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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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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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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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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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불혹(不惑)

DUMMY



불혹(不惑).

논어에 나오는 나이 마흔 살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옛날, 공자님께서는 마흔이 되었더니 세상사에 미혹되거나 현혹되어 생각이나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데, 대단하다. 공자.


이십 대 후반에 신입사원으로 갓 사회에 나왔을 때, 나는 선배들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다.

특히나 사십 대의 차장, 부장급 선배들은 슈퍼맨 같았다.

능숙을 넘어 완숙에 접어든 전문성과 리더십으로 후배들을 진두지휘하면서 고리타분한 임원들의 지시도 빈틈없이 수행하던 선배들은 내게 눈이 부실 만큼 멋져 보였다.


어리바리했던 내가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업무를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뚝딱 해결하고, 밤늦도록 이어지는 거래처 접대도 완벽하게 소화하던 그들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완벽해 보였다.

그들은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씩은 가지고 있었고, 중형차를 몰고 다녔으며,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맞다. 그렇게 보였다.


과연 나와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인가 의심하게 만들었던, 선배들의 입에서 나오던 전문적인 업계 용어들이 딱히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 슈퍼맨 같아 보였던 그들의 삶도 나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회사와 직장에 운명과 청춘을 바쳤지만, 결과적으로 각자가 가지게 된 지위는 달랐다. 소수의 누군가가 위로 치고 올라가며 군림하는 동안, 나머지 대부분은 하나둘, 제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미끄러지거나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에 충성을 다했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의 불화. 무리하게 장만한 아파트로 인한 대출 이자 스트레스는 덤이었다.

그들 또한 고뇌했고, 방황했으며, 세상일에 끊임없이 미혹되고 현혹되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그야말로 난 사람이었던 듯하다. 강철같은 부동심을 가졌던 사나이였다고나 할까?


나는 올해 마흔이 되었다.

하지만, 유혹 앞에 흔들리지 않기는커녕, 선배들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지금껏 동기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들만큼 명문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였는지, 내 진급은 항상 동기들보다 한두 해씩 느렸다.

대부분이 차부장급, 잘 나가는 녀석들은 이미 임원을 넘볼 정도였지만, 나는 아직 만년 과장에 머물러 있다.

업무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맡은 일은 어떻게든 완벽히 수행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언제나 회사 일이 내 개인의 삶보다 우선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누구나 그런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친했던 선배 하나는 내가 너무 일만 생각한다며, 일보다 사람, 특히나 상사들과의 관계에 더 신경쓰라고 했었다. 선배의 조언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맡은 일을 완벽히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따로 시간과 노력을 쓴다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회사는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곳이지 동호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십 대 초반에 만나 삼 년 정도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 내 서른 다섯번 째 생일 전날 이별을 통보했다. 나와의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아직도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었는지 모른다. 대충 돈 없는 나와는 결혼하기 싫다는 정도로 넘겨 짚을 뿐.

어쨌든 며칠을 밥 대신 깡소주로 연명하던 나는, 전재산을 주식에 몰빵했다.

신혼집으로 작은 아파트 전세라도 얻으려고 모아뒀던 돈이었다.

결혼이 물 건너 갔다는 절망감 속에서 홧김에 감행했던 충동적인 투자는 상장폐지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직장 생활로 모은 전재산 순식간에 증발했다. 거기에 빚까지 생겼다.

허황된 대박을 꿈꾸며 마이너스 통장까지 박박 긁어 들어갔던 묻지마 투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쯤 되니, 공자보다 주택담보 대출에 찌들어 있던 선배들이 더 부러웠다.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기 시작하자, 다들 순식간에 10억이 훌쩍 넘는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한 달이 넘도록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살던 나는 결국 회사와 일에 더욱 빠져들었다. 매달 귀신같이 이자를 뽑아가는 마이너스 통장을 매꾸려면 그 방법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회사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까지 불리던 신제품 출시 프로젝트.

반 년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프로젝트를 기한 내에 꼭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밤낮도, 주말도 없이 보냈다.

그리고 다섯 달 반이 지난 후, 상무는 내게 팀을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신제품 출시를 불과 보름 앞둔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무는 자신이 총애하던, 소위 자기 라인의 차장에게 완성 직전의 내 프로젝트를 넘겼다. 그리고 내게는 회사의 골칫덩이였던 악성 재고 판매라는 일이 떨어졌다. 기한은 연말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사표를 쓰려고 했지만, 회사를 나가면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했다. 퇴직금을 받아도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십 년 넘은 내 고물차에 올랐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늦여름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도 없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악성 재고는 짧게는 일 년, 길게는 수년이 넘게 창고에 쌓여 있던 것들이었다. 어떤 건 고객의 요청으로, 또 어떤 건 우리 회사에서 실적을 맞추겠다고 알아서 만들어 두었던 재고였다.


