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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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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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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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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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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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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2화 - 도련님

DUMMY

밝은 기색은 간데 없고 느닷없이 저를 다그치는 듯한 단희의 눈빛에 겁에 질린 정화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도, 도련님?”


후지와라 관저는 경성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큰 저택이었으나, 하인들을 제하고는 단 두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한 명은 이 집의 주인이자 가주 (가문의 주인.) 격 되는 후지와라 오사무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양자이자 가문 내 유일한 조선인인 히로유키였다. 아들이 없던 후지와라 가문에서 대를 잇기 위해 조선인 양자를 들였다는 사실은 이미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아, 그 입양된 조선인이라는? 이름이 뭐였더라, 히로시마?”


“바보야, 그건 지역 이름이고! 히로유키 도련님이야.”


“맞다, 히로유키. 헌데 그 사람이 왜? 나이도 나보다 많고, 성인이 되어서야 입양된 건데 조선말을 더 편해하지 않아?”


멋쩍은 듯 웃으며 애꿎은 머리를 매만지는 정화를 바라보는 두 여급의 표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착잡함 뿐이라. 영문도 모른 채 순진무구한 눈을 동글동글 뜨고 있는 정화의 곁에서는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정화야, 조심해. 너 어디 가서 도련님 조선인이라는 말 하면 경을 쳐. 잘못 말했다가 혀 뽑히면 어쩌려고 이래?”


“뭐라고? 혀?”


대경실색하는 정화의 표정에 설이 제 혀는 아직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끌끌 찼다.


“뭘 처음 듣는 것처럼 이래?”


“하지만 정말 처음 들었는걸······.”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를 보고 단희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생각해봐, 조선인 출신이라고 우리한테 잘 해주고 편의를 봐줬으면 어찌 이 높은 자리까지 갔겠어, 제아무리 제국 (일본. 일본 제국을 일컫는 말.) 최고 가문 양자라지만 친자식도 아닌데. 아니,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이 집안 양자로 들어올 수도 없었겠지. 그 손에 죽은 독립군만 해도 한둘이 아니라는 건 이미 유명하잖아?”


“아이······ 설마 그렇다고 진짜 혀를 뽑겠어?”


“선생이 칼 차고 교실에 들어오는 세상인데 말실수한 조선인 혀 뽑는 게 대수겠어? 이제는 아예 왜인이 되어서인지, 여급들이 조선 말 쓰는 것조차 싫어하셔. 당연히 조선 이름 쓴다고 하면 질색을 하시지. 소문에 의하면 왜말로 불렀는데 조선말로 대답했다고 손가락 잘린 이들도 있다지?”


“실수하면 쫓겨나는데, 차라리 그 편이 낫대. 괜한 핑계 댄다 싶으면 어디 하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살아서 못 나간다지 않아? 혀를 뽑으니 물어도 말을 못 하고 말이지.”


조금이라도 입 발린 소리는 못 할 듯 싶은 설조차 같은 이야기를 하자, 정화의 표정이 점차 울상이 되어 갔다. 아득바득 살아보고자 내 발로 걸어들어온 곳이 호랑이 굴이었구나. 이젠 어찌 해야 하는 걸까?


“진짜로? 정말로 실수했다가 그리 된 이들이 많아······?”


“우리도 직접 본 적은 없어. 허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열등감이 강하다는 건 이미 유명하지. 해서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인들과 말도 안 섞어. 해서 오직 눈치만으로 모든 걸 파악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실수를 용납지 않는대. 해서 곁에서 일하다가 못 버티고 쫓겨나다시피 한 이가 더러 있다지. 헌데 아무도 행방을 몰라. 들리는 소문이 그리도 무성한 걸 어찌하겠어?”


“오죽하면 왜놈보다 더 악질이라는 말까지 돌겠어? 조선인이 왜인 혀를 뽑았다면 모를까, 제국 장교가 조선인 하인 혀를 뽑았다는 건 일도 아니지. 너도 오며 가며 보면 알겠지만 늘상 표정이 없는데, 같은 동포들을 고문할 때도 늘 그 표정이라 왜놈들까지도 ‘독사 장교’ 라 부른다더라. 그러니까 정화 너도 괜히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해.”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난 정말 하루하루가 두렵다······.”


“말만 이렇게 하고 얘 말끝마다 도련님 도련님 아주······. 넌 줏대도 없이 도련님의 도 자만 나와도 좋아 죽지?”


설이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단희를 향해 한심하다는 투로 빈정거렸다.


“야, 그게 뭐? 어디 그런 풍채 좋은 이가 흔해?”


