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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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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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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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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3화 - 후지와라 히로유키

DUMMY

어둑해진 밤하늘에는 어느덧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맥을 끊어놓고자 하고많은 곳을 두고 부러 경성 한복판에 세워진 조선총독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겨울이라 해는 일찍 떨어졌고,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이들이 총독부를 나서기 시작했다. 어느새 입구에는 인력거와 차가 즐비하였고, 수많은 왜인들이 조선인들의 시중을 받들며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총독부에서 유일한 조선인 출신 소위, 아니 금일 막 중위로 승진한 후지와라 히로유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해주 (지금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한인 집성촌.) 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자라난 조선인 고아였으나, 운 좋게도 그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국비로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영특했다. 그의 재능은 아라사를 넘어 일본 제국에까지 유명세를 떨쳤고, 그 덕에 그는 연해주에서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단 1년 만에, 그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 후지와라 가문으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제의를 받았다. 학비는 물론 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져 줄 테니, 군인이 되어 대일본제국을 위해 힘쓰라는 것. 아울러 아들이 없는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가 되어 대를 이어달라는 것. 그렇게 된다면 ‘신한촌 출신 조센징 장교’라는 말이 제 뒤에 달라붙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도 잊지 않았다.

가난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이 제안을 마다할 연유는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입양되었고, 조선의 이름을 버린 채 후지와라 히로유키로 다시 태어났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이들을 단번에 믿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후지와라 가문은 약속대로 학업을 지원해준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을 정식으로 [족보]에 올려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군인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그는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대일본제국의 최연소 장교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그 어떤 조선인보다도 일본에 충성하게 되었다. 제법 늦게 일본인으로 귀화하였고 쭉 조선 본토에서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투만 들으면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조선인 출신이리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인생의 9할을 조선어를 쓰며 살았으니 조선어가 더 편한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그 누구도 그가 조선어를 사용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 장교가 되어 여러 군사 작전에 투입된 것은 물론, 그는 그 어떠한 장교보다도 많은 독립군을 체포하였고, 그들에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얻어내었다. 그가 금일 중위로 승진한 데에도 그 공이 가장 컸을 정도로. 독립군들 사이에서는 가장 악명이 높은 장교인데다, 저와 같은 민족의 목숨을 끊고 잔혹하게 고문하는 와중에도 그 차가운 얼굴빛과 무미건조한 어투에는 일절 변화가 없어 여타 일본인 장교들조차 그가 독하다며 혀를 내두르고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그를, 총독부의 다른 이들은 ‘독사 장교’ 라 불렀다.


* “히로유키 중위!” (* 표시: 일본어.)


막 차에 오르려던 차,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히로유키는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 “쿠사카베 중좌님.”


히로유키의 묵직한 경례를 받은 이는 그의 상관인 쿠사카베 쿄헤이 중좌였다.


* “정말 축하하네, 내가 벌써 자네를 중위라 부르게 되다니······. 도리어 내가 하늘을 나는 것 같군 그래.”


* “감사합니다.”


* “헌데, 설마 오늘 같은 날에 한 잔 하지도 않고 집에 가나? 듣자 하니 자네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가 열린다더군그래.”


* “저는 크게 흥미가 없어서 말입니다. 함께 승진한 다른 이들은 가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 “나랑 한 잔 하는 것조차 흥미가 없으려나?”


쿠사카베가 히로유키의 어깨를 툭 치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입가에 띤 묘한 웃음은 단순히 즐거움도, 경고나 압박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히로유키가 다시 자세를 고쳐잡았다.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그래, 그럼 내가 한 잔 살 테니 따라오게. 자네에게만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이끌리듯 따라온 곳은 유곽이었다. 다른 이들과의 교류를 즐기지 않는 히로유키가 올 일이 없는, 낮보다 밤에 더 붉게 빛나는 곳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듯 높으나 텅 비어 껍데기만 남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광경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을 때 즈음, 히로유키는 어느새 가장 큰 방 한 가운데에 앉아서 쿠사카베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 “자네 여기 와 본 적 있나?”


* “아니요, 처음입니다.”


* “하하하, 자네 나이가 몇이었지?”


* “스물넷입니다.”