넉 달이 넘게 쏘다녔지만, 실적은 목표를 밑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쉬웠을 때는 뭐든 다 들어줄 것 같던 고객들마저도 나를 잡상인 취급했다. 그나마 먼 길 왔다고 믹스 커피 한 잔이라도 내어 주는 고객에게는 인간적으로 고마울 정도였다.

만나주기는커녕, 배를 째고 잠적해 버린 거래처 때문에 목표 미달이 확정된 날. 금방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 같은 궂은 하늘을 보며 나는 직속 상사인 박진호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입사 동기였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잔뜩 풀 죽은 내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짜증 섞인 한숨이 먼저 들려왔다.


“왜? 또 안 팔린다는 소리를 할 건가?”

“······송구합니다.”

“송구하긴 뭐가 송구해? 이 과장 지금 야구 하나?”


박 부장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비꼬았다. 방금 그가 던진 조롱이 그와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 낄낄거리며 나눴던 농담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박 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 과장이 그 재고를 연말까지 다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 사업부 올해 실적이 미달 된다는 걸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

“대답해 봐! 몇 번이나 얘기했냐고!”


박 부장의 고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후우······. 스무 번 정도 하신 것 같습니다.”

“실적 달성이 안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고 했나?”

“······.”

“대답해!”

“연말 보너스가 반 토막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못 팔겠다는 소리가 나오나?”


나는 뺨에서 전화기를 떼고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아예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도 해보고, 일주일째 명성 공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예 출근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구매부와 개발부는 물론이고 사장이랑 전무한테도 하루에 수백 통씩 전화를 걸고 있는데도 아예 받지를 않습니다. 공장에 들어가 보려 했다가 경비한테 쫓겨난 게 어제로 열 번째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억울함이 밀려와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이미 보고드렸던 것처럼, 다른 고객들과는 재고 중에 80%는 이미 연내에 출하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실제로 그중에 반 정도는 출하됐고요. 그 정도면 이미······.”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켰다.

지금까지 처리한 재고만으로도 사업부의 올해 실적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사정을 안쓰럽게 생각했던 재무팀의 후배가 이미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업부의 연말 보너스와는 이미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애초에 악성재고를 다섯 달 남짓한 기간에 전량 판매하라는 것 자체가 현실성 없는 목표였다. 상무와 박 부장은 연말에 악성 재고를 완전히 털었다는 사실로 사장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진급을 위해.


“이미 뭐?”

“아닙니다.”

“말을 하다가 왜 끊어!”

“부장님.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명성에서 전화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는데, 저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와서인지, 왠지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던 박 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로야.”


신입사원 시절에 서로를 부르던 호칭이 박 부장의 입에서 나오자,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네가 좆뺑이치고 있는 거 내가 모르겠냐? 나도 다 안다.”


씨발. 다 안다는 새끼가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쪼아댄 거냐?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참아 눌렀다.

가식이 덕지덕지 묻은 친근한 말투가 오히려 더 내 울분을 자극하고 있었다.


“대로야.”

“네.”

“오늘 재고 때문에 상무님한테 불려 갔다 왔다.”

“······.”

“내가 어떻게든 커버 쳐보려고 했는데······ 손톱도 안 들어가더라. 정 상무 이 새끼, 보너스 때문에 완전 눈이 돌아갔어.”


뻔한 거짓말에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지만,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 상무가 그러더라. 재고 다 못 털면, 너한테 회사로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고 하라고. 후우······.”


지금 박 부장 입에서 나온 말이 정말 정 상무가 한 것인지, 아니면 박 부장의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식이 뚝뚝 떨어지는 박 부장의 한숨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만두겠습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

“야! 이대로!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뭔가 끊어졌던 머릿속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때려치운다고, 씨발새끼야. 왜 맨날 했던 말 또 시키고 지랄이야. 한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라. 그런 귓구녕으로 어떻게 부장까지 된 거냐? 병신같은게.”

“뭐, 뭐, 뭐! 야! 이대로, 이 개새······”


전화기 너머로 험악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뭔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려 버렸지만, 왠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5초도 지나지 않아 박 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전화기를 꺼버렸다.

아무리 입사 동기라고는 해도 직속 상관에게 마음껏 욕까지 퍼부어 버렸으니, 이제 정말 사표를 써야 할 상황.

앞날이 캄캄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시벌. 죽기야 하겠냐?


“후······.”


담배 두 대를 필터까지 피우고,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고물차에 시동을 걸었다. 덜덜거리는 핸들을 두 손으로 움켜 잡으니, 갑자기 눈물이 나려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엑셀을 밟았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올라탄 경부고속도로는 암울한 내 미래처럼 꽉 막혀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라디오를 켰다.

발랄한 여자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익! ···내일은 전국이 영하권에 머물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릴 눈으로 인해 중부지방에서는 23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응? 크리스마스?

