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친 악녀가 날 너무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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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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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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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이제 진짜 피크닉

DUMMY

대체 이곳에 기연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가?


후손의 피에 반응해 나타날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가?


알았다고 해도 천하의 엘리제 버몬트가 다른 가족 피도 아니고 솔선해서 피를 흘린다니?


결심을 굳히고도 각종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


사실 겉만 그럴싸하고 이게 다 쇼는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고, 어쩌면 함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덜컥 믿기에는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뿌리 깊게 박힌 불신이 레오로 하여금 의심부터 품게 했다.


"후."


그래도 사내놈이 하겠다고 했으면 과감하게 해야지.


결심을 굳힌 레오는 환영 같은 사람의 실루엣을 향해 손을 뻗었고, 손끝이 허상에 닿은 순간 그는 300년 전 과거의 비전을 보며 소드마스터의 전투를 체험하게 됐다.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져 지금으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상승의 무리에 아득해지는 기분에 잠기는 레오.


지금 그의 육신은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이곳에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엘리제는 레오가 손에 감아준 손수건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강해지세요, 레오."


지금 자기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자각 없이 무아지경에 빠진 레오의 등에 몸을 기대고 살며시 끌어안은 엘리제가 속삭였다.


"절대, 다시는 그런 쓰레기 같은 여자를 지키다 죽는 일이 없도록."


소중한 아기라도 품는 것처럼 배후에서 레오를 포옹한 엘리제는 레오의 향기와 온기를 만끽했다.


"대귀족의 데릴사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묘한 퇴폐미가 느껴지는 그 속삭임은 마치 마녀가 주술이라도 거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요. 힘도 명성도 주겠어요. 당신이 해준 헌신에 보답할게요. 그러니까···."


강하게 불어온 바람에 엘리제의 속삭임이 묻힌다.


이후 그녀는 레오가 다시 깨어날 무렵까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에 달라붙어 조용히 스킨십을 즐겼다.


마치 자신의 냄새를 배게 만들어 영역표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찰싹 달라붙는다.


그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비전을 보던 레오가 정신을 차렸다.


그때는 이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어진 엘리제가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어···."


너무도 강렬했던 체험 탓에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던 레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엘리제를 본다.


도시락 바구니를 옆에 둔 채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겨우 오늘 여기 나온 명분이 피크닉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젠 그런 걸 할 분위기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오 생각이고 엘리제는 할 생각으로 가득한 눈치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바구니를 열어 익숙한 손길로 척척 피크닉 세팅하는 레오.


그런 레오를 보면서 엘리제가 묻는다.


"소득은 좀 있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당장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얻은 건 있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자신 안에 어지럽게 떠도는 심득을 잘 갈무리하면 2년 안에 엘리제의 요구대로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사실 그래서 못내 찜찜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기연을 얻은 건지 체감이 확 들었으니까. 다른 재능 우수한 검사가 이걸 얻었다면 버몬트 후작가의 기둥이 하나 새로 생겼을 텐데···.


마치 남의 걸 도둑질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라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차를 다리고 샌드위치를 세팅하는 손길을 막힘이 없다.


10년간 엘리제의 히스테리에 시달리며 익힌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면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차를 우렸다.


완벽한 온도와 테크닉으로 우려낸 차는 순식간에 주변에 그 이름처럼 장미향기를 만발했다.


혹자는 향이 너무 자기주장이 강해서 별로라고도 하는 로제티.


반대로 엘리제는 그걸 좋아했다. 강렬하게 자신을 주장하며 다른 모든 걸 덮어버리니까.


그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이유였다.


"레오, 궁금한 게 있어요."


우아하게 피크닉을 만끽하는 엘리제.


"예, 아가씨."


좋아하는 로제티를 음미하다가 말고 갑자기 질문을 던지는 엘리제에게 능숙하게 차를 추가로 내리던 레오가 귀를 기울였다.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소망은 명확한데 그걸 이룰 수단이 요원하네요. 아니··· 정확히는 수단이 너무 많아 어떤 수단이 가장 좋을지 모르겠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소리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엘리제.


그런 엘리제에게 레오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답했다.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불필요한 건 하나씩 치우면서 최적화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최적화···."


"어릴 적에 우연히 만난 선생님이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면 급하고 마음이 가는 것부터 순서를 정해서 하나씩 해결하라고 일러주셨죠."


"선생님?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네요."


알고 지낸 시간만 10년이다, 자그마치 10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은 참 레오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엘리제는 그 사실에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런 엘리제를 앞에 두고 시종일관 기분 좋아 보이다가 왜 또 갑자기 그러나 싶어 움찔하는 레오.


"그 얘기, 자세히 듣고 싶어요. 선생님이라는 게 누구죠?"


"사실··· 숨기려는 게 아니라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7살 때 우연히 만났거든요. 거지꼴을 하고 쓰러져있던 걸 도와주었더니 그 보답이라고 며칠 동안 같이 놀아준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라도 있나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놀아주는 동안 인생 사는 법? 뭐 그런 걸 조금 배웠습니다. 어디 가서 또래 애들한테 맞고 다니지 말라고 주먹질하는 것도 조금 배웠고요."


그런 후 인사도 없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레오.


새삼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사람이긴 했다.


