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청새치 호의 항해는 뱃머리 옆에 달린 큼직한 종을 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선장의 명령에 따라 닻을 올리고 세 개의 거대한 돛을 펴자,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 돛이 배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선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투란은 느긋이 객실의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첫 번째는 범선 내의 규율을 적은 것.
선장부터 시작해 배 안의 여러 직책을 설명한 뒤 불문율이나 미신 등을 적어 두었는데, 기묘한 것이 꽤 많았다.
여자를 태우면 안 된다거나, 밤에는 바다를 내려다보면 안 된다거나, 휘파람을 불면 안 된다거나······.
대체 뭐 이렇게 안 되는 게 많나 싶을 정도.
거기다 규칙을 위반했을 때의 처벌들도 하나같이 흉흉한 게, 뭐만 하면 돛대에 묶어놓고 채찍질하는 것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인어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정말로 인어가 사는 곳 옆에서 쓰인 것이라 그런지 오렘 시의 도서관에 있던 것보다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여럿 있었다.
북해와 남해를 잇는 마법의 거울 이야기부터 거대 물고기로 변할 수 있는 인어 왕족에 관한 이야기까지.
대충 눈에 띄어서 사 온 것 치고는 제법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서 나쁘지 않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두어 시간 정도 독서를 즐긴 뒤, 투란은 슬슬 좁은 객실이 답답하게 느껴져 책을 접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어느새 육지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라, 사방이 온통 새파란 바닷물로 가득했다.
그 때문에 배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는데도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조차 들지 않았다.
“어이쿠, 기사님 오셨습니까!”
갑판에 오르자 일등항해사 오스반이 그를 반겼다.
조금 전 책에서 선원들의 직급 등을 참고한 덕에 그가 이 배에서 선장 다음가는 직책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화물을 책임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선장의 부재 시 함선 운영까지 담당한다고 하던가?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게 영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는 했지만.
“안에만 있자니 갑갑해서 바람이나 쐬려고 나왔지.”
“객실이 좀 그렇지요? 하하······사실 원래 상선이 다 그 정도는 아닌데 말입니다.”
오스반은 그게 다 욕심 많은 선주가 화물을 쑤셔 박으려고 선창(船倉)을 지나치게 크게 늘린 탓이라고 변명했다.
원래는 상급 선원들 역시 투란의 객실보다 조금 더 큰 방을 하나씩은 쓸 수 있는데, 이 배에서는 좀 큰 방 하나를 같이 써야 한다는 것이다.
투란은 혼자 방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엔릴 사막까지는 스무날에서 한 달 정도 걸린다던데.”
“예. 물론 바람이나 파도가 좋을 때의 이야기이긴 합니다. 북해가 워낙 거친 곳이다 보니.”
오스반은 어린 시절 남해 쪽에서 배를 탔는데, 그곳은 파도가 적고 바람도 약하게 불어서 배가 빠르게 못 가는 대신 항해에 변수가 거의 없다고 했다.
그에 비해 북해는 극과 극이라서, 순풍을 탈 때면 말 그대로 바람처럼 날아갈 수 있지만 자칫하면 항로가 크게 틀어지거나 침몰할 수도 있는 게 문제였다.
해적이며 인어 같은 놈들이야 어디건 가리지 않고 들끓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이번에는 기사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그의 실력조차 본 적 없으면서, 오스반은 투란이 있으니 해적이며 인어 따위는 감히 이 배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며 떵떵 소리쳤다.
다소 낯뜨겁기까지 한 아부에 투란은 쓰게 웃으면서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괜히 분위기만 나빠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옆에 있던 하급 선원들이 오스반의 말을 들으며 안도하는 기색을 보여서였다.
아마 그 역시 부하들을 안심시키고자 일부러 이렇게 허풍을 떠는 듯했다.
사실 근거의 빈약함과 별개로 그의 믿음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귀족 중에서도 중상위권쯤 되는 실력자가 호위 중인 무역선을 건드릴 수 있는 적은 많지 않을 테니까.
이어지는 찬양을 한참 들은 뒤, 투란은 오스반에게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사실 이곳 기사들의 몸값이 왜 그리 높은지 잘 모르겠어. 카마인 가문에서도 적당한 가격에 기사들을 배치해서 무역선이 약탈당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어차피 교역할 때마다 세금을 걷을 텐데.”
아라비온만 해도 그 가신 가문의 영지에서 기사들이 배우 일까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깊게 알아본 적은 없지만, 설마 극단에서 무역선조차 감당하기 힘들 높은 봉급을 주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음, 그게······.”
