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흐이익⋯!”
평화로운 아침 식사 시간, 갑자기 온 휴대폰 알람을 본 나는 놀라 기겁했다.
“밥 먹는데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아빠가 그렇게 말하길래 나는 내 휴대폰 화면을 아빠에게도 보여줬다.
“흐이익⋯!”
그러자 아빠도 똑같은 소리를 냈다.
“왜 뭔데 그래?”
어지간해선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빠마저 기겁하게 한 정체가 뭔지 궁금했던 엄마가 물었고 마찬가지로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본 엄마는.
“어머나!”
- 땡그랑!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정도로 놀랐다.
“뭔데, 뭔데?”
부모님이 한 번씩 놀란 뒤엔 아린이 차례였다.
얘는 이제 진짜 무슨 가족처럼 우리 집에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아, 들어왔구나!”
마지막으로 화면을 본 아린이는 별로 놀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입금 70,642,856,900원.
알람의 정체는 은행 어플의 입금 알림이었다.
내 통장에는 갑자기 706억이라는 돈이 한 방에 꽂혔고 그 금액을 본 부모님은 아주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아, 나도 들어왔나 보다!”
곧이어 아린이도 진동을 느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해봤다.
472억.
아린이에게 입금된 금액은 472억이었다.
그럼 어디 보자⋯ 706 더하기 472니까⋯ 합쳐서 1178억⋯?
8대2로 정산 했을 땐 합쳐서 860억인가 그랬으니까 소은 누나의 말대로 정산 비율을 수정한 것만으로도 316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액이 남았다.
당연히 여명길드 측에선 정산 비율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난리를 치며 이의를 제기하긴 했지만 그건 소은 누나 쪽에서 알아서 정리해줬고 결국 승복한 모양이다.
“엄마, 아빠,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큰돈도 생겼겠다, 어디 자식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나는 부모님이 막 신나서 이사도 가고 차도 바꾸고 초호화 크루저로 세계를 일주하는 등 평생 꿈꿔왔던 희망 사항을 막 이야기하실 줄 알았는데 두 분은 의외로 담담했다.
“이럴 때일수록 겸손해야 해, 목숨 걸고 번 돈 정승처럼 써야지 개처럼 쓰면 졸부 티 난다.”
“돈 쓸 생각하기 전에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 네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부터 잘 생각해봐. 벼락부자 됐다가 술도박여자에 빠져서 인생 말아먹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니?”
“어⋯? 어어⋯.”
부모님은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큰 돈을 얻어버려 삐뚤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모양이다.
“흠⋯ 어떻게 살고 싶은지라⋯.”
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은 나는 아직도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액수의 금액이 찍힌 은행 잔고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물론 이게 다 내 돈은 아니고 우리 둘이 받은 돈을 합쳐 원래대로 8대2로 다시 나누기로 했으니 이 중에서 내 돈은 235억 정도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기에는 충분히 큰돈임은 매한가지였다.
부모님의 말마따나 고생해서 벌었으니 이제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제대로 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좋아?”
내가 한참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으니 침대를 점거한 아린이 그렇게 물었다.
“좋지, 이제 적어도 뭐 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은 평생 안 해도 되는 거니까.”
“그렇구나~.”
아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척했지만 별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직업과 장래에 대한 걱정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테니 공감하지 못할 만도 하지.
“그럼 이제 돈도 들어왔겠다, 우리도 그만 놀고 슬슬 할 일 해볼까?”
“할 일? 어떤 거? 길드 만드는 거?”
“그것도 그런데 일단 네가 살 집 찾는 거.”
어차피 돈도 없으면서 집만 보러 다녀봤자 의미가 없으니 미루고 미뤘는데 이젠 때가 온 것 같았다.
“엣.”
그런데 아린이는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 혹시 이대로 우리 집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니?”
“아, 안 되나?”
“안 되지⋯ 애초에 안 불편해?”
