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의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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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햄스터
작품등록일 :
2023.07.0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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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2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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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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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마지막 희생 (1)

DUMMY

2화 마지막 희생 (1)


1



그들이 온다.

괴수들이, 우리의 선홍빛 육편을 탐하며 달려오고 있다.


나는, 우리는, 족히 수천은 되어보이는 추악한 짐승들의 행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저 ‘바라보았다’는 표현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디에 시선을 둬도 괴수들이 보이기에, 우리는 그저 눈 앞의 장관에 압도되었다고 해야 옳으리라.


뭐, 시답잖은 감상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용병은 그리 고상한 인간들이 아니지 않는가.


용병의 정점이자, 현시대의 용병제일검 傭兵第一劍.

검에 한해서 더 이상 능가할 자가 없다는 이벨린이 작게 읊조렸다.


“온다.”


“나는 용병이라는 작자들이 계급 달고 나랏밥 드시는 양반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았소.”


그런 이벨린의 읇조림에 젠슨 아저씨가 말을 꺼냈다.


“·····꼬우면 네가 1급 용병하던가.”


이쯤되서 누군가 끼어들 타이밍인데.


“·····그래도 마지막인데 조금은 친절해지면 어디가 덧나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유언 같길래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한거지.”


“야···. 넌 애가 어쩜·····.”


“아니, 괜찮소. 용병 주제에 마지막 말이라니.

웃기는 일이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투닥거린다니.

참 그들답다고 해야하나.


"유언은 평소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한 멍청이들이나 하는거야. 이곳에 하루 하루를 마지막처럼 즐기지 못한 자가 있나?"


"없습니다!"


"좋아, 그럼 가보자고."


벌써 꽤 가까이 다가온게 눈으로 보일만큼 괴수들은 서로를 짓밟으면서 마구잡이로 달려왔다.


수천의 괴물.

그에 맞서는 것은 고작 열 여섯의 비루한 용병.


실로 압도적인 격차.

그 누구도 용병의 승리를 점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뭐."


이벨린은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쟁투의 여신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는듯.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살아남도록."


그렇게 우리는 괴수들을 맞이하기 위해 호기롭게 달려나갔다.

아니, 달려나가려 했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하늘에서, 절망의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무수한 화살이 아닌, 괴수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을 것이다.


.

.

.


굉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은 고막을 찢어버릴 기세로 연달아 울려 퍼지는 폭음이었다.


-콰앙!


폭음?

그저 괴수들이 모인 무리에서 폭발이 일어날 수 있던가.


아니, 간혹가다 그런 놈들이 있었다.

워낙 괴수들의 종이 다양하다 보니, 어느샌가 종종 스스로 자폭도 하는 괴수도 나타났다.


-···일··나!


머리가, 머리가 울리는데.


-·····마!


깨질 것 같은 이명과 폭음이 점차 가라앉자 머리를 울리던 목소리가 서서히 뚜렷해진다.


“·····소마!”


“선배?”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간 죽는다!”


아.

나는 누워있었다.

아니, 주저앉아 있었다.


기절한 몇 초 동안 둘러싸인 건가.


아니, 몇 초가 맞긴 하나?

피가 부족해 사고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출혈을 의식하자 순식간에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몽롱해진다.


-퍼억!


다시 저 멀리 떠나가려던 정신을, 복부에서 폭탄이 터진듯한 고통이 붙잡아 끌고 오는 느낌을 아는가?

난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흐으······.”


“·····네 통각을 일시적으로 올렸어.”


눈물이 찔끔 나온다. 그래도 배를 찌르는 격통에 정신이····.


“너무 세게 때렸나?”


그만 그대로 꼬꾸라질 뻔했다.


“····아니, 감사합니다.”


타인의 오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그래도 덕분에 정신은 확실하게 돌아왔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까.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괴수와 괴수, 그리고 괴수였다.


‘정신 차려라.’


필사적으로 본인의 안위를 챙겨야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의 걱정이라니.

오지랖도 유분수지.


