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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탱이
작품등록일 :
2024.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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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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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림인과의 조우

DUMMY

정월 초하루. 새해가 밝았다. 이 시기에는 가난한 화전민촌조차 작게나마 양식을 꾸려 잔치를 한다. 동생들과 만두를 빚고 떡국을 해 먹었다. 열네 살. 초조해지지 않기로 늘 다짐해보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역시 새해 첫 날인만큼, 누구나 그렇듯이 신년계획을 짜본다.


스스로 무공을 익혀나가는 동생들은 이미 삼류를 벗어난 지 오래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내공만 충분하면 일류에 도약해서 검기라도 쏟아낼 기세다.


동생들을 위해 그동안 발견해도 못본 척 지나쳤던 영초들을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 생각해보라. 기를 두른 괭이를 든 동생들이 늘려나갈 광활한 계단식 밭의 모습을. 이건 바른 투자다. 이 세계는 왜 무림인들이 농사나 건축같은 것을 안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끝내주는 효율이 아니던가. 일류고수가 보법을 밟으면서 기를 두른 괭이로 밭을 갈고, 검기로 벌목하고 목재를 다듬는다면, 일반인 장정 여럿이 며칠에 걸쳐할 일을 하루만에 해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안한다면 우리 공가에서 시작하면 되지. 동생들아 믿는다.


세계사 시간에 감자의 연작 위험을 배운 기억이 있다. 올해는 감자밭에 배추와 무를 심고, 새 경작지에 감자를 심어야겠다.


메주는 이미 만들었다. 곧 간장과 된장으로 나뉘어 항아리에 보관될 테고, 올해 농사의 핵심은 고추를 찾는 것이다. 화전촌때도 그렇고 마을에서도 그렇고 아직까지 고추를 본 적이 없다. 야생의 고추, 그 비슷한 것이라도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


언젠가 동생들에게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을 먹여주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는 공도유 십 사세. 이제 청소년이 된 가장이 되시겠다.


그리고 동생들에 일반상식들을 가르치는데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너무 어렸던 화전민촌 시절이 사회경험 전부인 동생들이 언젠가 하산한다면, 경제관념은 물론이고 사회질서, 공공예절 등 모든 부분에서 부족할 수 있다. 글이라도 꾸준히 가르친 게 다행이다.


그 일환으로 동생들에게 세뱃돈으로 철전을 한 냥씩 주면서 경제관념을 새겨주었다. 철전 한냥이면 당과를 열 개나 살 수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직접 마을에 내려갈 때, 쓸 수 있다는 말로 배움의 의욕을 올려준다.


지난 해 가을에 딱 한번 사다준 당과의 맛을 잊지 못하는 동생들에게는 물가의 기준을 잡기에 적절하다 생각했다. 앞으로 마을에 내려갈 때는 전보다는 더 적극적인 상행위를 할 생각이다. 그 때마다 돈을 모아서 상점같이 용돈을 줄 생각이다.


그리고 양민들의 생활구역, 저잣거리의 통념, 예법 정도를 추가적으로 가르쳤다. 관인이나 무림인을 상대하는 예법은 나도 모르기 때문에, 이참에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배워올 생각이다.


그 밖에도 할 일들이 은근히 많다. 넘쳐나갈 곳간으로 인해 옹기들을 훨씬 많이 만들어야 하고, 창고들도 또 한번 증축해야 한다. 이제 정말 작은 마을 수준에서의 세가 규모는 될 거 같다.


그리고 소금이 확보되었으니 단 것도 도전해보려고 한다. 양봉을 배워서 꿀을 얻는다거나, 조청을 만든다거나. 현실적으로 밥 지어먹기도 힘든 쌀로 조청을 만들긴 어려울테니 양봉쪽으로 가닥을 더 잡아뒀다.


그리고 수산물 확보. 이제 새나 육고기는 아쉽지 않다. 사육하는 것이나 사냥하는 것이나 규모가 꽤 크니까. 그래서 수산물이 아쉽다. 계곡 중간쯤을 넓히고 어디서 물고기라도 잡아와서 양식해볼까 한다. 뒤뜰을 넓히고 대나무 수로로 연못을 만들어도 되고.


어째 계획하고 보니까 절반 이상이 먹는 것에 대한 일이다.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 아무튼 나는 고추와 피망등의 생김새를 대충 그림으로 소화, 도하, 도구에게 알려주고 언제가 되었든 발견 즉시 제보하라고 당부했다.