“불편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혼자 있을 때보다 좋은데⋯?”
이게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충전되는 사람의 차이인가?
아예 정식으로 눌러산다고 하면 뭔가 부모님은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남을 집에 들여 함께 사는 건 굉장히 이질적인 일이지만 우리 부모님만 해도 서울에 상경해 하숙집에서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 먹으며 알고 지내다 결혼까지 했으니 그런 것에 대한 마인드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는 없으니 나는 빨리 독립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래도 안 돼. 일어나, 가자.”
“으윽⋯.”
아린이는 귀찮다는 듯 잠시 침대에서 꿈틀거리더니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고 우린 일단 무작정 동네 부동산을 찾아가 봤다.
“흐음⋯.”
하지만 집을 보려고 해도 어떤 집을 어떻게 봐야 할지 이제 20살 초반인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부동산 유리창에 붙어 있는 매물 전단지를 한 번 슥 훑어봤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흐음⋯ 야, 아린아.”
“응?”
“근데 생각해보니까 네가 살 집을 굳이 따로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 그렇지? 역시 같이 살아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 집에서 다시 살고 싶다며.”
여기 있는 평범한 아파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비싸겠지만 매물만 있다면 어차피 돈은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아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오히려 이제 이쪽 동네에 더 정들었어.”
“며칠이나 있었다고 벌써?”
“이쪽에서 산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쪽 집에 있을 땐 훈련장이랑 집만 왔다갔다 했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근데 여기선 벌써 추억이 있잖아. 여기가 좋아.”
“그래? 그런데 미리 말해두는데 이 주변엔 거기같이 넓고 좋은 집은 없다?”
“너도 우리 집 와봐서 알잖아, 나 혼자 방 한 칸만 쓰는 거.”
“공간 낭비가 심하긴 했지. 좋아. 그럼 일단 한번 들어가 보자.”
부동산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실전을 겪어봐야 뭐라도 감이 오겠지, 우린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잠시간의 상담 후, 직접 건물의 위치와 실물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남향이고, 평수 좋고 층수 좋고, 이런 집에 이 정도 가격이면 아주 좋은 편이에요!”
“으음~.”
“여긴 근처에 초,중,고 다 있는데 학군도 좋고 공원도 가깝고 역에서 10분이에요!”
“흐음~.”
“아~ 여긴 말할 필요도 없죠, 고급 아파트 브랜드 중에서도 평가가 제일 좋아요! 신축이라 깨끗하고요!”
“음~.”
우린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주로 아파트를 보고 다녔다.
내가 보기엔 어디로 해도 딱히 상관없을 것같이 그냥그냥 다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아린이는 딱히 마음에 드는 집이 없는지 반응이 전부 시큰둥했다.
뭐 가격 때문에 고민하는 건 절대 아닐 테니 정말 삘이 팍 꽂히는 그런 집이 딱히 없었나 보다.
“뭐, 다른 곳도 여기저기 둘러보시고 천천히 고민해보세요! 집이 어디 동네 마트에서 라면 사듯이 간단히 살 건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늘은 별 수확 없이 집에 돌아가려는데 부동산 사무실을 나가려던 아린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저, 저기 사장님!”
“네?”
“이 집도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아린이는 웬 낡은 개인주택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음~ 이건 요~ 앞에 있는 집인데 젊은 아가씨가 살기엔 좀⋯.”
“이 집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네, 뭐.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런 아린이의 요청에 우린 부동산 근처에 위치한 낡은 개인주택을 보러 갔다.
“오우⋯.”
사진이 그나마 잘 나온 거였네.
아린이가 고른 집을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더 촌스러웠다.
대문과 작은 마당이 있는 일자 모양의 1층 건물.
전형적인 오래된 시골집이 떠오르는 그런 집이었다.
“아, 안에 한 번 들어가 보실래요?”
“아니요.”