이벨린을 쳐다보자, 가히 동쪽 대륙의 구전 속 검막(劍幕)의 경지를 연상시키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사방을 베고 있었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건가.

일어나라.

땅을 짚고 일어나서 그녀를 도와라.


팔다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이 뭔 줄 아는가?

바로 팔다리에서 아무런 촉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무서웠다.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도 되지 않기에, 두려웠다.


심리적 압박감에 숨마저 막히고, 이벨린이 기껏 살려준 목숨이 다시 끊어질 듯 위태로울 때, 나는 숨쉬기를 포기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른 건지 숨만 쉬어도 격통이 사고를 방해하기에, 마력으로 기도를 틀어막고 직접 산소를 옮겼다.


천천히. 움직여라.

다행히 다리는 말을 들어준다.


검을 휘둘렀다.

아니, 검을 휘두르기 위해 몸을 휘적거렸다.

팔에 감각이 없었다.


팔을 내려다 보기 무서웠다.

만약 찢겨 너덜거리고 있다면.

만약 뼈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곤죽이 되어 있다면.


오른팔에는, 화살이 박혀있었다.

신경이 끊어진 건가.


다행이다.

마력으로 이으면 되니.

신경이 끊어져 말을 듣지 못하고 있는 오른팔을 억지로 움직이자,


아팠다. 끔찍하게.

차라리 팔이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할 정도로, 끊어진 신경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되지 못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지금 나는 서있었다. 검을 앞으로 겨눈 채로.


이제 나는 두 다리로 서서 검을 들고 있으니,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베라. 눈앞의 괴수를 베는 것이다.


아니, 이런 식으로 휘둘러서는 벌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더 세게. 더욱 강하게 검을 움직여라.


한 번.


빗 맞혀도 상관없다.

검을 부숴버릴 심산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아래로 내리그어라.


두 번.


서걱.


괴수를 베었다.

그러나 괴수 한 마리를 베어넘긴 이 동작은,

방금 내가 베어 죽인 괴수 한 마리는, 그저 괴수 한 마리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있음을, 나는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선포였으며,

또한 나는 괴수를 벨 수 있으므로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이었다.


나는 일어섰기에, 드디어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최대한 차분히, 냉정하게 주변을 파악하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괴수들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우린 그 파도 속 한가운데 난파 難破 되었다.


나는 온몸에 꽂혀 대롱거리는 화살들을 애써 무시하며 마치 바다같이 헤아릴 수 없는 괴수들을 베어 저지 중인 이벨린을 관찰했다.


이벨린의 검은, 멈춰있지 않았다.


밀고 들어오는 괴수를 내려벴다.

그대로 다음 괴수를 올려베었다.


그리곤 잠시 멈추었나 싶더니, 그녀의 검은 나에게 달려들려던 옆의 괴수를 베고 반대쪽에 나타났다.


하나로 이어진 획 劃.


이벨린의 검로는 붓질의 그것과도 닮아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 한복판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오해했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마력으로 강화되어 초인적인 속도로 휘두르는 검은 마치 굳건한 벽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검도 점차 시간이 지나자 혹사되어 무뎌지고,

이벨린과 괴수들 모두에게 장애가 되는 괴수의 시체들이 쌓이자,

완벽해 보이던 그녀의 벽도 하나둘씩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들어가야 할 때는 지금.


-서걱


“다른 제국 군들은 어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지만.


이벨린의 뒤에 서자 쏟아지는 괴수들의 향연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녀와 나.

단둘의 목숨을 노리고 개떼같이 달려드는 짐승들.


버텨야 한다.

이 검격에 이벨린의 목숨이 달렸으니.

내 마지막 숨을 검 끝에 담아서라도 베어야 한다.


잡념을 버리니 그제야 비로소 쓰러져 있었을 때는 미처 알 수 없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졌다.


뜨겁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헬 하운드의 숨결이, 뒤집어쓴 시체 포식자의 피가, 반으로 두 동강이 나 허물어지고 있는 검은 오크의 온기가 너무나 뜨거웠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체력을 쥐어짜 검격 한 번 한 번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기를 한참.


