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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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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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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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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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선배님?

DUMMY



“끄르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가래 끓는 소리만 흘리던 사내의 목이 아래로 푹 꺾였다.

거짓말처럼 시체가 되어 버린 사내가 바닥에 고꾸라지자, 흑의인은 자동으로 빠져나온 협봉검을 옆으로 휘둘러 피를 털어내더니 허리춤에 수습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내 것과 똑같은 흑의 무복이었지만, 뒤통수만 보이는 머리에는 나를 포함해 모든 흑의인들이 쓰고 있던 시커먼 복면 대신 복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머리띠만 둘려 있었다.

잠시 자신이 죽인 사내를 내려다보던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엎드려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날카로운 매부리코에 끝이 올라간 눈매 때문에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는 장년인이었다. 특히나 햇빛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허여멀건 한 얼굴에 박힌 얇고 붉은 입술은 일부러 화장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러운 성격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관상이라고나 할까.

문득, 노골적으로 갑질을 일삼던 명성전자 구매 팀장의 면상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마른기침과 함께 애써 삼켰다.

이곳에서는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발주 취소나 대금 결제 지연 정도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부리코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노려보다가 물었다.


“살아 있는 건 또 너 하나인가?”


재수 없는 인상만큼이나 듣기 싫은 갈라지는 목소리.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또라니? 뜻 모를 말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려 보기도 전에 뱃속 깊은 곳에서 적개심 비슷한 감정이 뭉클 솟아올랐다.

저자가 이리도 거슬리는 이유는 명성전자의 구매팀장을 연상시켜서 뿐만은 아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저자는 방금 죽은 중년인을 잡기 위해 나온 살수들의 우두머리였다. 즉, 우리 중에서 가장 고수라는 소리였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는 기술이 있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땅속에 숨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자가 일찌감치 나섰더라면 흑의인들이 전멸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기척을 숨긴 채, 목표물이 완전히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중년인을 죽였다.

저자로서는 가장 확실히 그리고 가장 손쉽게 목표물을 제거할 방법을 택했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수많은 살수가 희생됐지만, 저 허여멀건 한 면상에서 일말의 동정심이나 가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말로는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더러운 감정이 머릿속을 내달렸다.

저런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아랫사람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것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로채는 자들.

눈앞에 있는 저자 또한 정 상무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내 말 못 들었나?”


또 한 번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사력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기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매부리코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정리해라.”


당연하다는 듯한 명령에 머릿속이 하얘지며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뱃속에서부터 끓어 오른 쌍욕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찰나, 갑자기 얼음 굴에라도 들어온 듯 차가운 기운이 정수리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지더니, 어느새 잔잔한 평정심이 그 자리를 메웠다.

처음 겪어보는 신기한 감각에 나는 석상처럼 굳은 채,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이건 마치 과부하가 걸려 폭주하려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두꺼비집을 내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게 가능했다면 박 부장에게 때려치우겠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건 도대체 무얼까?

설마 내 무의식이 내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인 걸까?


나는 잠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이 만약 꿈속이거나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세상이라면 최악의 경우, 죽는다고 해도 ‘아 시발 꿈’이라고 소리치면서 깨어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 상황이 현실일 경우였다.


“들었으면 대답을 해라. 십일 호.”


매부리코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는 이제 짜증을 뛰어넘어 기분 나쁜 끈적함이 실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이 섬뜩한 느낌이 바로 무협지에서 말하는 살기가 아니면 뭐겠는가?

나는 고개를 들어 찢어진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 매부리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들거리는 두 팔로 땅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못마땅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매부리코의 면상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더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제대로 업무 지시도 없이 제 할 말만 해놓고 틈만 나면 ‘내 말 못 알아들었나?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 이 과장.’이라고 면박을 주던 정 상무.

반사적으로 또 쌍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평정심을 찾았기에 어렵지 않게 참을 수 있었다.

욕을 한다고 변하는 건 없을 터였고, 무엇보다 회사에서도 하지 못했던 욕을 저 매부리코를 상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미친 척하고 정 상무에게 욕을 했다면, 가볍게는 징계, 무겁게는 해고 정도의 처분이 되었겠지만, 왠지 저자는 내 목부터 날리고 볼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욕이나 마음껏 퍼붓고 목이 날아가도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목이 잘리는 꿈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부들거리는 두 다리로 땅을 밀어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 재수 없는 작자 덕분에 내가 십일 호라고 불린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완전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어리바리하던 신참이 삼백이십팔 호였던 걸 생각해 보면 이 몸의 주인이 꽤 고참이었나 보다.


살아남기 위해 어찌어찌 예를 표하긴 했지만, 온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통증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고통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문 채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매부리코는 그 모습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에 흔적을 지우고 복귀하도록.”


