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회귀 게임 속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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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작품등록일 :
2024.07.20 15:35
최근연재일 :
2024.08.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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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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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3)

DUMMY

“피를······ 판다고? 흡혈귀인 나에게? 인간인 자네가?”


로베르토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야말로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그러면 믿게 만들어야겠지?


“엘릭, 엘레나.”


나는 두 경호원 남매의 이름을 부르면서 옆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모습 드러낼 필요 없어. 둘 중 아무나 단검 한 자루만 줘봐. 독 안 바른 걸로.”


잠시 후, 오른손에 놓인 단검을 움켜쥐고서 망설임 없이 왼팔에 대고 슥 그었다.


오, 힘을 별로 안 줬는데도 잘 베이네?

평소에 무기 손질을 착실히 해놨구나.


그런데 생살에 냅다 단검을 그어버리니 아프긴 하다.

이전 생까지는 고통 경감 스킬을 항시 활성화시켜놓던 습관 때문에 망설임없이 자해 해버린 것 같다.


“저, 전하!”

“무, 무슨 짓입니까?”

“이 정도로 안 죽으니 호들갑 그만 떨어.”


나는 화들짝 놀란 남매를 물러나게 한 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왼팔을 살짝 들어올렸다.


“우선 제 피로 시음해보시죠.”


난 로베르토가 들고 있는 커피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로베르토 역시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피 아까우니까 빨리요.”

“아, 알았네!”


로베르토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양손을 모으더니, 손바닥으로 피를 받아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내 피를 혀로 핥은 바로 그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짙은 진홍색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피가······.”

“어때요?”

“······이렇게나 감미로울 줄이야.”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 음?”


아니, 다행이 아니잖아?

내 피가 달다고? 나 벌써 당뇨 온 건가?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고, 식단도 나름 조절했는데?


에이, 아니겠지.

흡혈귀야 워낙 감각이 예민하니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들 잘 봤지? 피 준다고 흡혈귀 되는 거 아니라고. 흡혈귀가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니고.”


이제 이 사실을 두 남매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증명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증명해야 하는 건 따로 있다.


“자, 제 피도 한 모금 마셨으니 힘 한 번 써보는 건 어때요?”

“힘 말인가?”

“그쪽이 얼마나 강한지 밖의 인간들에게 제대로 체험시켜 주자고요. 제가 왜 대화부터 시작했는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



이야기를 끝낸 내가 로베르토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온 순간.


흡혈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진한 핏빛의 안개가 그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붉게 물들자 동굴 입구에 모여있던 주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른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다들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무슨 일이 있을지 미리 귀띔해준 피터슨과 기사들마저 덩달아 도망치려는 걸 난 말없이 노려보면서 멈춰 세웠다.


가관이었던 건, 로베르토가 흡혈귀로서의 진정한 힘을 제대로 선보이기도 전에 가장 앞장서서 도망쳤던 놈이 바로 그 사제였다는 거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거면서 쥐고 있던 은대못을 멀리 내팽개치고서.


나는 엉덩방아를 찧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촌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차피 빨릴 피, 돈을 받고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쪽이 낫지 않냐면서.


로베르토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던 촌장이 보는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왼팔에 상처를 내서 흡혈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태연하게 팔에 붕대를 감는 나와 반대로, 촌장은 잔뜩 겁에 질린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번 생에서 로베르토와의 관계는 이전까지의 생과 확실히 다르게 흘러갈 거라는 예감이 든다.

아니,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귀찮은 일이 더 없이, 적당한 선에서 말이다.



*



“피터슨, 그 마을에 별일 없지?”

“네, 추가로 들어온 보고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앞으로는 내가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그 마을 관련해서는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해. 상대가 상대인만큼, 계속 신경 써야 하니까. 괜히 질 나쁜 피 팔았다간 이쪽에서 피를 보는 수가 있으니 매혈 대상자들 건강 체크하는 것도 잊지 말고.”


로베르토의 등장 이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흡혈귀의 등장이라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사건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정기적으로 그에게 인간의 피를 파는 것으로 말이다.

매혈은 한국에서 법으로 금지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 문제없다.


“혹시 그 마을로 전입오려는 사람 있으면 미리 통보해놔. 기존 주민 아니면 매혈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로베르토에게 피를 파는 곳은 그가 등장했던 마을 한정으로 제한했다.


흡혈귀가 피를 구하려고 이 마을 저 마을 중구난방으로 나타나면 그날 벌어졌던 소동이 반복해서 일어날 게 분명하니까.

애초에 로베르토가 그 마을에 나타난 이유부터가 고인이 된 부인의 고향이라는 이유였으니, 굳이 그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 건수를 주면 안 된다.


“그리고 채혈하기 전에 반드시 씻으라는 캠페인, 계속 진행 중이지?”

“네, 전하.”

“이 세상 인간들은 위생 관념이 너무 부족해서 탈이라니깐.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해도 부족할 거야.”


21세기 한국에서 헌혈할 때 쓰이는 의료장비가 이 세상에 있을 리 만무.


그래서 팔을 깨끗이 씻은 뒤 상처를 내서 엄지만한 작은 유리병에 담아, 2주에 한 번씩 채혈해 로베르토에게 넘겼다.

비록 적은 양이긴 해도 30명 정도의 주민들이 참여한 결과, 로베르토의 흡혈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기는커녕 넘쳐날 정도였다.

흡혈귀가 실제로 흡혈하는 양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임의 설정 덕분이기도 하고.


이에 로베르토는 매혈자들에게 거액을 지불하려고 했지만, 내가 말렸다.

너무 후하게 값을 쳐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을에서 피를 팔려는 사람들이 적어질 거고, 그 외 잡다한 문제가 발생할 걸 우려해서 적절한 금액을 제시했다.