"소마!"


아.

방금 내 이름이 불린 건가?


이벨린의 외마디 의성은, 그녀의 외침은, 고요한 전쟁을 뚫고 들려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집중력으로 주변의 소음은 들리지 않은지 한참일진대, 그녀의 외침은 이 고요한 전란 속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벨린의 검이 간발의 차로 내 머리를 뭉개버리려 내려오던 오크의 몽둥이보다 먼저 괴수의 목에 닿았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그녀의 검은 오크의 목을 찔러 들어갔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

조금 더 들어간 느낌이다.


곧이어 피가 퍼지고, 멈춰있던 검은 더더욱 목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빠드득!


철제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길게 울리고, 검은 마침내 그 붉은 검날을 드러냈다.

드디어 목을 찌르고 관통한 것이다.


어째선지 느려진 세상 속에서, 천천히.

또 천천히 붉게 물든 검은 내 머리 위로 회수됐다.


평소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이벨린의 검이 선명히, 또 느리게,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검도.

흩뿌려지는 오크의 피도.

날아오르는 헬 하운드의 머리도.

내가 취해야 하는 다음 최적의 검로도.


전부, 보였다.


검로가 보인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짜 보였으니까.


어찌해야 될 바를 몰랐던 내 검의 끝은, 이제 나아가야 할 곳을 알았다.

이리저리 휘어지던 내 검은, 이제 올곧았다.


짧게 끊어 내리쳐라.


-서걱


그대로 부드럽게 올려쳐라.


-촤악!


나는 이해할 수 없던 이벨린의 검을 어느샌가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최강(最強)이자 최고(最高)의 검술은 그녀의 것이기에, 나는 그녀의 검을 따라 하고 있었다.


여기선 크게 휘두른 뒤, 단숨에 꿰뚫어라.


점차 상, 하, 좌, 우라는 사방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곳에는 그저 춤을 추는 남녀 둘만이 존재했다.


내가 누구인가.

용병제일검의 후배일 수도 있고, 한 명의 2급 용병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그저 소마 한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으며, 눈앞에는 벨 것이 있었다.


한 명의 용병 앞에 괴수가 있었으며,

소마 한의 앞에 이벨린을 죽이려는 자가 있었다.


베라.

베고 또 베어서, 잔털 하나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

.

.


검아일체 劍我一體.

이 순간 나는, 잠시였으나 검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동안 검이 나를 휘둘렀고, 내가 검을 세게 붙잡자 검도 나를 굳건히 붙잡았다.


변검(变劍)이나 환검(幻劍) 같은 검의 형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가는 대로 흘러가듯이 춤을 출 뿐이었다.


그렇게 언제 동안 하고 있었는지 모를 검무(劍舞)가 끝나자,

이 공간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의 괴수들과 마지막으로 쥐어짤 힘까지 모두 사라진 것이다.


말하자면, 그래.

무(武)를 쏟아붓고 마침내 무(無)가 되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 우리는.

아직 살아있었다.


바로 이 순간 내가 이벨린의 이능으로 잠시나마 망아지경(忘我之境)의 경지에 발을 걸쳐 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은 먼 훗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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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화 기연이 취향은 아니다만 (1) 23.07.24 12 1 11쪽
8 8화 멜라흔 대초원 (3) 23.07.19 13 1 12쪽
7 7화 멜라흔 대초원 (2) 23.07.16 12 1 11쪽
6 6화 멜라흔 대초원 (1) 23.07.14 21 1 11쪽
5 5화 마지막 희생 (4) 23.07.12 24 1 11쪽
4 4화 마지막 희생 (3) 23.07.10 23 1 10쪽
3 3화 마지막 희생 (2) 23.07.09 31 2 12쪽
» 2화 마지막 희생 (1) +1 23.07.08 37 3 12쪽
1 1화 한사의 용병 (1) +1 23.07.08 9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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