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85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5.10 12:12
조회
143
추천
5
글자
4쪽

序詩 - 그 날, 연해주

DUMMY

1920년 4월 6일


귀 속을 후벼파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낙엽처럼 스러진다. 한밤중이었으나 하늘은 민가와 숲 속에 질러진 불로 이미 핏빛으로 물들었다. 불은 죽은 이와 사는 이를 가리지 않고 매섭게 타올랐다. 개중 이미 불 속에 던져진 이들 중에는 필경 숨이 덜 끊어진 이도 있으리라. 나무가 우거진 숲속은 선혈로 검게 변색되었고, 사람의 팔다리가 이 곳 저 곳에 걸려 휘늘어졌다. 곧이어 죽기 살기로 도망친 아이 하나가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일어나려 발버둥치다 외마디 총성에 바닥에 고개를 박고 말았다. 네 살은 되었을까 싶은 아이의 시체를 무참히 밟고 터넘어가는 황토색 군복. 그 왼쪽 가슴팍에는 지독하게도 붉은 원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수도없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일본군이 총을 들어올려 방아쇠를 당기자, 저 앞에서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던 사람 하나가 몸을 비틀며 쓰러졌다. 저 멀리서 더 거세게 솟아오른 불길이 새벽녘의 잔혹한 여명인지, 조선인들을 불태우는 화염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가는 이 곳 신한촌은 놀랍게도 조선의 땅도, 일본의 땅도 아니었다.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지기 직전, 죽음의 소리가 울부짖으며 붉은 허공을 가득 메우는 모습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탕,

탕,

탕.

붉은 빛으로 짙어진 허공에 세 발의 총성이 울린다. 곧이어 검은 코트에 중절모를 쓴 여인이 쓰러지고, 그를 향해 일본군 장교가 성큼성큼 다가간다.


*“결국 쓰러지는군.”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오늘 이 곳에서 살아남는 조센징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년은 살려둬야지. 명색이 현상금까지 붙어 있는데, 캐낼 것이 얼마나 많겠어?”


*“맞네, 백운도 죽은 마당에 이 년까지 죽게 둘 수야 없지.”


천박하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는 역겹고도 거만한지라. 제 땅도 아닌 곳에 발을 들여놓고 총칼은 만져본 적도 없는 이들을 쏘아죽인 채 같잖은 승리감을 맛보느라, 여인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는 것을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였다. 아직 분명히 굼질거리는 오른손은 천천히 왼쪽 가슴팍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모습도 꽤나 볼만 하니, 우선 살려두자고. 혹시 알아, 이 모습을 침대에서 또 볼지? 하하하!”


세 장교의 시선이 동시에 벗어나는 눈 깜짝할 찰나, 여인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던졌다. 크학,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장교 둘이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짧은 혼란을 틈타, 여인은 손에 묶어둔 총을 남은 한 명을 향해 겨누었다.


탕-


남은 한 명까지 가볍게 저격한 여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총과 손을 묶어 두었던 천의 매듭을 푸는 순간, 뒤통수에 무언가가 닿았다. 애써 보지 않아도 단박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젠장, 허탈한 숨과 함께 나직히 끓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여인은 천천히 총을 내리고 뒤를 돌아섰다.


*“이제는 전부 소용없다, 당장 항복해!”


“백운이 죽었다 했나. 죽이는 것보다야 살리는 것이 이로운 이일텐데, 멍청하게도 실수를 했나 보군.”


건조한 어투였으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짙은 분노가 온 몸을 휘감았고, 노기가 천지를 진동하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총을 내려놓아라! 순순히 내려놓는다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그게 아니지. 당초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지 않았느냐.”


허망한 한숨이 섞인 말을 읊조린 여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날이 선 눈빛에 걸맞지 않게 입꼬리가 그린 능선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다음 찰나, 여인의 팔이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총구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제 관자놀이였다.




“대한 독립 만세.”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첫 화는 프롤로그라 1화와 같은 날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차후 연재부터는 한 화씩 차례대로 업로드할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대사 앞에 * 표시가 붙은 것은 일본어입니다. 혼선을 방지하기 위함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빛 안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수정 사항 공지드립니다 24.07.11 19 0 -
공지 공모전 이후 연재 공지 24.06.10 35 0 -
공지 6/6 이후 연재 공지 24.05.31 26 0 -
59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24.09.17 5 0 11쪽
58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6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9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8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10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1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3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4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3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5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2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5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5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7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8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3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8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2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9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8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