한국으로 치면, 100만원 정도의 성과급이 매달 추가로 들어오는 정도?


“지정된 인원 외에도 매혈을 희망하는 자들의 민원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다 거부해. 내가 하지 말라는 말을 제때 들었어야지.”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선동에 휘말린 놈들에게까지 혜택을 줄 수는 없는 법.


그날 마을에 있었던 주민들 중에 사제의 선동에 휘말렸던 놈들은 매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벌벌 떤 주민들을 오히려 칭찬해야 한다.

내 명령을 잘 따르기도 했거니와, 능력이 안 되는 걸 깨닫고 최선의 길을 택한 거니까.


“그러고 보니 교단 측에서는 아직도 별말 없어?”

“네, 새 사제를 파견할 거라는 연락 이후에는 없습니다.”


참고로 로베르토를 불태우자며 선동했던 사제는 감옥에 가뒀다.


왕국 전체는 아니어도 영지를 피바다로 만들 뻔한 위기를 초래한 놈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단지 선동하고 도망친 것만으로는 교단 소속이 아닌 내가 그를 처벌하기엔 힘들었다.


그래서 혹시나하는 생각에 그 사제를 각 잡고 털어보니, 제법 해쳐드셨더라.

교단 상층부로 보내야 하는 헌금을 상당량 횡령했고, 그중에는 내 이름으로 매달 보내는 돈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망설임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조용한 게 심상치 않긴 해. 뭐, 흡혈귀가 나타난 이상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그 사제놈을 교단에 인계도 해야하고.”


예전 같았으면 로베르토에 맞선 사람들과 교단의 성직자들을 내가 구해내는 스토리로 전개됐을 것이다.

그리고 난 교단 측의 호감을 얻어 나름 짭짤한 보상을 받고, 교단 소속의 실력 있는 동료가 들어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겠지.


하지만 그깟 물질적인 보상, 이번 생에는 필요 없다.

대신 내 심기를 건드린 사제를 가두어서 정신적인 보상을 스스로 챙겨야겠다.


“전하는 참 신기한 분 같습니다. 흡혈귀에게 피를 판다는 발상을 떠올리시다니······ 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가?”


사실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해서 충돌 자체를 피한다는 발상 자체를 안 떠올려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교단 측의 눈치를 보느라 로베르토를 무조건 쫓아내거나 죽인다는 선택지만을 강요받던 예전 생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편하게 살자고 마음먹으면서 많은 걸 포기하고 나니 선택지가 넓어진 덕분에 가능해진 결단이었다.


“나도 그렇다네.”


헉, 뭐야?


저 인간, 아니······ 저 흡혈귀 언제 왔어?

이전 생의 나였다면 미리 감지했겠지만, 지금은 로베르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수밖에 없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마나 감지 스킬을 항상 활성화시켜놔야 하나?


“엘레나, 가만히 있어.”


정기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운 엘릭 대신, 혼자서 경호 중인 엘레나에게 나는 손짓으로 물러서게했다.


저 흡혈귀, S등급 캐릭터라니까?


너 같은 애들은 절대 못 이기니까 괜히 날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왕가의 장남을 예고도 없이 방문한 게 괘씸하게 느껴지겠지만, 그 괘씸한 것도 상대적이야.

로베르토 정도의 실력이면 나름 예의 바른 방문이 된다고.

오히려 불청객의 침입을 미리 감지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받아야 한다고.

등급 차이가 워낙 커서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그냥 넘어가지만 말이다.


“앨버트 왕자,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되어서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이전까지 알고 있는 로베르토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엘레나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저 애, 설마 내 체면 살려주려고 일부러 적의를 드러냈던 건가? 로베르토가 경우를 모르지는 않다는 걸 파악하고서?

나야 크게 상관 안 하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상대가 진짜 경우 없이 나오면 나도 경우 없이 대응할 능력은 되는데 말이야.


“뭐, 괜찮아요. 좀 놀라긴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만나는 편이 더 낫겠네요. 절차대로 했다간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닐테니까.”


나야 익숙하지만, 로베르토는 엄연히 흡혈귀다.

그런 그가 성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면 경비병은 물론이고 도중에 만나는 시민들을 포함해, 저택에 있는 하녀들까지 기절초풍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것과 미리 선약까지 잡아놓고 만나는 것과의 차이는 크다.


난 남들에게 로베르토와 친밀한 사이로 비춰지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흡혈귀 로베르토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피를 제공하는 선택지를 고른, 평화를 사랑하는 영주 포지션이어야 한다,


“여기 있습니다.”


피터슨이 잽싸게 갓 타온 커피를 로베르트 앞에 내놓았다.


“전하, 여기 있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잘 소독했지?”

“네, 물론입니다.”


나는 피터슨이 가져온 물수건으로 왼손을 깨끗하게 닦은 후, 가느다란 나이프로 약지 끝에 작은 상처를 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로베르토를 슬쩍 쳐다봤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충분하네. 그러면······.”


로베르토는 커피잔을 들어올리더니 코로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커피 광고에 나온 모델처럼.


“역시 자네의 피는 달라. 다른 인간들의 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미로움이 날 사로잡아.”


이런 식으로 로베르토가 내 집무실에 직접 와서 내 피를 판 커피를 마시는 게 벌써 세 번째.

그와 대면하는 게 껄끄럽긴 한데, 그냥 헌혈한다는 셈 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아니, 헌혈치고는 또 양이 너무 적은데.


그래, 당체크 하는 셈 치자.

매번 감미롭다는 평을 남길 때마다 내 건강은 과연 괜찮은가 의심하게 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커피에 탄 설탕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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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2) +1 24.07.22 141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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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2) 24.07.20 165 12 13쪽
2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1) 24.07.20 181 13 14쪽
1 프롤로그 24.07.20 197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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