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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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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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2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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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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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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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큐브 속으로 들어가다_1

DUMMY

똑, 똑, 똑.

화이트 큐브를 걷어가는 검은 스트레토힐.

텅빈 공간에는 스트레토힐의 소리만 울릴 뿐.

누구에게는 동경의 공간이고 누구에게는 신분 상승의 관문이고, 또 누구에게는 환멸의 공간, 화이트 큐브.


화이트 큐브는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말한다. 오로지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전시 공간의 네 벽을 모두 하얗게 칠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곤 한다.

사실 화이트 큐브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 또 하나는 작품을 파는 갤러리.

똑같이 흰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기 때문에 같아 보이지만 전혀, 아니 완전히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미술관은 작품을 연구하고 전시하기 위해 돈을 쓰는 곳이고, 갤러리는 작품을 파는, 작품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곳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갤러리에서는 작은 물건이 단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수천만 원, 때로는 수억 원에 거래되곤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으로 거래되는 곳이다. 예술은 돈에 무관하지만, 미술시장은 철저히 돈에 뿌리내리고 자란다.


나, 소.리.정은 지금 그런 화이트 큐브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갤러리X는 외관마저도 화이트 큐브처럼 생겼다. 완벽하게 닫힌 사각형.

입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는 사람만 알아서 들어오라는 걸 온몸, 아니 온 건물로 이야기하고 있다. 손잡이가 있는 부분을 밀자 문은 무게감 있게 열렸다.


문이 닫히자 순식간 거리의 소음은 사라지고 적당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블랙홀, 아니 화이트 큐브. 세속의 걱정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 같은 공간이다.

‘맞아, 갤러리는 이런 곳이었지.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이런 완전무결한 느낌이 좋았어.’


갤러리 입구 프론트에는 검은색 복장을 한 두 명의 여성이 앉아 있다. 프론트 공간마저도 흰색으로 주문 제작한 가구들로 빈틈없이 완벽하다. 프론트 뒤쪽 높다란 책장에는 그동안 이 갤러리에서 했었던 전시의 도록들이 여유 있게 꽂혀있다.

한 명은 블랙 자켓에 바지 차림이고, 또 한 명은 검은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다. 블랙 자켓의 여성은 프론트 테이블 위 무언가를 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구로 들어서는 나를 잠시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도 곧 시선을 거둔다.

보통 갤러리 프론트에서는 친절한 인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여기는 백화점이 아니니까.

일종의 쿨함이라고 해야 할까?

쿨함은 미술계에서 중요한 애티튜드이기도 하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전시를 보러오는 관람객은 갤러리의 진짜 손님이 아니기 때문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무심함이 나는 편하다. 그러나 오늘은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프론트로 다가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저, 박희정 실장님 뵈러 왔습니다”

서류를 보던 블랙 자켓의 여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박 실장님요? 약속은 하셨나요?”

“네, 5시에 뵙기로 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소 리정라고 합니다.”

그녀는 나의 말에는 어떤 반응도 없이, 그저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는지 잠시 기다렸다.

“박 실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박 실장님 지금 중요한 업무 중이시라고 끝나면 비서실에서 연락 주기로 했어요. 잠시 전시 보고 계세요.”

그녀는 말을 전하면서 눈길을 전시실 쪽으로 줬다. 나는 프론트를 지나 전시실, 화이트 큐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주는 아니어도 좋은 전시 있으면 한 번씩 왔던 곳인데 갤러리 구조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화이트 큐브 가장 가운데 크고 푸른색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추상이야? 구상이야? 잠깐, 아, 이 그림 어디선 본 거 같은데···’

‘설마? 오키프?’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20세기 초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화가다. 아니 여성 화가로 불리는 걸 싫어했던 화가. 잘 알려진 그녀의 꽃은 어떻게 보면 여성의 음부를 그린 거처럼 보여, 묘한 매력과 흥분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한다. 그 유명한 거대한 꽃 그림만큼이나 사막의 죽은 짐승 뼈 그림도 중요한데 여성의 성기를 닮은 거대한 꽃이 워낙 강렬해서 다른 걸 다 소거시킨다.


‘정말 오키프 작품 전시가 한국에서 가능하다고? 일개 갤러리에서?’

화이트 큐브 가득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꽃 그림과 스케치들이 걸려있었다. 진짜 오키프의 작품, 프린터가 아니라, 실제 유화 작품.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붓 터치 하나하나 따라가며 정신없이 작품을 보고 또 봤다. 벽에 걸린 몇 가지 스케치를 보면서 ‘아, 이런 과정을 거쳐 이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겠구나. 사막에서 혼자 안 무서웠을까?’

다른 벽면에 거대하지만 스케치에 가까운 작품이 걸려있었다. 그 그림도 보고 다시 유화인 완성작을 보면서 비교하고 있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니, 이런 작품을 갤러리에서? 판다고? 그게 가능해?’


‘그런데, 이 작품은 도대체 얼마나 하는 걸까?’


나는 지금, 20세기 초 불굴의 의지로 황량한 텍사스 사막에서 그림을 그렸던 멋진 작가라든지, 거대한 꽃의 의미라든지, 추상과 구상이라든지, 페미니즘 미술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난생처음으로 ‘작품의 가격’을 궁금해하고 있다.


어제 늦은 저녁 시간 손수영 선배의 전화가 왔다.

그녀는 미술잡지 『아트 & 컬렉터』 기자다. 나는 지난 겨울 잡지사 자료 정리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일이려니 생각하면 전화를 받았다.

“리정씨,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 지금 학기 수료는 했죠? 두세 달 시간이 되면 갤러리X, 정확히는 갤러리X 청담점에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일해보지 않을래요? 갤러리X 알죠?”