신년 명절에는 꽤 오래 쉬기 때문에, 마을에는 나중에 내려가기로 하고 앞서 말한 영초를 찾아보러 오랜만에 약초꾼 일을 나선다.


워낙 돌 보듯이 하고 다녔기 때문일까. 막상 오랜만에 약초를 캐러 나오니, 몇 번씩 발견했던 영초들이 눈에 띄질 않는다. 하릴없이 중턱까지 내려와서 꼼꼼히 수색한다.


영초는 못 챙겼어도 제법 두툼한 버섯들과 약초들은 챙겼다. 이렇게 겨울 끝물에 나는 버섯들은 맛도 좋고, 약초들의 약성도 좋다. 조금 들뜬 마음으로 계속 약초를 찾던 중에, 칡덩굴에 반쯤 가려진 인영 둘이 보였다. 내가 저들을 보았듯이, 저들도 나를 본 것 같다. 그리고 내게는 절대 좋지 않은 발검소리가 ‘채앵~’하고 들려왔다.


“거기 누구십니까? 이 쪽은 무림인입니다. 양민이신 듯 한데, 부상을 입은 환자가 있으니 더는 접근하지 마시고 돌아가주셨으면 합니다.”


검을 든 사람은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내 앳된 모습과 행색에도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 옆에는 소화 정도 되는 나이의 여아가 누워있었는데, 부상이라도 당했는지 의식이 없어보였다.


자세히보니 검을 든 여인도 이곳저곳 옷이 피에 물든, 자상을 입은 것이 보였다. 부상당한 사람이었어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검이 내게 향하는 것을 보니 솔직히 쫄아버렸다.


“이 근방에 살고 있는 약초꾼입니다. 저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고, 엮이고 싶지 않으니 보내만 주신다면 뒤돌아서서 전력으로 뛰어 돌아가겠습니다.”


“약초꾼? 혹시 뱀에 물린 상처에 낫는 약을 아십니까?”


“뱀독은 제 각각 해독하는 약재가 다릅니다. 어떤 뱀인지 알고 계십니까?”


뱀독이고 자시고 그냥 냅다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튀다가 등 뒤로 칼이 날아올까봐 성실히 대답해줬다.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리니, 쓰러진 여아의 발치에 죽은 뱀의 시체가 보였다. 산공사였다.


“산공사로군요. 이 뱀은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위험이 되지 않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이 뱀독은 내공을 흩어지게 하는데, 일시적인 게 아니라 제 때에 치료하지 않는다면 단전까지 중독되어 폐인이 되거든요. 저도 아버지께 배운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요. 다행히 위험한 것과 달리 해독은 쉬운 편입니다. 다만 지금은 가진 약재가 없고, 집에 가서 빨리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보내주시겠습니까?”


여인은 아이를 해독할 수 있다는 내 말에 기쁜 표정을 짓다가 당장 약재가 없다하니 다시 어두운 낯빛이 되었다. 알기 쉬운 유형이다.


어쨌든 얌전히 보내만 준다면 진짜 돌아와서, 해독해줄 생각이다. 일단 우리는 경계태세를 유지한 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시가 급합니다. 뱀에 물리기 전에도 부상이 있었구요. 소협만 괜찮다면 같이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폐쇄적인 집안이기에 어른들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칼을 들고 있는 무림인인 그쪽을 알지 못하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무섭습니다. 그래도 보내주신다면 도망치지 않고 해독제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위급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어린 내게 존대를 유지하는 태도. 해독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강압하지 않는 점에서 나쁜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노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고, 큰어른이 나지만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가장 걱정하고 살던 일이 누군가에게도 삼정공가를 들키지 않는 것이니까.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만 무사히 해독시켜주신다면, 그 때 신분도 밝히고 사례도 하겠습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길어지는 것보다는 제가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저희 같은 양민에게는 무림인은 그저 무서운 존재니까요. 귀하께서 남루한 약초꾼인 저를 존중해주시는 태도로 보아, 나쁘신 분은 아니란 것을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림인을 가족이 있는 곳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제 목숨을 걸고 위협하신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류에 가까운 내공을 익히신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인 약초꾼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사파의 신분이시거나, 다른 비밀이 있더라도 결코 알려고 들지 않겠습니다. 저야말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부디 간청드립니다. 혹여나 소협께서 마음을 바꿔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아이가 죽습니다. 동행을 허락해주십시오."