* “그렇게 젊었다고? 허허, 하긴 자네 학교도 일찍 들어간데다 승진이 좀 빨랐는가? 그럴 만도 하군.”


쿠사카베가 껄껄 웃으며 히로유키의 잔을 채웠다. 짠,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술을 들이켰다.


* “지난 날에는 치열한 경쟁을 하느라 즐길 것도 다 즐기지 못했겠지. 허나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자네는 그 나이에 벌써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으니 좀 놀고 그러게나. 대일본제국 사내들 중에 여기 안 와 본 이는 자네 뿐일세.”


* “그렇습니까.”


* “그럼, 안주도 훌륭하고 가게도 조용하고······. 아, 무엇보다 이 조센징 게이샤 (일본에서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진 화류계 여성.) 가 따르는 술이 아주 일품이야.”


밖에서 말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쿠사카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게이샤 서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했으나, 이제 스물을 넘긴 사람이 저 중 한 명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같이 앳된 얼굴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인 듯, 아니면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 “어이! 너희 중에 조센징이 누구냐?”


아무도 손을 들려 하지 않았다. 조선인이 누구인지 표정만 보아서 가려내는 건 일도 아니었고 이미 알고 있는 듯 하였으나, 쿠사카베는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숨결이 조금이라도 느껴질 때마다, 기모노를 입은 세 조선인이 몸을 떨었다.


* “하하하, 결국 아무도 말을 안 하는구나!”


쿠사카베가 큰 소리로 웃으며 허리를 젖히는 동안, 히로유키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어줍잖은 협박 놀이조차 금세 재미를 잃었는지, 쿠사카베가 척 봐도 키조차 다 자라지 않은 가장 어린 아이의 손목을 낚아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 “너, 이름이 뭐냐?”


* “하, 하나코······”


* “몇 살이냐?”


* “여, 열넷, 입니다······.”


* “그래, 이리 와 봐라! 나이가 어리니 아직 경험이 없겠지? 넌 내가 특별히 용서해줄테니, 오늘 어디 한 번 제대로 배워보거라.”


짐승의 더러운 손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옷깃에 닿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두 손과 감출 줄 모르는 웃음이야말로 금수 그 자체였고, 이 모든 과정이 어찌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한 하나코가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사, 살려주세요 나으리······”


* “왜 우느냐, 응? 내가 설마 너처럼 어여쁜 년을 죽이겠느냐? 겁먹지 마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가여운 아이는 행여 그것이 제 숨통을 끊어놓을까 그만 제 입을 제 손으로 막고 말았다. 어떻게든 단단히 틀어막은 입술 틈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소리가 가슴을 찢어발겼다.


* “······ 중좌님.”


오비지메 (기모노의 허리 부분에 매는 끈.) 가 끌러지기 직전, 여지껏 표정 변화 한 없이 말을 아끼던 히로유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쿠사카베가 손짓을 멈추었다.


* “응, 무엇인가?”


* “제게 은밀히 하실 말씀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듣는 귀가 있으면 곤란해지니 우선은 물리시지요.”


* “하하, 하하하하!”


분위기가 험악해질 줄로만 알았으나, 의외로 돌아온 것은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 “그래 그래, 자네 말이 맞지.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네. 전부 나가 보거라.”


쿠사카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게이샤들이 급히 자리를 비웠고, 하나코 역시 옷을 부여잡은 채 도망치듯이 방을 뛰쳐나갔다.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면서 저 멀리에서 비명인 듯 울음인 듯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 하였다.


* “일을 방해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제게 하시려던 말씀이 너무도 궁금하여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말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사과를 구하는 히로유키에게, 쿠사카베는 웃으며 잔을 들라는 몸짓을 취하였다. 조용한 방 속, 술이 흐르는 소리가 무서우리만치 뚜렷이 들려왔다.


* “거두절미하고 묻지. 자네, 조금 색다른 일 해볼 생각 없나?”


술잔을 입에 갖다대던 히로유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마치 독사같았다.


* “근자에 들어 대일본제국이 북쪽의 반동 세력을 특히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해서 아라사 (러시아) 쪽으로 군비를 확장할 예정이야. 우리의 세력을 넓히는 것은 물론,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조센징들까지 견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 “연해주 일대에 사는 조선인들이라면······.”


