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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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모아
작품등록일 :
2024.07.12 16:13
최근연재일 :
2024.08.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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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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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진영 이야기 - 한밤중 불청객

DUMMY

이렇게 오랫동안 화해를 못 하고 냉전 상태인 건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라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서로 갈피를 못 잡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



남편은 지금 양보하면 결국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 믿는 듯하다.



나는 그냥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다.



연애도 내가 먼저 하자고 했고, 결혼도 내가 먼저 하자고 했고, 아이들도 내가 먼저 갖자고 했고. 특히 나만 그를 붙들고 사는 느낌이 드는 요즘은 사소한 다툼에서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배우자와의 불화는 굉장한 스트레스로 뭘 해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이 없었다.



술이 필요하다.



시내에 크리스마스 마켓(marché de noël)이 섰다기에 파비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나의 부름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옅은 카키색 점퍼에 빨간 털모자를 쓴 파비엔이 자전거를 끌고 집에서 나오고 있다. 지은 지 백 년가량 된 3층짜리 저택이다.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에는 작은 구두 상자가 비스듬히 꽂혀 있다. 큰 키의 파비엔이 금발을 휘날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환히 웃으며 다가온다.



“이 상자는 뭐야?”



“로즈가 신을 구두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는데 사이즈가 안 맞아. 센터 가는 길에 매장에 잠시 들러도 될까?”



그녀가 앞장서 들어간 매장은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파는 프랑스 인기 브랜드로 물건값이 꽤 비싼 곳이다.



감색 계열의 카디건과 회색 주름치마, 꽃무늬 블라우스··· 나는 언제쯤 여기에서 옷과 신발을 살 수 있을까···



신발을 바꾸고 매장을 나와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 곳으로 발을 옮겼다.



파비엔이 영어로 더듬더듬 지난번에 만들어준 생강청이 맛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휘바흐브(Rhubarbe, 대황) 파이도 맛있었다고, 시간이 될 때 만드는 법을 알려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럼. 얼마든지. 이번에는 설탕 넣는 걸 까먹지 말아야지.”



예전에 함께 레몬 파이를 만들 때 설탕을 안 넣은 일을 떠올리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너한테 싸주고 남은 조각을 먹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쓰고 시고... 너 그거 먹었어?”



“그럼. 꿀 얹어 먹었지. 아주 맛있었어. 설탕을 안 넣은 게 오히려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너 정말 불어가 많이 늘었구나? 근데 왜 나는 영어가 안 느는 거지?”



“간절함의 차이겠지. 난 생존이 달렸잖아.”



나와 파비엔은 언어 교환을 목적으로 만나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나의 영어가 완벽한 줄 안다. 어릴 적 캐나다에서 4년간 산 덕에 발음이 좋기 때문인데 사실 발음이 좋을 뿐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도 덮어놓고 신뢰해 주니 이렇게 언어 교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방쇼(vin chaud)를 들고 두 평 남짓 되는 통나무 스탠드가 줄지어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산책했다.



햄, 말린 과일과 젤리, 장신구, 비누, 각종 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맛보고 궁금해했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적어 보였다.



이 추운 날, 원래 장사하던 가게를 두고 길 위의 간이 스탠드로 나온 이유가 무얼까? 꽤 비싼 자릿세를 내고 참가한다고 들었는데. 그만큼 이익이 남긴 할까? 가게에서도 별수 없으니 여기로 왔겠지···



지점토로 만든 장신구를 파는 스탠드에는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주인의 얼굴 위로 남편의 얼굴이 스친다.



“추운데 이제 돌아갈까?”



겨울바람에 얼굴이 파리해진 파비엔이 발길을 돌렸다.



12월 1일, 이미 한겨울 날씨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 건너 구릿빛 피부의 남자를 보고 발걸음이 멈추었다.



2주 전까지 우리 윗집에 살다가 뚤루즈(Toulouse, 프랑스 지명)로 이사 간 듀끌로 씨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던 프랑스 이주 초반,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올라오라고 말해 준 고마운 사람이다.



출장이 무척 잦은 그는 집에 있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도움이 필요한- 예를 들어 집 천장이나 개수대에서 물이 새 거나, 단수가 되거나, 현관문이 고장 나거나 난방이 멈춘- 날마다 집에 있었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불어를 못 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보다는 윗집으로 뛰어갔고, 그는 우리 아파트의 소유주인 시립 부동산에 대신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윗집에서 이삿짐이 나오는 날, 그의 큰딸이 뚤루즈로 이사를 간다고, 이렇게 가기는 싫다며 울기에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툭하면 여기저기 고장 나는 이 집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이제 어디로 뛰어가야 하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외국인인 내가, 그것도 불어 발음이 시원찮은 동양 여자가 해결하기 힘든 일은 여전히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는데 듀끌로 씨는 어느새 인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멀리 이사 갔다며?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겠지.”