쌀쌀맞은 명령에 내가 다시 한번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던 매부리코는 강 반대편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훅하고 사라졌다.


-휘이잉~


“후우······.”


피바다가 된 갈대밭에 가을바람이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폐부 깊은 곳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그나마 피가 고이지 않은 갈대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눈을 부릅뜨고 절명한 시체와 잘려나간 팔다리가 사방을 뒹굴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나는 잠시 갈대밭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웹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빙의 같은 거라면, 이곳은 소설 속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무협이 없었기에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악플을 단 적도 없고, 누군가와 아이디를 공유한 적도 없었다.

슬그머니 ‘상태창’이라고 중얼거려도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협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든 게임도 아닌 것 같았다.

꿈이나 무의식의 영역일 가능성은?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움직여 손가락을 뺨 위에 올려놓았다.


“악! 씨발!”


뺨을 꼬집은 나는 뺨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통에 비명과 함께 욕지거리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자상이 나 있던 곳을 꼬집은 모양이다.

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뺨에서 일어난 격통 때문에 전신을 뒤덮고 있던 고통이 약간은 옅어진 것 같았다. 이런 걸 무협 식으로 이독제독이나 이이제이라고 하는 걸까?


피식 새어 나오는 헛웃음으로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두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상황이 꿈이건 무의식이건 빙의건 뭐건 간에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살수가 된 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아니, 살수가 아니라 수적이건 녹림이건, 하물며 마교의 대마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그만이었으니까.

혹시라도 무협지에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기연이라는 게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왔다.

글로만 보았던 만년설삼이나 공청석유 같은 천하제일의 영약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고수가 되어 천하를 주유하면서 협객으로 명성을 떨치고, 강남제일화, 사천제일미 같은 지역의 미녀들이 흠모하는 대상이었다가, 종국에는 중원 제일, 아니, 천하제일의 미인을 만나 알콩달콩, 꽁냥꽁냥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캬하······.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생각보다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지옥도 같은 주변 풍경은 바뀐 게 없었지만, 이제 곧 이곳을 벗어나 고수가 될 생각을 하니 딱히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일단은 이 빌어먹을 갈대밭을 무사히 벗어나기만 한다면 내게 꿈같은 앞날이 열려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품속을 뒤졌다. 일단은 응급 처치를 위한 약품을 찾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내가 가진 돈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대학생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소매치기에게 전 재산을 잃고 조기 귀국해야 했던 뼈저린 경험 이후, 나는 어딜 갈 때마다 항상 수중에 얼마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한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 부족하면 시체가 된 흑의인들의 품도 뒤질 생각이었다.


“······.”


품 안은 물론이고 소매 춤과 속옷 안까지 뒤져 보던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동전 한 푼은커녕 금창약 쪼가리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았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으려 했지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직 서른 구에 육박하는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에이 시펄!”


열 구가 넘는 흑의인들의 시체를 뒤졌지만, 쓸모없는 잡동사니뿐이었다. 약이나 돈이 될 만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시작부터 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포기하기는 일렀다. 아직 중년인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피 웅덩이를 가로질렀다. 제발 저자의 품에 낭낭한 액수의 돈과 외상에 탁월한 금창약이 들어 있기를.


부푼 꿈을 안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피 웅덩이 가장자리에서 발이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술 취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가 시체 몇 구가 겹겹이 포개져 있는 쪽으로 몸을 던졌다. 죽어도 피 웅덩이 쪽으로 넘어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시체 위로 몸을 던졌을 때.


“커헉!”


막힌 숨이 뚫리는 듯한 억눌린 신음이 시체 아래쪽에서 터져 나왔다.


“······!”


화들짝 놀란 나는 피 웅덩이로 몸을 굴린 후,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몸에 피가 묻는 것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피 웅덩이에 박혀 있던 부러진 협봉검을 주워들어 앞으로 겨눴을 때.

겹겹이 쌓여 잇던 시쳇더미가 들썩였다.

순간, 등골을 타고 쭈뼛 소름이 돋아 올랐다. 설마 좀비, 아니, 강시 같은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이 야생마처럼 머릿속을 내달리기 시작했을 때. 시쳇더미 아래에서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시체 한 구가 바닥을 긁으며 기어 나왔다.

와······ 시벌.


믿기지 않는 공포스러운 광경에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굳어버린 나는 붕어처럼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피 웅덩이에 반쯤 몸을 담근 상태로 엉금엉금 기어 나온 시체는 나와 삼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그동안 나는 부러진 협봉검을 앞으로 들이민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피 칠갑을 한 시체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고······.


“선배님?”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눈앞의 혈인(血人)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피에 절은 복면 아래로 앳돼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허······.”


녀석은 삼백이십팔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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