* “그래, 자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지.”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애써 무심한 척 흘려보내는 사케의 목넘김 한 오라기마저 선연히 느껴질 정도로. 목구멍 중간에 무언가가 걸려 얹힌 듯한 기분을 뒤로하고, 아주 잠시 동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다시 마주한 것은, 이전처럼 저를 아끼던 눈이 아닌 확연한 의심. 그 누구보다 나를 아끼는 이이지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버릴 만한 존재. 저 자는 필경, 내 출신을 두고 의심하고 있다. 조선인, 그것도 신한촌 출신인 제국의 군인이라니. 이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존재인가? 또한 당최 어찌 믿을 만한 존재인가? 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가 기본은 되는 이인지 알아보기에는 더없이 확실한 시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 “조센징들이 몰려사는 곳이니 필경 그 쪽에서는 일을 꾸미고 있을 거고, 그렇다면 적어도 한 명 즈음은 경성까지 내려보낼 테야. 경성 바닥에 경찰들을 쫙 깔아두었으니, 자네는 연해주 쪽 반동 세력을 잘 단속하고 있다가 관련자가 체포되면 그쪽에 가서 조사를 함께 진행하게. 아, 연해주까지는 자네가 직접 갈 필요가 없고 그저 조사를 진두지휘해주게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쿠사카베가 술을 한 잔 더 들이키며 말하였다. 묘하게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본 히로유키가 가만히 생각하는 듯, 골몰하는 표정을 띄웠다.


* “필경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있는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 “역시 자네는 내가 어찌 말해도 잘 알아듣는군그래! 좋아, 정확히 그 뜻이네.”


쿠사카베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히로유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 이미 빈 두 잔의 술잔을 다시 한가득 채웠다.


* “자네가 비록 조선인 핏줄이기로서니,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가 아닌가? 아마 일본인이라면 자네 성씨만 들어도 절대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네. 허니 마음 놓고 자네가 원하는 대로 수사하게나. 내 어떠한 제약도 주지 않음세.”


엎드려 감사 인사를 표할 법한 제안에도 히로유키는 말이 없었다. 다만 술잔을 조용히 비울 뿐이었다.


* “어찌 할텐가? 그래도 가족같은 이들이 다수 있는 곳일 텐데······. 정 마음이 쓰이면 다른 이에게 권해보지. 자네의 출신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건네는 말이니 너무 마음 쓰지는 말게나.”


은근슬쩍 히로유키의 반응을 살피며 쿠사카베가 두 개의 빈 술잔을 채웠다. 입꼬리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적막이 흘렀다.*


* “······ 제가 진정 그들을 가족으로 여겼더라면, 제국의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히로유키가 쐐기를 박았다. 훨씬 짙어진 눈빛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 “하하하하하! 과연 독사 장교 후지와라 히로유키야. [경부 어른] 께서 자네를 양자로 들인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군그래!”


맑은 소리와 함께, 부딪히며 흘러넘친 술이 식탁 위에 고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우물 속에 작지만 분명하게, 너무도 다른 표정을 한 두 사내가 비쳤다.


* “그 어떤 일본 관료도 자네만큼 조선어에 능통하지 않고, 또한 자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아라사 말도 능히 하지 않는가? 이번 일의 작전을 파악하는 것은 아마 일도 아니겠지.”


*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 “그래 그래, 자네의 공을 높이 사 내 위쪽에는 말을 잘 해 놓음세. 아마 별일이 없는 한, 대위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못해도 1년 안으로 한 번 더 진급하겠지.”


* “깊이 감사드립니다.”


* “좋아, 한 잔 더 마시자고! 하하하!”


술잔이 다시 한 번 맑은 소리를 울렸다. 히로유키가 자세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세 번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제법 독한 술이었으나, 쓴 맛을 느끼지도 않는지 그의 차가운 표정 속에 담긴 뜻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 표시가 붙은 대사는 일본어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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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화 - 후지와라 관저 +2 24.05.10 67 4 15쪽
1 序詩 - 그 날, 연해주 +2 24.05.10 144 5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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