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최근연재일 :
2024.09.19 08:00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499
추천수 :
16
글자수 :
333,103

작성
24.01.05 07:00
조회
68
추천
3
글자
12쪽

귀엽다고?

DUMMY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부촌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저택은 주변의 다른 집들과 비교해도 유독 특출난 부분이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한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높은 담벼락 위로 빨간 눈을 깜빡이는 CCTV가 잠시 앉아 쉬는 작은 새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고,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코팅이 된듯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매시간 쓸고 닦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출입은 여기까지라는 듯 소로와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라면 신발에 묻은 흙먼지조차 털어내야 할 것 같았다.


계단 끝을 막아선 대문은 튼튼한 나무문 정도로 보이지만, 그건 겉에 덧댄 장식일 뿐이고, 기본 골격은 물론, 촘촘하게 자리 잡은 두꺼운 철제 구조물은 어지간한 물리력으로는 부수고 침입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불청객의 침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대문 안쪽으로 널찍한 초록 정원에 자리 잡은 아름드리 단풍나무와 정원수의 조화로운 모습은 전문가의 작품 같았다.


내노라 하는 대기업의 월급으로는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에 둘러싸인 저택 내부로 은은히 비치는 간접조명이 깔끔한 정원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저택 내부에 반해 널찍한 탁자가 놓여있는 곳에는 유독 환한 조명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그릇에 수저가 닿는 소리, 입에 넣은 음식물 씹는 소리가 저택에서 나는 가장 큰 소음이었다.


“여보, 애들 얹히겠어요. 대화 좀 하면서 식사하세요.”


식탁의 가장 상석에 앉은 백 회장을 향해 말을 건넨 노부인은 조용한 식사시간이 영 불편했는지 수시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나 때문에 말이 없는 거야?”


“아녜요. 아버지. 김치가 맛있게 잘 익었네요.”


셋째 아들 강현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크나큰 용기를 내어 겨우 한마디 했다.


“니 엄마가 손수 돌아다니며 재료 하나하나 준비해서 직접 한 거다. 다들 먹어봐라.”


백 회장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김치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어쩐지~ 정말 맛있어요. 어머니”


“다음에 김장 담그실 때는 꼭 연락 주세요. 꼭 배웠다가 해먹어야겠어요.”


며느리의 속 보이는 아부성 발언에도 경직된 분위기는 쉽사리 풀어지지 못했다.


“백연물산.”


국을 한술 뜨려다 말고 던진 백 회장의 한마디에 첫째 아들 강인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주가가 많이 떨어지던데, 대책은 있는 거냐?”


강인은 씹고 있던 음식물을 삼키기 위해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아버지의 질문에 답했다.


“이번에 인수하는 상연건설 때문에 그렇습니다. 워낙에 신용등급도 낮고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


“잠깐의 주가하락은 예상했던 부분입니다. 인수 후에 몇몇 부서만 손보고 이미 포섭된 전문가의 투입만으로 충분히 회생 가능한 회사입니다.


이참에 시장에 나온 물량을 사들여서 경영권을 좀 더 다져놓을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봐야 몇 퍼센트나 늘겠냐? 한심하기는... 쯧!”


퉁명스러운 대꾸였지만, 미리 준비한 듯 자연스러운 아들의 대답은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장남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부회장의 지위도 제법 작용했을 것이다.


“이이는... 말 좀 하랬더니 겨우 한다는 게 일 얘기예요? 밥은 좀 편하게 먹게 합시다.”


노부인의 투정에도 상석에 앉은 백 회장은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괜찮아. 엄마. 다 먹었어.”


앞에 놓인 그릇에 적지 않은 양의 음식이 남았음에도 수저를 내려놓은 둘째 하윤이 뚱한 목소리로 던진 말에 백 회장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좀 더 먹어야지. 그거 먹고 어디 기별이나 가겠니? 나 때문에 그래? 응?”


“아녜요. 아빠 식사하시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요.”


“그래? 그럼 아빠가 좀 더 먹을까? 우리 딸 든든하게?”


아들에게는 근엄하게, 딸 앞에서는 한없이 유해지는 전형적인 딸 바보의 모습이었다.


천하의 백 회장이 설령 푼수 같아 보일지라도 대놓고 한심한 눈빛을 보낼 수 있는 건 옆자리의 명예희 여사뿐이리라...


“제가 다 미안하네요. 그냥 식사하세요.”


결국 포기한 듯 한 명 여사의 말을 끝으로 침묵의 식사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차츰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가 비워지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는 백 회장을 시작으로 하나둘 수저를 내려놓았다.


“괜찮았니? 부족한 건 없고?”


“예. 어머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노파심에 강인이 대표격으로 대답하였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뜻을 비췄다.


간간히 들어와 빈 잔에 물을 따르던 가사도우미가 명 여사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탁자에 놓인 식기들을 거둬들인 후 정갈하게 담긴 다과 접시와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모두의 앞에 디저트가 차려지길 기다린 노부인은 가사도우미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 생기면 부를 테니 쉬고 계세요.”


“예. 사모님.”


주변을 정리한 노부인은 앞에 놓인 다과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김 이사가 보낸 한과예요. 유명 장인이 만들었다는데, 많이 달지 않고 괜찮아요. 드셔 보세요.”


“음...”


백회장이 한 조각 들어 맛을 보자, 조용히 차를 마시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넌 공부는 잘 돼가냐?”


굳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행 중 어린 자를 화두에 올리는 것이다.


밝은 성격이며 눈치도 빠른 막내라면 주어진 기회를 적극 활용해 온갖 아양과 재롱으로 분위기를 풀어내는 게 나름의 미덕이련만...