“어휴, 인물 좀 더 좋았으면 아주 리노이에상 (이완용의 일본식 이름.) 뺨치는 매국년이 됐겠네. 왜, 아주 나라 한 번 더 팔지?”


“그건 아니야. 인물이 그보다 잘 날 수가 없거든?”


“대체 얼마나 인물이 훤하기에 그리 말해?”


흥미가 조금은 생긴 듯 정화가 조심스레 묻자, 설이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정작 제일 먼저 정화를 겁주기 시작한 단희의 눈빛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양 몽글몽글해져 있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야. 나는 실수도 안 하고 잘 보여서 반드시 도련님한테 시집갈 테야. 그래서 팔자 펼래. 언제까지 여급으로만 살 수는 없잖아? 나도 이런 큰 집에서 사모님으로 살면서,”


“아주 매국을 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구나, 미친년. 왜놈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억울하지는 않고?”


설이 전에 없이 분노한 어투로 쏘아붙으나, 단희는 귓등으로조차 듣지 않았다.


“그게 뭐? 설마 독립운동이라도 하라고? 다른데도 아니고 여기서 걸리면 손가락이랑 혀는 고사하고 남는 곳 없이 숨만 겨우 붙어서 산송장으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기로서니, 그리 할까? 기왕지사 살아남을 거면 잘 먹고 잘 사는 편이 낫지.”


“독립되면 너 같은 년들은 길거리에서 돌 맞아 죽을 거다.”


“뭐야?!”


“왜들 이래, 어차피 둘 다 진짜로 일어날 일 아니잖아.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 변도 안 당할 테니 잠자코 있자. 나 무서워.”


“계집애, 겁도 많긴.”


단희가 입술을 비죽이며 몸을 홱 돌려 다시 쌀을 씻기 시작했다. 쌀을 가는 건지 씻는 건지 모를 정도로 세찬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일인 양 설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정작 눈치를 보는 건 정화 뿐이었다.


“저······ 설아, 나중에 도련님이라는 사람 지나가면 내게 누군지 알려줘. 얼굴 알고 몸이라도 더 사려야겠다.”


“그래, 조심해.”


“헌데 여기 사람들은 다들 독한가보네. 그런 사람을 어찌 버텨······. 난 곧 죽어도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을 테야.”


“그래서 사다코 부인만 올라가시잖아. 뭐 둘이 같이 연해주를 버리고 왔다 했던가······. 그 분 정도로 기가 세지 않으면 원체 감당을 못 하니······.”


여전히 기분이 상하였으나 그래도 둘의 대화가 궁금한지 단희가 계속 정화와 설을 향해 힐끗거렸다. 그러나 저를 두고도 끝없이 이어지는 조잘거림에 심기가 상한 단희가 이내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문 밖으로 홱 나가버렸다. 당황하여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정화를 붙잡은 것은 설이었다.


“어디 가?”


“아니, 그래도 저리 나가는데······.”


“신경쓰지 마, 매번 저래. 방 청소할 때 되면 다시 올 거야.”


“그래도······.”


“괜찮다니까. 너 뭐 잘못했어?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알았어······.”


작게 읊조리는 정화를 보던 설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정화 대신 불 앞에 섰다.


“근데 너 칼질 잘 한다. 대충 써는데도 호박 굵기가 다 똑같네?”


“아······ 그런가. 고마워.”


정화가 머쓱한 표정을 하며 솥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헌데 설이 넌 여기서 일한지 얼마나 되었어?”


“난 곧 있으면 2년 채워.”


“정말? 어쩌다 오게 되었어?”


“나도 돈 벌러 왔지. 함주는 북방이라 논도 없잖아. 그나마 거의 없던 전답마저 왜놈들이 빼앗아가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손 쓸 수도 없는데 별 수 있나. 그나마 국어는 어찌어찌 할 줄 아니까 여기서라도 일자리 구한거지.”


“무슨 일이 있었어?”


“별일이라 할 것까지야. 특별한 사연은 없고, 난 정말 돈 벌러 왔어. 우리 집은 가난하거든. 그래서 우리 오라버니랑 동생 모두 여기로 일하러 왔어.”


“여기? 그럼 다 경성에 있어?”


“응, 둘 다 이 관저에서 일해.”


“정말로? 그럼 둘 다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야?”


“오라버니는 여기 살지는 않고 기사로 일해서 그리 자주 보지는 못해. 숙소는 여급에게만 제공하거든. 해서 근처에 셋방을 얻어서 살고 있는데, 나도 마주치기 힘들더라. 우리 동생은 같은 여급으로 일해서 나랑 한 방 써. 아마 너도 식사 때마다 볼 거야. 원래는 주방에서 일했는데 요즘에는 사다코 부인이 주방 일을 안 시키더라.”