최근 몇 년 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단어가 무척이나 생경하게 느껴졌다.

먼지가 뿌옇게 쌓인 창문 너머로 밖을 보자,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로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처럼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눈 쌓인 경부고속도로에 갇혀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꽉 막힌 고속도로는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다.

치솟는 짜증에 담배를 찾기 위해 조수석을 더듬다가, 아까 던져 놓았던 스마트폰이 손에 잡혔다.


순간, 어젯밤 여관에서 읽었던 웹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까지 읽었던 그 소설은 흔하디 흔한 직장인의 회귀물.

회사에서 실패한 중년의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과거 신입사원이었던 시절로 회귀해 승승장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사이다에 대리만족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판타지가 세상에 어디 있냐며 비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의 나에겐 그 소설의 내용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회귀를 하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재벌 집 셋째 아들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신입사원이었던 그 시절로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나는 기적을 다룬 헐리우드 영화도 많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기적이 내게도 한 번 일어난다면.


나는 기도했다.

제발 나를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때였다.

꺼져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이 환하게 빛났다.

눈이 타버릴 것 같은 섬광 앞에서도 나는 스마트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야만이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다.

정체 모를 휘광이 사방을 가득 메웠을 때.

뿌옇게 흐려진 내 시야에 중앙분리대를 넘어 나에게 돌진하는 덤프트럭이 들어왔다.

빌어먹을.


-꽈앙!

.

.

.

-푸드득!


꿩 한 마리가 갈대밭 위로 날아올랐다.


“흡!”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갈대밭에 엎드려 있었다. 손가락이라도 움찔거렸다가는 내 등판에 칼이 꽂힐 것 같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때, 갈대 사이로 누군가의 질책 섞인 목소리가 모깃소리처럼 앵앵거리며 들려왔다.


“삼백이십팔 호! 정신 똑바로 차려!”

“죄, 죄송합니다.”


비슷한 모깃소리였지만 삼백이십팔 호라 불린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극도의 낭패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낭패감을 넘어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는 분명 중국 영화나 홍콩 영화에서 들었던 중국인들의 말과 비슷했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서 배웠던 중국어와는 꽤 많이 달랐다.

그런데 왜 나는 저 말을 다 알아듣는 거지?


“매복 중에는 사지가 끊어져도 아무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벌써 잊었나!”

“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였지만, 꾸짖음을 들은 삼백이십팔 호의 대답은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첫 임무라 해서 실수가 용납되는 것이 아니다! 네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 임무에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어지는 잔소리에, 어째서 이들의 언어를 내 모국어처럼 잘 알아듣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흩어지며, 신입사원 시절에 사소한 실수로 선배에게 깨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삼백이십팔 호가 정강이가 까질 정도로 혼쭐이 날 것인지, 선배가 사주는 술을 얻어먹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왠지 목구멍 안쪽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갈대밭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주변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성질을 내던 목소리도,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삼백이십팔 호의 목소리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갈대밭 전체가 순식간에 고요 속으로 빠져든 느낌이었다.


-스윽. 스윽.


가을바람에 휩쓸리는 갈대 사이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무언가가 목덜미에서 시작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극도의 긴장감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리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혀끝을 살짝 깨물어 정신을 다잡은 나는 발걸음 소리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바닥을 짚고 있던 두 손을 움직여 슬그머니 포갰다.

양 소매 아래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또 한 번 전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을 때였다.


-척.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던 걸음 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휘이잉.


또 한 번 불어온 바람에 갈대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쥐새끼들이 숨어 있었군.”


무심한 목소리가 갈대밭에 흩어졌을 때.


“끄륵.”


삼백이십팔 호의 것이 분명한 침 넘기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오고.


-슈슈슈슈슉!


동시에 갈대밭 곳곳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연달아 쏟아졌다.

거무튀튀한 날을 가진 비도 수십 자루가 전방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며, 내 소매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러졌다. 갈대밭 사이를 빠져나가는 비도 두 자루를 보며, 나는 이 매끄러운 동작이 수천, 아니, 수만 번 이상의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경험을 토해 내 머릿속 깊은 곳에 각인된 조건 반사였다.


-슈슉!


곧이어 등 뒤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나는 또한번 자동적으로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았다.

펜싱 경기에서나 사용할 법한 가늘고 긴 검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 이게 말로만 들었던, 아니, 글로만 보았던 그 협봉검이구나 싶었다.

찰나간 살수들의 대표 병장기에 정신을 판 와중에 앞쪽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꽹과리 치듯 들려왔다.


-까강! 카강! 카가각!


새까만 흑의를 입은 수십 명이 갈대밭의 한 지점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커헉!”

“끄윽!”

“크륵!”


억눌린 비명과 함께 도미노처럼 허물어지는 흑의인들을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째서인지······ 나는 살수가 된 것 같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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