영주의 기사로 강한 축에 속하는 아버지보다 월등히 강해 보이는 기색을 보였는데도 거지꼴을 하고 굶주려 쓰러져 있었던 것도 그렇고, 평상시 보이는 말투나 못 알아먹을 이상한 단어들도 그렇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찾아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끈끈한 정을 쌓았던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다시 인연이 닿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시원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레오와 달리 엘리제는 ‘선생님’이라는 인물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인가요?"


티스푼을 붓 삼아, 흙바닥을 도화지 삼아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엘리제.


귀족 영애의 교양으로 미술, 음악 등도 배운 만큼 땅에 그린 그림은 제법 훌륭했다.


강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남성.


상당히 인상적인 얼굴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다.


붕붕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하는 레오였다.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범상치 않은 고수처럼 보이는군요. 이 사람은 제 선생님이 아닙니다. 애초에 선생님은 여성분이시거든요."


"·········여자?"


우뚝 엘리제가 경직된다.


"어떤 사람인지 전부 말하세요."


"그게··· 그,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 떠돌아다닌다는 거 말고는 모릅니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아서 제 마음대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고요."


"즉, 친애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는 거죠?"


"예."


고작 3일 정도 어울린 건데 친애니 할 감정이 쌓일 틈이나 있었겠는가.


담담하게 말하는 레오를 보고 그제야 엘리제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를 음미한다.


"아가씨!"


기겁하며 그런 엘리제의 손을 잡는 레오.


"후엣? 아, 안 돼요, 레오. 아직은 준비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뜬 엘리제가 횡설수설한다.


"흙 묻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으시고 그걸 드시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아."


갑자기 박력 있게 손을 잡는 바람에 놀라고 들떴던 마음이 차게 식는다.


"···생각할 게 많아서 미스한 거예요."


"다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레오의 선생님 얘기에 그녀답지 않게 얼이 빠졌던 것 같다.


굉장한 추태를 보일뻔했다는 사실, 그것도 레오 앞에서 그랬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던 엘리제는 애써 화제를 바꾼다.


"우선순위를 정한다."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제.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정리해야 할 게 많네요."


그녀가 그리는 행복한 미래.


거기에 도달하는데 현재 세상은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내재한 불안 요소가 너무도 많다.


제국.

반란.

혁명.

재난.

재앙.


굵직한 위험만 다섯 개나 된다.


언제 동란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이 중에 몇 개는 지금 당장 엘리제가 건드리지도 못할 것도 존재했다.


반대로 열심히 손을 쓰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것도 있다는 말이었고,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남은 2년이라는 시간을 총동원해 그걸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레오로서는 엘리제의 이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정리할 일? 그런 게 있었나?’


사교 파티 출근 도장 찍는 걸 말하는 건가 싶다.


그녀가 소영주로서 공무를 보는 것도 아니었고 입학 전까지 많다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할 일이 뭐가 있나 싶은 레오였다.


굳이 꼽자면 들어온 혼담을 진행하는 정도?


귀족들 사이에서 엘리제의 본성은 은근히 알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연애 결혼이 특이한 것으로 가문 간의 이해득실을 따진 정략혼이 패시브인 귀족 사회다.


사랑 같은 건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고 배우자의 품성 역시 아무래도 좋은 것이기에 엘리제의 악독한 참모습을 알고도 혼담은 들어오고 있었다.


그걸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까지는 전부 거절하고 있었지만, 2년 후면 엘리제도 성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피앙세가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였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약혼자를 찾아 나서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


‘역시 삼왕자를 노리겠지?’


새로 차를 따라주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레오.


어릴 적부터 엘리제가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는 이야기가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왕비가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불 보듯 훤했다.


마침 삼왕자도 혼처를 찾기 시작할 시기다.


왕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기사 가문으로 시작해 지금은 비옥한 영토를 바탕으로 왕국 제일의 식량 산지가 된 버몬트 후작가 정도는 왕실 며느리 집안으론 일등품이지.


격도 맞고 정치적, 이권에서도 맛있다.


필시 약혼은 스무스하게 이루어지리라.


주인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도 중요한 시종의 역할이지.


기연 같은 엄청난 선물을 받은 답례를 담아 레오는 아부 섞인 축하를 하기로 했다.


"듣기로 최근 왕실에서 삼왕자의 혼처를 알아본다고 하던데, 역시 나이도 그렇고 집안의 격도 그렇고 엘리제 아가씨가 일 순위로 물망에 오르시겠군요.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왕자와 결혼하는 걸 꿈꾸던 엘리제다.


야심도 엄청났기에 왕이 될 가능성도 다분한 삼왕자는 그녀의 소망을 이루기에 그야말로 적격인 상대.


실제로 예전부터 삼왕자 얘기를 할 때면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을 했던 엘리제다. 그때만은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서 레오도 흐뭇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하루빨리 엘리제가 시집가서 전속 집사라는 중책을 벗어던지길 바라기도 해서 순수하게 삼왕자랑 잘 되길 응원한 레오였지만,


"하?"


표정이라는 게 완전히 사라지고 새까만 암흑처럼 죽은 눈을 하고 자신을 보는 엘리제를 목격한 순간 깨달았다.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몰라도 자신이 아주 제대로 드래곤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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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진짜 피크닉 +5 24.08.15 973 37 12쪽
3 피크닉? +4 24.08.14 1,049 35 12쪽
2 아가씨가 이상하다 +2 24.08.13 1,202 40 11쪽
1 프롤로그 +4 24.08.12 1,414 3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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