그런 의문에 오스반이 뺨을 긁적이다가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이 뱃일이라는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뱃놈들은 연락 닿던 이가 몇 년쯤 소식이 끊기면 어디 멀리 갔나보다 하는 게 아니라 죽었구나, 하고 말 정도지요. 그렇다 보니.”
“기사니 뭐니 해도 결국 배가 침몰하면 죽을 목숨이라서 겁을 먹는단 건가?”
“그, 그런 뜻까진 아닙니다!”
“아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확실히 모든 일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어.”
생각해 보면 그 역시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배가 침몰했을 때 쉬이 땅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이야 넘치는 게 바닷물이니 마법으로 마실 수 있게 정제하고 먹을 것은 생선을 잡아다 구워 먹으면 그만이라지만, 땅까지 헤엄쳐 가는 일은 또 얼마나 수고스러울 것이며 잠은 어떻게 잔단 말인가?
투란조차 그럴 정도니 평범한 기사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다 떨어져서 보통 인간과 다름없게 된 다음 익사하고 말 터.
어쩌면 카마인 가문도 옛날에는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무역선에 태웠지만,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몸값을 비싸게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무언가 재밌는 이야기들을 하는 분위기로군.”
그때, 갑판 아래에서 피레스 선장이 안대를 고쳐 쓰며 올라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먼저 투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귀한 분을 맞이해놓고 몇 시간째 인사도 못 드렸군요. 혹시 이 머저리들이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요. 여러 가지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오스반? 밀 보관하는 곳에 물 샐 것 같던데, 배치 좀 바꿔놔라.”
“옙!”
피레스의 명령에 오스반이 주먹으로 가슴을 팡 두드린 뒤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투란은 그런 피레스를 보며 조금 전 물어보려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면 엔릴 사막에는 주로 뭘 가져다 팝니까? 제가 그쪽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요.”
“다양합니다. 사막이라는 곳이 진짜 모래만 가득한 곳이다 보니 목화 재배가 안 되어서 솜과 무명천도 잘 팔리고, 아라비온과 육상 교역이 끊긴 뒤로는 곡물도 많이 팔리지요. 하지만 갈 때보다는 올 때가 진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올 때?”
“예. 엔릴 사막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가격에 비해 무겁고 부피가 큰 것들인데, 그쪽에서 아바챠로 넘어오는 물건들은 비싸면서 보관이 쉽지요. 향신료나 보석 종류가 대부분이라서 올 때는 잠도 더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함께 탈 수 있으면 좋았겠는데, 아쉽군요.”
투란의 너스레에 피레스가 킬킬 웃다가 되물었다.
“엔릴 사막 쪽에 오래 머무십니까?”
“예, 아마도.”
사실 투란은 아직 자하르의 땅에서 어떻게 자신의 뿌리를 찾을지 명확히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신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가로 쳐들어가는 것은 상자 안에 보물이 들었는지 칼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다짜고짜 손을 들이미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을 배제하자면 단서는 기껏해야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낸 초상화랑 유품 몇 개 정도가 고작일 뿐.
그것만으로 찾자면 사막에서만 몇 년, 혹은 그 이상으로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 * *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투란의 첫 항해는 일주일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폭풍도, 해일도, 해적과 인어의 습격도 없이.
그 말인즉, 할 것 없이 심심한 나날이 이어졌다는 의미였다.
“이게 5번 줄이라고?”
“예. 앞에서 강한 역풍이 불어올 때면 이거랑 저쪽의 가운뎃줄 두 개를 풀어서 빨리 돛을 거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제자리에서 맴돌아 버리지요.”
“오호.”
책도 다 읽었겠다, 투란은 적당히 여유가 있는 선원들을 하나둘 붙잡아 가며 범선의 항해 방식부터 시작해서 여러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지식욕을 충족했다.
선원들은 하늘 같은 기사 나리가 천한 선원들이나 익히는 기술을 배운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한 번 익힌 것은 쉬이 잊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아낌없이 자기들의 요령을 이것저것 전수해 주었다.
사실 외모만으로 보면 투란은 이곳 선원들 사이에서도 막내뻘에 가까워 가르치는 데 별로 위화감이 없기도 했다.
“식사 시간입니다!”
“자, 먹고 하자! 모두 식당으로!”
식사는 하루 세 번 나왔는데, 예상했던 대로 양이건 질이건 지상에서의 식사와 비교할 수 없이 조악했다.
