랐다.


출발하기에 앞서 잠시 멈춰선 내 눈 앞으로, 골목 길 건너 민추협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뺑 둘러싼 전경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전경들 주위로 여기저기 주변을 살피며 모여들고 있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도 잠시 뒤 10시부터는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도 민추협 사람들과 지원 나온 민통당 의원들 중심으로 시위가 시작될 거다.




***




“빠당.. 빠다다다당..”



무교동에서 출발한 나는 민주통일당 당사가 있는 공덕 오거리까지 가는 길에 그야말로 경이로운 광경들을 목격했다.


정부의 엄포대로 이미 7, 8일에 떨어진 갑호 비상령으로 인해 서울에서만 무려 2만 3,000여 명의 병력들이 동원된 상태였다.


게다가 시위의 규모와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당국은 전국 각지에서 추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도합 7만 여명의 전경들을 시내 곳곳으로 쫙 깔았다.



“고문정권 살인정권! 종철이를 살려내라!”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구호 속에 범국본이 전날까지 뿌린 전단 30만장이 서울도심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곳곳마다 수십, 수백에서 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시위대들이 전경들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그곳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 있는 중구 일대와, 퇴계로, 을지로, 남대문 시장, 서울역 등지였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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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31 30화 6월 항쟁 (5) 23.05.24 169 5 9쪽
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5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90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5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 21화 6월 10일 (1) 23.05.20 229 8 10쪽
21 20화 아! 이한율!!(6) +1 23.05.19 227 7 9쪽
20 19화 아! 이한율!!(5) +1 23.05.19 221 7 10쪽
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5 7 9쪽
18 17화 아! 이한율!!(3) +4 23.05.18 225 7 10쪽
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3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15 14화 태풍 속으로 (5) +2 23.05.16 273 8 9쪽
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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