역시 실물을 직접 본 아린이는 자기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안에 들어갈 볼 생각도 안 하고⋯.
“살게요.”
산다고 했다.
뭐?
“자, 잠깐만 아린아, 뭐라고?”
“나 이 집으로 할래.”
혹시 악령이 씐 집인가?
지금 그 악령이 빙의해서 윤아린을 조종하는 건가?
“조, 조금 더 생각을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다못해 안이라도 보고 나서⋯.”
그 말에 부동산 사장님 마저 아린이를 만류하며 내부를 보여줬다.
내부는 역시 낡고 촌스러웠다.
그냥 시골집이라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들지 않았다.
“역시 이 집 살게요.”
하지만 내부를 본 아린이는 더 확신을 가지고 집을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너 왜 그래? 다른 좋은 집도 많은데⋯!”
“그냥 여기가 할아버지 집 같아서 좋아. 어릴 때 이런 집에서 살았거든.”
아린이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듯 웃으며 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당도 마음에 들어, 이 정도면 가볍게 몸 푸는 데 문제없을 것 같아.”
아린이는 집도 집이지만 집을 나오면 바로 마당이 있다는 것도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집을 고를 때 집에서 훈련도 하는 걸 상정하며 고르고 있었다니, 설마 아파트가 다 마음에 안 들었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진짜 괜찮겠어? 나중에 후회 안 하지?”
“응, 난 마음에 들어.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면 뭐 어때? 그때 또 다른 집 사면 되지.”
아린의 말에 나는 순간 우리가 도합 1000억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이제 이런 집 한두 채 정도는 마음에 들면 피규어 모으는 느낌으로 모아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날 아린이는 결국 동네 마트에서 라면 사듯 간단히 자신이 살 집을 골랐다.
***
“준호야, 나 청소하는 거 도와줄 거지?”
“아, 이사가는 거 오늘이지? 근데 그냥 몸만 가는 건데 이사 맞나?”
며칠 뒤 아린이는 드디어 우리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근처 훈련장도 등록했고 아린이 집에 들일 침대나 TV, 옷장 같은 가구들도 알아보러 다니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뭔가 이제야 다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길드 설립에 대한 것도 신경을 쓰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또 어디서부터 시작하나⋯ 막막하긴 하지만 또 덤벼들기 시작하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내가 청소를 위해 챙긴 도구를 아빠 차의 트렁크에 넣고 트렁크 문을 닫을 때였다.
“응? 무슨 일이지. 네 누나.”
“⋯⋯⋯⋯.”
갑자기 소은 누나한테 전화가 와서 받아봤는데 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누나?”
“아, 응, 준호야. 바쁘니?”
“바쁘다면 바쁜데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음⋯ 그게⋯ 일단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라 미안한데.”
“얼마나 안 좋은 소식인데요? 누나가 뜸 들이니까 더 무서운데요?”
“음⋯ 그러니까, 그게⋯ 너랑 아린이가⋯ 어디에 좀 소환될 것 같아서 미리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소환이요? 어디에요?”
뭐 마왕이라도 잡으러 가야 하나?
“⋯이번 각성자 테러 사건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너랑 아린이가 채택됐어.”
“그게 그렇게 나쁜 소식인가요? 그냥 있었던 일만 증언하면 되는 게⋯.”
“말이 증인이지 사실상 심문이 될 거야. 정치권이라는 게 항상 그렇지만 너희를 악당으로 만들어 괴롭히면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마 꽤 귀찮게 굴 거야.”
아,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데.
내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이 전화도 오지 않았을까?
“⋯네, 알고 있을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청문회가 당장 열리는 건 아니고 그동안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만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쉬었다.
“준호야! 다 챙겼어!”
“야, 아린아⋯.”
“응?”
“우린 대체 언제 행복해질까?”
“가, 갑자기? 난 지금도 행복한데⋯?”
나는 때마침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들고나오는 아린이를 향해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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