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처럼 부서진 약속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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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우는피에로
작품등록일 :
2023.05.10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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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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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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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드러나는 연기의 정체 (2)

DUMMY

한 시간 전. B구역 백설 연구실.


백설이 퇴근한 후 자신의 연구실로 왔다. 오늘 일하면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백설이 곧장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교무일지를 작성한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이내 손님용 소파에 앉는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백설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두 시간 전쯤 저녁을 먹고 난 후 바로 약을 먹었는데, 이것 때문인지 계속 피곤하다.


‘하준이는 괜찮은 건가.’

백설이 중얼거린다.


하준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탈이 나서 쓰러진 거니 곧 깨어날 거로 생각했는데, 하루 내내 깨어나지 못하니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점점 걱정되었다. 이러다가 정말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검사 결과는 언제쯤 나오는 거지.’

백설이 생각한다.


하준이 응급실에 실려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저것 검사를 했으니, 이르면 오늘 저녁에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앞을 막아선 자욱한 연기가 걷힐 것이다. 그러면 하준이 아픈 이유도, 어떻게 하면 하준이 나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검사 결과가 나와야 했다.


‘검사 결과 나온 다음에도 문제네. 하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면, 그거 해결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니까.’

백설이 생각한다.


흠.


백설이 작게 한숨을 쉰다. 하준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걸 해결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혹시나 자신이 조금만 실수해도 그게 하준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잘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그나저나 하준이 방은 어떻게 검사하지.’

백설이 중얼거린다.


백설은 오후 근무를 하면서 내내 생각했다. 문 교사가 했던 ‘하준의 방에 있는 음식을 조사하는 게 하준이 먹은 음식을 정확하게 조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말이다. 그 후로 백설은 정말로 하준의 방을 열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그렸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시나리오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방법으로 조사할 수 있는 건 없을까.’

백설이 고민한다.


백설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떠올린다. 백설이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일어선다. 그리고 연구실 한쪽에 있는 자판기 로봇으로 다가가 아래쪽에 있는 냉장고를 연다.


‘있다.’

백설이 작게 소리친다.


백설이 냉장고로 손을 뻗는다. 그곳에는 얼마 전 하준에게 받았던 ‘찰리의 장난’이 있다. 이것도 하준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하준이 먹은 음식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거라도 검사해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탁.


백설이 냉장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찰리의 장난’을 잘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자리에서 일어선 백설이 다시 소파에 앉는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기억 조정 능력’으로 이 ‘찰리의 장난’을 언제 하준에게 받았는지, 하준은 언제 이 초콜릿을 샀는지를 기억해내기 위해서다.


백설이 눈을 감자 눈앞이 깜깜해진다. 백설이 차분하게 천천히 걷자 앞에 문 하나가 보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억의 창고’가 나온다. 백설이 그곳에서 자신이 하준에게 초콜릿을 받았던 기억과 하준이 먹었던 식품들의 목록을 봤던 기억을 꺼낸다. 백설이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자 백설의 눈앞에 하준이 먹은 식품 목록이 좌르르 뜬다. 백설은 그중에 ‘찰리의 장난’이 나온 부분만 집중적으로 확인한다.


‘뭐지.’

백설이 중얼거린다.


백설이 다시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확인한다. 백설이 하준에게 초콜릿을 받았던 날, 하준이 초콜릿을 사지 않았다. 이건 일주일 전보다 더 전에 하준이 초콜릿을 샀거나, 어쩌면 누군가에게 받은 걸 수도 있다.


‘근데 그때 하준이가 들고 있었던 건 거의 새것이었던 거 같은데.’

백설이 중얼거린다.


백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준이 새로 산 초콜릿을 일주일도 넘게 냉장고에 보관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누군가에게 받은 초콜릿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충돌했다. 어느 쪽이든 쉽게 확신할 수 없다.


하.


백설이 깊은 한숨을 쉰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와중에도 잠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진다.


‘약을 안 먹을 수도 없고.’

백설이 중얼거린다.


순간, 백설이 싸한 느낌에 멈칫한다. 백설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봤던 영상이 떠오른다. 바로 마약성 진통제 부작용과 관련한 영상이다.


‘어. 잠깐만.’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아이들 상태가 이상했다. 등교지도 때 늦잠을 자서 늦게 나오는 아이들이 많아졌던 일, 하준이 졸면서 걷다가 벽에 머리를 박아 이마에 멍이 든 일, 구름공원에 있던 아이들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비틀거리며 걸었던 일 등 당장 백설이 생각나는 것만 해도 수두룩했다. 심지어 그것들이 그 영상 속에서 보였던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설마.’

백설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백설이 미간을 찌푸린다. 정말로 보육원 안에서 마약성 진통제가 유행하고 있다면 이건 위험한 일이었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


백설이 작게 심호흡한다. 일단 침착해야 했다. 확실하지 않은데 성급하게 나서면 안 되었다. 괜히 혼란만 줄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알려야지.’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찰리의 장난’을 꺼낸다. 이게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이걸 건네야 했다.


지이잉.


백설의 스마트워치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백설이 스마트워치를 확인한다. 정 박사가 보낸 메시지다. 내용을 확인하니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백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정 박사를 만나러 가야 했다.