“부럽다. 우리 오라버니도 국어만 잘 했으면 여기 함께 오자 했을텐데······.”


정화가 아쉽고 서글픈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밥상을 차렸다. 괜스레 미안한 심경이 든 설이 정화의 어깨 너머를 슬쩍 기웃거렸다.


“다 했으면 나가자.”


“지금?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뒤를 이어서 다른 여급들이 더 나올 거야. 밥상을 차리고 올리는 것부터는 걔들 몫이니까 우린 청소하러 가면 돼. 우리야 오늘 네가 일찍 당도한다 해서 조금 빨리 일어난 거고.”


“······ 그렇구나.”


정화가 손을 닦은 앞치마를 급히 풀어헤치고 설을 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다시 밟는 복도는 앞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넓다 못해 광활할 정도였다. 시선이 닫는 모든 곳을 둘러보느라 정화는 여념이 없었다. 어두운 색깔의 목재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고, 한없이도 스산했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화야, 여기야.”


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정화가 그제서야 공상에서 벗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설이 앞서 한 말처럼, 방 안에는 단희가 청소에 필요한 것들을 전부 가지고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네가 다 갖고 왔네?”


“어찌 이리 늦게 와? 어서 해.”


어색할 줄로만 알았으나 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단희에게 아는 척을 했고, 단희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화가 먼저 다가가 걸레질을 시작했다. 마루를 훔치는 정화의 곁으로 단희가 천천히 다가왔다.


“야 정화야.”


“응?”


“너 솔직히 안 궁금해?”


“응? 뭐가?”


단희가 눈썹을 까딱하며 밖을 가리켰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뻔하였고 그리 놀랍지도 않았으나, 어찌 이리도 집착하는지 내심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뭐 일하다 보면 한 번은 보게 되겠지. 여기 사시는 분이잖아.”


“기집애, 왜 자꾸 튕겨.”


단희의 한 마디에 정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실로 큰 흥미가 없었음에도 오해를 단단히 한 단희가 자꾸 저를 추궁하는 것에 당황해서였으나, 발갛게 상기된 두 볼을 보고서는 오해가 더더욱 커진 듯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면서 얼굴이 어찌 이리 붉어?”


“그야 네가 자꾸 밑도 끝도 없이 추궁을 하니까,”


“야, 그냥 오늘 밤에 돌아오실 때 밖에서 살짝 엿봐. 이제 여기서 계속 일할텐데 얼굴 한 번 보는게 뭔 대수라고.”


“난 별로 안 궁금한데······.”


“너 혼자 그렇게 조신한 척 하면 내가 뭐가 돼? 잔말 말고 따라와. 너 안 온다 하면 내가 끌고 갈꺼야.”


“아니, 나 이거 다 하고 마루도 닦아야 한단 말이야······. 그 다음에도 할 거 많다면서. 저녁도 지어야 하고,”


“오늘 저녁은 우리가 안 지어도 돼. 이따 저녁 6점부터 네 방 앞에서 딱 1각만 기다릴테니, 그 안에 와. 알았지? 난 변소 좀.”


당황한 정화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단희가 막무가내로 통보하고서는 방을 나가버렸다.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하 참······. 난 실로 안 보고 싶은데······.”


“뭐야, 새삼 궁금해하는 눈치더니만.”


설이 피식 웃으며 힘이 빠진 정화의 어깨를 툭 쳤다.


“아니야, 그런 거! 나 원래 홍조가 심해서 그래. 난 정말 관심 없는데 혼자 자꾸 이상한 오해를 하고서는······.”


“얼굴 보는 게 중요하겠어? 그냥 이참에 조금이라도 노는 거지.”


“그런가······. 헌데 그러다 들키면 어째.”


“안 들키면 되지, 뭐가 문제야? 우리 같은 여급에게 윗 사람들은 하등 관심이 없어.”


“그래도 나까지 빠지면 네가 너무 고생이잖아······.”


정화가 말끝을 흐리며 설의 눈치를 보았으나, 설은 피식 웃으며 정화에게 어깨동무를 하였다.


“앞으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오늘만 가서 좀 놀다 와. 첫날이니, 오늘 일은 내가 너 대신 해 줄게.”


“내가 더 배울 것은 없어?”


애써 속내를 감추고 있었으나 내심 궁금하기라도 했는지 정화가 조심스레 설에게 물었다.


“그래봤자 전부 걸레질인걸. 뭐 이런 것도 다시 알려줘? 마음 쓰지 말고 다녀와. 쟤 또 삐져서 우리가 득 볼 것이 무어가 있어? 난 그런 거 못 하니까 네게 대신 좀 청할게.”


“알았어······.”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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