“갤러리X요? 알죠. 유명한 곳이니까요. 그런데 갤러리X가 청담동에도 있어요?”

“요즘 워낙 미술이 붐이라서 다들 강남 쪽에 세컨드 갤러리 오픈하잖아요. 갤러리X도 청담동에 냈어요.”

“그런데 선배, 제가 큐레이터 경력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경력이 없으니까 어시스턴트 하면서 경력 쌓는 거죠. 거기 어시스턴트가 교통사고가 나서 갑자기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요. 곧 전시 하나 오픈해야 해서 급한가 봐요. 일은 큐레이터가 할 거고, 가서 시키는 일만 하면 돼요.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세컨드 갤러리라서 대표님 눈치 안 볼 수 거고, 큰 손님도 거기서 대응하진 않으니 그리 부담되지 않을 거예요. 편하게 일만 하면 돼요. 내일 시간 돼죠? 자세한 건 내일 오후 4시에 갤러리X에 가서 박희정 실장을 만나서 직접 설명 들으세요. 그쪽에 소리정 씨 간다고 이야기할께요. 참, 내일 박 실장 만나는 건 사간동에 있는 갤러리X예요.”

언제나처럼 손 선배는 자기 할 말 만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갤러리X의 청담동 세컨드 갤러리.

나야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지금 논문 주제를 못 잡고 헤맨 지 칠 개월째.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은 초초해지고 있다. 다시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논문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하던 차라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갤러리X는 대외적으로 커 보이는 갤러리는 아니지만 국내 3대 갤러리 중 하나로 불린다. 매년 세계적인 아트페어에도 나가고 간혹 볼 만한 전시도 한다. 무엇보다 재벌 사모님들이 원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으면 관련된 전시를 제때 열어 작품 구매를 도와주기 때문에 가장 내실 있는 갤러리라는 소문이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갤러리에서 일하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림에 반해 순수하게 공부를 시작했던 거다. 좀 단순 무식하게.

나름 이름있는 식품회사에서 일하다 삼 년 차 여름휴가 때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다가 비엔나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키스>를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품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니,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그 몽롱함에 매혹되었다.


1-1.jpg


그때 결심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아야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늦은 가을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호기롭게 미술사학과에 왔지만 공부는 만만치 않았고, 학기를 수료하고 막상 석사 논문을 쓰자니 오스트리아의 국민 화가인 클림트를 논문 주제로 잡기 난감했다. 한국에서 연구하기에 자료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유럽에 체류하면서 자료를 찾기도 무리였다. 무엇보다 이미 유럽에서 나오는 연구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나에게 클림트의 작품은 넘버원이지만, 그 주제로 논문을 쓰고 나면 한국에서 취직할 곳이 마땅히 없을 거 같았다. 졸업하면 서른이 넘을 텐데 이렇게 막막하게 그냥 공부만 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누구는 석사 마치면 뉴욕에 박사과정 공부하러 간다고 GRE 공부도 하고 있는 거 같던데, 난 이게 뭔가 싶었다. 2년 수료 과정 강의 들으면서 점점 내 열정은 식어가고 내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이런 건 아니다. 대부분 미술사학과 친구들은 석사과정 3학기 빡세게 하고 나면 주제 정하기에 한두 학기 쓴다. 밖에서 보면 무슨 대단한 공부한다고 그러냐 싶겠지만 이 안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 다들 나름 공부에 진심이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는데,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된 작품이나 작가는 논문 주제로 잡기 어렵다는 걸 과정 중 점점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에 반해서 미술사학과에 들어왔다고 한 선배는 그걸로 논문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한국에서 서양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논문, 연구 주제 잡기는 너무 난감하다. 언어 문제, 작품 분석을 위한 자료 수집, 그리고 지도해 줄 교수까지. 한국에 서양미술사로 지도가 가능한 교수가 몇 분이나 있겠는가? 그것도 시대별로. 결국 가능한 선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고, 졸업 후를 생각하면 서양미술사를 한국에서 공부한다는 건 거의 가망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박사 하러 유학까지 가지 않는다면···.


지방에 계신 부모님은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사학과 대학원 간다고 했을 때부터 난감해하셨다. 공부는 좋지만 그것 마치고 뭘 할거냐고 걱정이셨다. 나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학비 대고 알아서 한다고 선언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은 불안해졌고, 왠지 부모님 눈치를 보게 됐다. 보습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잘 지내는 척 했지만 늘 조금은 불안하고 궁색했다.


아무튼 석사 논문 주제를 찾아야 했다. 빨리 찾아야 했다.

그동안 다니던 보습학원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휴학하면 온 시간을 논문 준비에 쏟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강제로 가야 하는 수업도, 아르바이트도 없는 상태가 되고 보니 오히려 공부에 탄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갤러리X?’


어쩌면 직접 미술 작품을 만지고 전시하는 현장을 보는 건 논문 작업에 좋은 자극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건 희망회로고, 핑계다. 논문 쓰는 동안 필요한 돈을 조금 벌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예술작품을 돈으로 사고파는 갤러리에 대한 거부감은 있지만, 누구처럼 재벌 딸도 아니고, 아마존에 주문하는 원서 값도 만만치 않은데 한번 해 보지 싶었다.

‘잠깐, 두세 달만 하는 아르바이트니깐 크게 고민하지 말자.’

거대한 오키프의 꽃 앞에서 몽환하게 흐르는 선을 따라 작품 가격과 캄캄한 내 앞날을 떠올릴 때, 그때 누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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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이트 큐브 속으로 들어가다_3 24.08.09 12 0 13쪽
2 화이트 큐브 속으로 들어가다_2 24.08.08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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