불행히도 백씨 가문의 막내는 눈치는 있었으나 밝은 성격이 되지 못했다.


“예.”


단답형으로 추가 질문을 막아버리는 서윤보다 눈치 없고 한없이 해맑은 아이들 쪽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아이들은 지금부터 이들이 나눌 대화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뿐이다.


“물류 쪽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다. 원인은 파악하고 있는 거냐?”


최대한 시간을 끌어 조용히 넘어가길 원했던 강현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지만, 그에 대한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예. 후발주자인 구니스의 공격적인 마케팅 탓에 시장점유율이 20% 이상 하락한 것이 일차적인 문제고, 전임 경영권자의 방만한 운영 때문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것이 더 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백 회장의 일갈은 강현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았다. 얼굴에 피어난 노기는 두 눈에 모여 강현을 향해 쏟아졌다.


손에 든 찻잔을 던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기에...”


“강현아.”


“예. 어머니.”


흉흉한 백 회장의 눈빛을 마주하던 강현은 어머니의 부름을 받자 고개를 숙였다.


“네가 사장 자리에 오른 지 얼마나 됐지?”


“2년이 조금 안 됩니다.”


손에 있는 찻잔을 사랑스러운 아들 대하듯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노부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단호하고 차가웠다.


“구니스가 사업개시를 공식화한 것은 아직 1년이 안 됐다고 들었는데... 맞니? 사업아이템 발표와 함께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언론에 발표한 건 불과 반년 전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후발주자의 치기 어린 객기였다고 생각했니?”


“···”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현장경력 20년 이상 전문가의 분석이라며, 무리한 사업 추진은 성공하기 어렵다며, 구니스의 실패를 예측했던 자들이 지금 어디서 월급을 받고 있지?


어렵게 모셨다며 걱정 말라던 사장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고개를 푹 숙인 강현의 목덜미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전임 경영권자의 잘못이라고 했니? 네가 말하는 전임 경영권자가 누구였지?”


찰나의 순간에 고개를 들어 백 회장을 바라본 강현은 자신을 쏘아보는 노부인의 눈빛을 마주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 전에. 전임 경영권자를 그 자리에 앉혔던 내게도 책임이 있겠구나. 이 못난 어미도 책임을 져야지. 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무능한 이전 사장을 좀 더 일찍 해임하지 못한 책임자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주요 요직에 자칭 전문가란 사람들만 앉혀놓고 해외로 바삐 다니시는 작금의 사장님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건... 해외의 선진화된 시스템을 공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실무자를 보내지 않고 사장이 몸소 체험하고 학습하려는 자세는 어떤 칭찬도 아깝지 않단다. 그러면, 먼 길 나가서 보고 듣고 배운 걸 회사에 적용한 사례를 들려주겠니?”


“그건... 아직은... 국내실정에 맞게 좀 더 보완해서...”


강현이 해외출장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모를 리 없었다.


측은한 눈빛, 안쓰러워하는 눈빛, 한심하게 보는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모래알처럼 작아진 강현의 자존감은 가을 태풍 앞에 놓인 단풍잎처럼 흔들렸다.


“그럼. 네가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이 못난 어미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니?”


“예! 어머니! 내일이라도 당장...”


숨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줄로 착각한 강현은 젖먹던 힘까지 짜낸 힘찬 목소리에 의지해 흩날리는 자존감을 겨우 붙잡았다.


“생각 잘하고 대답하려무나. 비서진을 시키던, 전문가를 시키던 PT는 금방 만들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려면 우리 강현이가 내용을 모두 숙지하고 있어야 할 텐데, 할 수 있겠니?”


“···”


일주일... 아니, 일 년 열두 달을 준다 해도 강현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백만 년 정도라면 모를까...


“강현아. 이 엄마는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노부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흘러나와 지친 강현을 감싸 안았다.


“우리 아들이 해외에 나가서 흥청망청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단다. 그깟 물류회사? 망하면 어떠니? 우리 강현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회사를 사주면 되지. 무슨 문제겠니?


하지만, 이 엄마는 우리 강현이가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는 건실한 사람이 됐으면 한단다.”


포근하게 전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자리의 모든 이에게 따스함을 선사했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선두에 서서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뛰어난 인물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된다.


우리 강현이는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문제를 남 탓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길 바라는데. 이 어미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거니?”


“아닙니다.”


“그럼, 이 늙은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니?”


조곤조곤 상냥한 말투로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맞은 강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이이가 회사 업무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실수가 잦았어요. 무능한 실무진은 전부 정리하고 제가 좀 더 챙겨서 이이가 실력발휘 할 수 있게 도울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에요. 어머니.”


노부인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진 틈을 노려 강현의 아내가 거들고 나섰다.


“그래. 네가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하마.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예 그럴게요. 어머님.”


길고 길었던 연설이 끝나자, 목이 타는 듯 남은 차를 한숨에 마셔버린 명 여사는 잠자코 있는 백 회장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실 말씀 있어요? 영감?”


“크흠! 강현이는 서둘러서 주변 정리하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너라. 그렇다고 너무 급하게 처리해서 주변에 원한 사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고.”


“예.”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어머니의 빈 잔을 채우는 하윤에게 명 여사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니 아빠 저럴 때가 참 귀엽더라.”


“나두.”


대놓고 속삭였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백 회장은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두 여인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원치 않는 희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 무식? 누구한테 감히! 24.01.07 52 1 11쪽
5 부럽다. 24.01.06 54 3 12쪽
» 귀엽다고? 24.01.05 69 3 12쪽
3 배고프지 않아? 24.01.04 81 2 11쪽
2 살려주세요. 24.01.03 104 3 11쪽
1 백 회장 24.01.02 214 3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