애초에 식량 보관함을 넉넉하게 배분하지 않았을뿐더러 보존식 역시 저질스러운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실 역시 썩 넓지 않은 탓에 피레스 선장과 투란 역시 선내의 가장 큰 식당에서 선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그래도 이 양배추절임까지 빼놓지는 않아서 다행이지요! 이게 없었으면 우리 모두 진작에 잇몸병에 걸려 죽었을 테니까요.”
“잇몸병?”
“예. 잇몸에서 피가 나오며 죽는 병인데, 신 음식을 먹으면 낫습니다. 과일은 금방 상하니 양배추절임이 최고죠. 맛은 뒈지게 없지만요. 크흐.”
옆에서 건빵에 염장 고기와 양배추절임을 곁들여 먹던 갑판장 레낙이 겁주듯 말하며 웃었다.
지난 며칠 범선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며 이것저것 많이 물어서인지, 그는 이제 말투만 존칭이지 투란을 자기네 새끼 선원쯤 되는 것처럼 취급했다.
“신기한걸.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이런 거야 뭐, 언젠가 누군가 알아내고 나서 퍼진 것이겠지요. 그게 밝혀지기 전에는 인어를 날로 잡아먹기도 했답니다.”
“오.”
문득 사람을 오독오독 뜯어먹던 흑요정 사령술사들이 떠올라서 조금 식욕이 떨어진 투란은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때, 돛대 꼭대기에서 주변을 관측하던 선원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다! 전방 2시 방향! 중형선!”
“뭐?”
“해적이냐!”
한창 식사 중이던 선원 중 한 명이 소리치자 잠시 후 답이 돌아왔다.
“모르겠다! 위에 가문의 깃발이 안 걸려있어!”
“느낌이 해적일 거 같은데. 어쩐지 비도 안 오고 날씨가 너무 좋다 싶긴 했지. 일단 전투 준비!”
갑판장의 지시에 한창 식사 중이던 선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후다닥 갑판 위로 뛰쳐나가거나 무기를 분배했다.
일등항해사 오스반은 청새치 호의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 다가오는 배를 피하고자 했고, 피레스 선장은 다소 긴장한 듯해도 꽤 의연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부하들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투란은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을 슬쩍 피해가며 갑판에 나온 뒤 탐색 마법을 사용해 다가오는 배를 확인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이 탄 청새치 호보다 조금 작고 돛이 네 개가 달려 있었는데, 가늠해 보니 속도가 그들보다 조금 더 빠른 것 같았다.
잠시 후, 정체불명의 배는 청새치 호를 추격하듯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젠장, 역시 해적이었군!”
“어떻게 할까요, 선장님. 따돌립니까? 저쪽이 조금 더 빨라서 오래 추격하면 잡힐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잘 따르면 잡히기 전에 근처의 섬에 정박할 수도 있고요.”
투란은 피레스의 시선이 자신을 슬쩍 훑는 것을 느꼈다.
한 차례 실력 검증은 했지만, 그래도 실전 능력까지 본 것은 아니기에 다소 불안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괜찮겠습니까?”
“저 안에 기사나 귀족이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없습니다.”
“······좋습니다. 배 돌려! 맞붙는다!”
“기사님 만세!”
“다 죽여버리십쇼!”
투란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답변에 청새치 호의 선원들은 조금 불안해하면서도 믿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잠시 후, 다시금 방향을 돌린 청새치 호와 상대 배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아마 해적일 듯한 상대 쪽 선원들은 갑자기 방향을 돌린 청새치 호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는 듯했으나, 호전적인 기세를 거두지는 않았다.
“거기-배 세워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마-!”
거리가 수백 미터쯤으로 가까워졌을 무렵, 뱃머리에 선 남자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투란은 그 말을 듣고 궁금해져서 옆에 있던 갑판장에게 물었다.
“항복하면 정말로 살려주는 건가?”
“자기들 마음대로라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하기야 법도 안 지키는 해적들이 약속이라고 지키는 것도 이상했다.
덕분에 투란 역시 아무 가책 없이 마음껏 손을 쓸 수 있었다.
결국 제 욕망을 위해 인간을 죽이는 인간이란 사냥해야 할 늑대일 뿐이니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척의 범선.
거리가 삼사십 미터쯤 되었을 때, 투란은 초월적인 다릿심으로 도약하여 해적선의 갑판에 착륙했다.
굉음과 함께 갑판이 으스러지는 것을 본 해적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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