*



A-2구역 정 박사 진료실.


백설이 정 박사의 다급한 호출을 받고 곧장 병원으로 왔다. 그리고 정 박사의 진료실을 찾았다. 하지만 정 박사가 아직 오지 않아, 백설은 혼자 진료실에 앉아 정 박사를 기다리고 있다. 백설이 컴퓨터가 놓인 책상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심심한지 정 박사의 진료실을 찬찬히 둘러본다. 자주 오지는 않아서인지 진료실 안에 물건이 거의 없고, 청소를 자주 해서인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다.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삭막한 느낌이 든다.


달칵.


진료실 문이 열린다. 백설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 박사가 진료실로 들어온다.


“오래 기다리셨죠.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정 박사가 말한다.

“아니에요.”

백설이 말한다.


정 박사가 컴퓨터 책상 앞에 앉는다. 백설이 정 박사를 따라 앉는다. 정 박사가 컴퓨터를 켠 후, 곧장 센터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간다. 그리고 하준의 채혈 검사 결과지 파일을 찾아 연다.


“결과가 뜻밖이라서 다른 선생님들은 못 보게 열람 제한을 걸어놨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이야기가 새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정 박사가 말한다.

“네.”

백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 박사가 화면을 돌려 백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지 한 부분을 가리키며 백설에게 설명한다. 백설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거죠?”

정 박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네.”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정 박사에게 그동안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갑자기 복통을 느끼거나 지나친 피로를 호소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거나 환각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생기도 했다고 말이다. 정 박사는 백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백설이 이 상황을 이상하게 느끼고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군요. 하준이 방에 들어가서 그동안 먹은 음식들을 조사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방법이 있을까요?”

정 박사가 묻는다.

“가능할 것 같아요. 하준이가 뭔가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픈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방에 들어가서 그동안 먹은 음식을 조사해야겠다, 이런 쪽이면요.”

백설이 말한다.

“네. 그럼 방에 음식 조사할 수 있도록 검사지 만들어서 드릴게요. 혹시 모르니 마약성 진통제랑 진주가 몸에서 나왔다는 건 비밀로 하고요.”

정 박사가 말한다.

“네. 그래야죠.”

백설이 말한다.


“아, 그리고 이거요.”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주머니에서 ‘찰리의 장난’을 꺼낸다. 그리고 곧장 정 박사에게 건넨다. 정 박사가 백설과 초콜릿을 번갈아 보다가 건네받는다.


“하준이가 저한테 줬던 초콜릿이에요.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백설이 말한다.

“아, 네.”

정 박사가 대답한다.


정 박사가 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복잡하게 하준의 방을 조사할 필요 없이, 어쩌면 이 초콜릿 하나만으로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초콜릿 성분 조사해보고 난 다음에 하준이 방 조사하면 어떨까요?”

정 박사가 묻는다.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백설이 말한다.

“네. 그럼 이거 먼저 조사해보고 그다음에 연락할게요.”

정 박사가 말한다.

“네.”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모니터를 응시한다. 단순히 ‘마약성 진통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주’까지 나왔다니 이상했다. 설마 누군가가 ‘진주’가 안전한지 실험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다.




백설이 하준의 병실로 왔다. 정 박사와 헤어진 후 잠시 하준을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온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조용할 줄 알았는데 병실 주변이 소란스럽다. 곧 백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준이 깨어난 것이다. 백설이 들어가서 하준을 만나도 좋다는 의사의 말에 곧장 병실로 들어간다.


백설이 병실 안쪽에 있는 하준의 침실로 천천히 다가간다. 병실 안의 모든 불이 꺼져있고 하준의 병실 옆에 있는 스탠드 조명만 켜져 있다. 하준이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느라 백설이 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안녕.”

백설이 인사한다.


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설을 바라본다. 하준이 퀭한 눈으로 백설을 빤히 바라본다. 백설도 하준을 바라본다. 눈동자에 생기가 없어 눈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든다. 거기다가 눈 밑에 다크써클도 진하게 난데다가, 얼굴도 까칠해서 초췌해 보인다. 하필 주변에 있는 조명이 주황색 불빛이라 하준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아 보인다.


“몸은 어때? 괜찮아?”

백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하준이 백설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는다. 손끝에 달달 떨린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구원을 바라듯이 손을 뻗는 모습이었다. 백설이 미간을 찌푸린다. 하준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다.


“선생님, 저 초콜릿 먹고 싶어요.”

하준이 말한다.

“초콜릿?”

백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헙.”

하준이 화들짝 놀란다.


하준이 뻗었던 손을 홱 당겨 자신 앞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괜히 백설의 눈치를 본다. 백설이 실눈을 뜨고 하준을 바라본다. 하준의 이상한 행동에 백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와중에 백설이 손이 주머니를 스친다. 백설의 머릿속에 빛이 번쩍인다. 그러고 보니 하준이 최근에 이걸 자주 먹었다고도 했다.


‘설마 이거였어?’

백설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준이 아팠던 이유도 하준의 이상한 행동도 다 이것 때문인가 싶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이 일순간에 맞춰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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