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린이에게 받은 문자로 생각이 많아졌다.
혼자 오라니 무슨 의미일까.
나는 일단 김서연이 듣지 못하도록 차에서 내려 멀리 떨어진 뒤 아린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얘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리는 없으니 전화 정도는 괜찮겠지.
“아, 준호야, 레이드 끝났어?”
아린이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던전에서 막 나와서 이제 봤네. 전화했던데 무슨 일이야?”
“별 건 아니고 헌터관리국 요원님이 나오셔서 좀 물어볼 게 있다는데 나는 잘 모르는 쪽이라 너랑 대화를 좀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지금 길드에서 기다리고 계셔.”
헌터관리국?
이제 오주한과 김민주는 안면을 튼 사이니 저렇게 두리뭉실하게 말할 리는 없고 누군지 모르는 요원이 왔다는 소린데⋯.
그래서 혹시 그 요원이 김서연을 알아볼라 혼자 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헌터관리국? 음,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길드에 있다는 건 함께 있다는 소리일 것이고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한 뒤 바로 김서연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야, 지금 길드에 헌터관리국 요원 와 있다는데⋯.”
“김서연.”
“뭐?”
“내 이름 알잖아. 왜 나만 야, 너, 이렇게 부르는 거야? 조직에 있을 때 다들 날 그렇게 불러서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 듣기 싫어.”
“그래, 알았어, 아무튼⋯.”
“김서연.”
“⋯그래, 서연아.”
“응, 헌터관리국 요원이 길드에 와 있다고? 벌써 뭔가 눈치챈 건가?”
서연은 내가 이름을 불러준 뒤에야 대화에 응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 일단 내가 길드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볼 테니까 혼자 어디 가서⋯.”
[경고! 계약에 따라 김서연을 보호하십시오! 계약이행을 거부할 시 강제성이 발생합니다!]
이런, 이것도 안 되는 건가.
“⋯책임져.”
서연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을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엔 약간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같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피하면 요원이 의심할 텐데⋯.
나는 일단 제일 만만한 형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여보쇼.”
“형, 뭐해.”
“던전 다 끝내고 하은이랑 밥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왜, 너도 올래?”
형은 부상 때문에, 하은은 마력을 아끼기 위해 둘이 한 팀으로 움직이게 해뒀는데 마침 잘 됐다.
나는 형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서연을 그쪽에서 맡아달라고 했다.
“이러면 됐지?”
“응.”
A급 마법사에 B급 헌터와 함께 있으면 어지간해선 별일 없을 것이다.
꼭 내가 직접 지키는 게 아니더라도 서연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하니 경고창이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서연을 형과 하은에게 맡긴 뒤 길드로 향했다.
“절 찾으셨다고요?”
길드에 도착하자 먼저 굉장히 불편한 기색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아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정장 차림의 요원이 보였다.
어깨까지 닿는 장발에 살짝 웨이브를 준 굉장한 미형의 남성이었다.
그의 행색을 대충 살펴보니 명품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가 입고 있는 정장과 구두, 시계와 옷깃에 꽂아둔 선글라스까지 모두 꽤 고급 브랜드의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 좋아졌다고 하지만 딱딱한 공직사회인 헌터관리국의 말단 요원이 저러고 다닐 리는 없으니 그가 상당한 고위직의 요원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오셨군요.”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나를 보자 부드럽게 웃으며 일어나 악수를 청했고 자기소개 같은 어찌 돼도 상관없는 부분은 시원하게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고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찾아뵀습니다. 어디 보자~.”
그는 역시 고급 브랜드의 서류 가방을 뒤적여 간단한 서류 몇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지금부터 할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자료 같은 것이었다.
“업무 중 확인해보니 귀사와 저희 헌터관리국 간에 NDA가 체결되어 있더군요.”
“NDA요⋯?”