진짜로 싫은데. 이렇게 쉽게 타인에게 노출하려고 거주지를 숨겨온 것이 아니다. 그냥 이판사판이다 생각하고 줄행랑이라도 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마음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의식을 차렸는지 아이가 겨우겨우 말을 꺼낸다.


”연 호위, 그만하면 됐어. 나 이제 지쳤어. 나는 내버려두고 연 호위라도 떠나서 자유롭게 새인생 살아.“


아이가 호흡이 가파보이는데도 힘있게 할 말은 다한다. 아마 진심으로 죽음을 각오한 것이리라. 우리 소화 나이 정도로 밖에 안되는 아이가 그런 다는 게 마음이 또 복잡해진다. 에라 모르겠다.


”제가 졌습니다. 따라오세요. 비슷한 또래의 여동생이 있습니다. 마음이 어렵네요. 다만 저희 집을 오신 것을 절대로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명문정파의 일원 같으신데, 맹세는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부터 달릴테니 잘 따라와주십시오.“


”맹세코 어떤 비밀이라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서둘러주십시오.“


연 호위라는 여인은 다시 의식을 잃은 아이를 안고도, 전력으로 뛰는 나를 쉽게 쫓아왔다. 역시 무림인. 한시라도 아끼고자 아무 말 없이 뛰었다. 초옥이 보이는 곳까지 뛰어와서 보니 옆으로나 뒤로나 연 호위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두리번 거리면서 다섯 보 정도 뒷걸음질 쳤더니 다시 옆에서 연 호위가 보였다. 깜짝 놀라 동공이 커진 나와 달리 연 호위는 침착해보였다.


”진법이 있었군요. 절정 경지인 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높은 수준의...“


”진법이요? 처음 듣습니다. 저나 제 가족들도 처음 이 곳에 올 때부터 그런 것은 못 느꼈는데요.“


”일단 나중에 설명드리고 잠시 소협의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소협과 접촉한 상태로는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치료가 끝나고 진법이라는 것도 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고 걸으니, 이번에는 연 호위가 사라지지 않고 제대로 같이 도착했다. 진법이란 게 진짜 있었나보다. 아무튼 아이를 마루에 눕히게 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서 비상약을 뒤졌다. 해독제에 필요한 재료가 워낙 흔한 약재들이라서 금방 찾았고, 바로 약탕기에 달였다. 인기척을 느낀 동생들과 도구가 뛰어왔다.


”동생들, 지금 질문이 많은 걸 알겠는데, 오라버니 손님이고 환자가 있어. 질문은 치료끝나고 할테니, 다시 각자 제 위치로 돌아가자.“


오자마자 축객령을 받은 동생들은 되묻지 않고, 도구까지 셋이 조용히 식량창고로 들어갔다.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려는 것 같다. 기특한 것들. 아무튼 오래 달일 필요도 없는 약이라, 바로 여아에게 마시게 했다. 이제 한 시진 정도 지나서 깨어나리라.


”깨어나려면 한 시진 정도는 걸릴테니, 그동안 연 호위님의 부상도 좀 보시죠. 약초꾼 집이라 집에 상비약이 제법 있습니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서 소독용 고약과 금창약을 가지고 나왔다. 이번에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솥에서 끓인 물을 바가지에 푸고, 마른 천까지 꺼내서 연 호위에게 다가갔다.


왠지 이 사람이랑 또 사양하겠네, 자긴 괜찮네, 실랑이할 것이 그려지는 게 꽤 피곤한 일이라 그냥 행동했다. 이미 엎어진 물인데, 부상자를 그냥 두는 게 더 마음이 불편했다.


”깨끗한 천입니다. 끓는 물로 닦아내고 상처에 이 고약을 먼저 바르시고 마지막에 금창약을 바르시면 됩니다.“


당황한 것인지, 미안한 것인지 여러 가지 심정이 섞여있는 얼굴로 그녀가 약들을 받아들였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더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사실 정말로 들키기 싫은 집 상황인데, 이미 물 건너 갔네요. 긴장했던 지라 너무 지치는데, 환자분이 깨어날 때까지 그냥 아무 말 없이 쉬기로 하죠.“


누워있는 여아를 사이에 두고 나는 벽에 기대서 눈을 감았고, 연 호위는 들리는 소리로 봐서 자기 상처를 돌보는 것 같았다. 아직 이른 오후. 왠지 오늘 하루는 꽤 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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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무림인과의 조우 +5 24.08.20 847 2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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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공도유 십삼 세 +5 24.08.19 1,116 2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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