그렇게 닮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파비엔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 사라져버린 듀끌로 씨의 뒤를 쫓아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사하는 날 듀끌로 씨에게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했고, 감사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방금까지 언뜻언뜻 보이던 듀끌로 씨의 검은 곱슬머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파비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헛것을 본 것이다. 이 황량한 도시에서 내게 도움을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신기루였을 것이다.






듀끌로 씨의 허상을 본 후 왠지 윗집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해가 떠 있을 때는 전혀 인기척이 없다가 새벽녘만 되면 발소리라든지 물건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소음은 항상 있었지만, 옆 라인에서 나는 소리가 윗집을 통해 들리는 거로 생각했지 비어있는 윗집에서 나는 소리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온 날 이후, 옆 라인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소리는 분명 우리 거실 천장 위에서 나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5층짜리 아파트 세 채가 디귿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우리 집은 이 디귿자의 기둥 부분에 속하는 아파트 건물에 별채처럼 붙어 있다.



말하자면 건물을 다 지은 후 남은 땅을 활용하려 뒤늦게 덧붙여 지은 것처럼 5층 높이의 큰 본채 건물의 양옆으로 2층짜리 구조물이 덜 자란 날개처럼 삐죽 나와 있는 형태인데, 그중 오른쪽 날개의 1층이 우리 집이고, 2층이 듀끌로 씨의 집이다. 그러니까 오른쪽 별채 라인에는 우리와 듀끌로 씨, 단 두 가정만 살고 있는 것이다.



빈집에서 나는 소음은 윗집에 올라가 확인해 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도저히 올라갈 마음이 안 생긴다. 왠지 모르게 두렵다. 얼마 전까지 필요할 때마다 주저 없이 뛰어 올라가던 곳이었는데.



욕실을 염탐하는 누군가 때문에 곤두선 내 신경은 고요한 새벽에 들리는 간헐적인 소음으로 더욱 예민해졌고,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기이하게 조합하여 끊임없이 자극적인 상상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자면, 윗집 사람들이 비상용으로 숨겨둔 열쇠를 어떤 부랑자가 발견해서 밤에 몰래 들어가 자는 건 아닐까, 그러다 우리 집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면 잠시 나와 훔쳐보는 게 아닐까 하는 등의 상상. 이 레지던스 주변으로 떠돌이 이민자들의 텐트가 줄지어 있고, 얼마 전에는 부랑자 한 명이 우리 테라스 앞에 침낭을 깔고 자고 있었으니 무리한 상상이 아니었다.



이럴 때 남편과 상의라도 한다면 날뛰는 불안감이 좀 사그라들겠지만,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냉전 중이다.



낮에 밖으로 나가 윗집 창 안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창에 볼레(Volet)가 내려져 있었고, 볼레가 열려 있는 곳은 짐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빈집이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자정 너머에도 밖으로 나가 윗집을 살펴보았다. 인기척이 없었지만, 몸을 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혹시 누군가 우리 건물로 들어가진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오늘도 역시 불빛 한 점 없고 인기척도 없다.



갑자기 뒤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아파트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누가 뒤따라오는 것만 같다.



입구 안에서 조심히 밖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집 현관으로 발을 옮겼다.



쿵!



위층에서 들려 오는 소리.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쿵. 쿵. 드르륵.



소리는 분명 윗집 현관문 뒤에서 나고 있다.



뇌에서는 당장 집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발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용기 내어 굳이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공포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내 인생의 모든 위기는 필요 없는 호기심이 이성을 점령했을 때마다 찾아왔었고, 어쩌면 지금 그 정점을 찍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층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윗집 현관 앞에서 한동안 귀를 기울여 안쪽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포기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다시 무엇인가 끌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현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왔고, 윗집 현관문이 벌컥 열리기 직전, 나선 계단 아래에 가까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음에도 빛은 한 조각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빼고 위쪽을 올려다보았을 때, 딱딱한 물체가 굴러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하얀 공 같은 것이 순식간에 계단으로 훅 내려와 아파트 입구 유리문 앞에 멈췄다. 윗집에서 기르던 하얀 고양이였다.



흰둥이 목에는 손잡이가 나무로 된 줄넘기가 타이트하게 묶여 있었고, 반대쪽 손잡이는 계단 한중간에 멈췄는지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한 칸씩 끌려 내려오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무 손잡이가 내는 소음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굳게 닫힌 아파트 입구 유리문을 긁다가 계단참 구석에 숨어있는 내 옆으로 왔다. 이 고양이가 여기 있는 한 나도 들킬 게 뻔하다.



대체 빈 윗집에서 누가 나온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 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억 속에 묻어 둔 일이 떠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어있는 나를 찾으러 다가오는 발소리··· 곧 그 발아래 짓밟히겠지···



나는 최대한 몸을 조그맣게 웅크려 구석 안으로 더 깊숙이 쑤셔 박았다.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온몸을 울렸다. 애원하듯 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숨어 있었잖니. 제발 가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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