“하하, 모르는 척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공식적인 업무지시를 받고 나온 요원이니 저한텐 말씀하셔도 됩니다. 혹시 걱정되시면 요원증과 업무지시서라도 보여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NDA가 뭔지 몰라서요⋯.”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전문용어를 알아먹지 못하자 요원은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려 가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었다.
“비밀유지계약 말입니다. 헌터관리국과 계약한 게 있으시죠?”
“아, 네, 있습니다.”
대충 서류를 확인해 계약된 날짜를 확인해보니 오주한 요원의 제안으로 맺은 그 계약 건 같은데.
“죄송하지만 더 이상을 계약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계약이 해지되었음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예? 갑자기 왜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가는 것도 이상하기에 나는 일단 따져 묻는 시늉이라도 했다.
“아시다시피 어젯밤의 일로 새로운 국장님이 부임하셨는데⋯ 귀사와의 계약을 확인해보니 전 국장님의 권한으로 비밀계약이 체결돼 있어 어떤 계약이 이루어졌는지 파악이 불가해 그렇습니다. 세금 감면과 던전우선권 혜택을 갑자기 잃어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양해 바랍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안 되나요?”
“⋯기분 나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귀사에서 주장하는 계약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순 없으니까요. 물론 일전의 A급 던전에서 발생한 세금은 계약의 효력이 있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임으로 계약대로 감면해드리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전 이만.”
나는 탐탁지 않지만 납득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요원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서류를 챙겨 쌩 길드를 떠났다.
나는 그가 새파란 스포츠카에 타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저 요원 언제부터 와 있었어?”
“내가 길드에 돌아오기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최소 5시간은 된 것 같은데?”
척 보기에도 한자리하는 요원이 고작 계약 해지를 알리기 위해 5시간씩이나 죽치고 있었다라.
“이상한 건 없었어?”
“있었지! 기분 나쁘게 계속 마력으로 주변을 훑던데?”
“뭐 찾으러 온 사람처럼?”
“딱 그런 느낌으로!”
“한마디 하지 그랬어.”
“나 그런 거 못 하는 거 알잖아⋯.”
생판 모르는 요원과 단둘이 몇 시간 동안 있어야 했던 어색한 시간이 힘들었는지 아린이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 늘어졌다.
역시 전문가들인가, 뭔가 벌써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면 그 김서연⋯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안 그래도 그거 생각 중이었는데.”
만약 요원들이 우리 길드에 의심을 품고 작정하고 수사에 착수하면 김서연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내가 김서연과 함께 산골짜기 절간에 처박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되면 차라리 대담하게 나가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너한테 신세 좀 져도 될까?”
“나한테?”
“너희 집에서 걔 좀 맡아줬으면 하는데.”
“뭐⋯ 알았어. 중요한 일이니 좋고 싫고를 따질 때는 아니니까.”
내 부탁에 아린이는 그다지 달갑지는 않지만 대충 예상은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한테 다 떠넘기고 나 혼자 손 훌훌 털겠다는 말은 아니야.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나도 최대한 책임을 질게.”
“응? 뭐 어떻게 하게?”
“어차피 밥 때문에 거의 매일 너희 집에 들르니까 이렇게 되면 당분간 나도 아예 너희 집에서 살아버리려고 하는데, 어때?”
“그럼 난 좋지!”
아린이는 김서연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편함보다 나와 함께 생활하는 편리함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지 반색했다.
“하은이랑도 이야기는 해봐야겠지만⋯ 일단 허락해줘서 고마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냥 정면 돌파였다.
김서연을 숨길 수 없다면 아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버리는 거다.
이렇게 아예 합숙을 하면 내가 말 한마디로 항상 김서연을 컨트롤 할 수도 있고 이상을 감지하는 즉시 서로의 상태와 상황을 공유할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비하기도 좋았다.
나는 반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직 밖을 떠돌고 있을 형에게 연락했다.
***
“어, 돈 들어왔다.”
모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드 계좌로 연달아 거액이 입금됐다.
하나는 A급 던전에서 수거한 마석과 부산물을 판매한 금액인 33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무라고스의 데스 사이드를 판매한 대금이었다.
던전 정산금은 그렇다 쳐도 그 하자 있는 데스 사이드를 진짜 40억 주고 하루 만에 사 갈 줄이야.
어쨌든 순식간에 73억이라는 현금이 꽂혔다.
예전 같으면 0의 숫자를 세며 기겁할 액수겠지만 무려 천억대의 돈을 한순간에 가졌다 한순간에 잃어봐서 그런지 그냥 숫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세금이나 비용은 다 공제하고 들어온 순수익이니 나는 기계적으로 나누기 4를 해 인당 얼마씩 나누어주면 되는지 계산해봤다.
“18억 2500만 원씩 주면 되네.”
다른 길드 같았으면 일단 길드에서 20% 정도를 떼가고 레이드 기여율이나 직급, 포지션 등을 복잡하게 따져 차등 지급하겠지만 우린 길드가 작아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간단히 정산할 수 있어 좋았다.
“정산해줘야겠다.”
길드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첫째도 돈이요, 둘째도 돈이니 나는 지체할 것 없이 형과 하은이에게 돈을 입금해주었다.
어차피 아린이는 한결은행에 열심히 빚을 갚아야 하는 몸이고 나도 당장은 딱히 돈을 쓸 일이 없으니 우리 둘의 정산금은 일단 여윳돈으로 길드 계좌에 그대로 두었다.
“꺄아아악!”
그런데 그 순간 길드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란인가, 밖을 나가보니 비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은이었다.
하은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벌벌 떨며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길드 바로 앞까지 와서 멈춰 서 있는 하은을 부르자 그녀는 나를 향해 도도도 달려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밀며 물었다.
“아, 아저씨! 이거 뭐야?! 뭐 잘못된 거 아니야?!”
하은이 내민 화면은 하은의 통장 잔고였다.
갑자기 입금된 거금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잘못된 거 아니야, 네 돈 맞아.”
“10억이라며? 이건 거의 20억인데?!”
“최소 10억이라고 했지 딱 10억이라고는 안 했잖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구나. 그 보스 무기 있잖아, 그걸 감정가 두 배 가격에 팔았거든, 그래서 정산금이 확 올랐어.”
“얼마에 팔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팔았는데?!”
“40억, 그냥 그 가격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겠다는 사람이 있더라고.”
“사실은 엄청나게 좋은 아이템이었던 거야?!”
“아니, 그냥 돈 많은 괴짜.”
하은은 내 말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통장 잔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로또 1등 한 번 돼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 정도면 어지간한 1등 당첨금 수준인데⋯! 이 돈을 알바로 벌려고 하면 18만 5091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56년간 한 푼도 안 쓰고 벌어야 하는 돈이잖아⋯!”
역시 마법사는 타고나는 게 맞는 건가 계산 한번 엄청나게 빠르네.
하은은 아직도 이게 진짜 자기 돈이 맞는 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리저리 뽈뽈뽈 돌아다니며 기뻐하고 있었다.
“⋯⋯⋯⋯.”
그런 하은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린이가 내 옆으로 오더니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눈빛을 보냈다.
눈치가 부족한 나는 얘가 왜 이러나, 의도를 알아채는 데 조금 오래 걸렸지만 이내 아린이가 왜 그러는지 깨닫고 확실히 이때다 싶어 하은에게 말을 걸었다.
“하은아, 할 말이 있는데.”
“왜~ 뭔데~ 듣고 있어~.”
딱 봐도 제대로 안 듣고 있었다.
“일 때문에 아린이네 집에서 잠시 나랑 서연이랑 둘이서 신세 좀 지려는데 괜찮아?”
“몰라, 난 상관없어~.”
“그래, 고마워~.”
나는 하은이 돈에 정신이 팔린 틈을 이용해 불편한 동거를 어물쩍 허락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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