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RESISTANCE)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드라마

새글

이우™
작품등록일 :
2024.09.11 16:05
최근연재일 :
2024.09.19 18:0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55
추천수 :
0
글자수 :
86,166

작성
24.09.11 18:00
조회
14
추천
0
글자
23쪽

바리케이드

DUMMY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빌딩 사이로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양 볼에 느껴지는 깃의 감촉은 거칠었지만 제법 따스하게 느껴졌다. 걸음을 재촉하며 고개를 돌렸다. 불꺼진 H&M의 쇼윈도는 거울처럼 도심을 비추고 있었다. 반대로 투영된 세계의 중심에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청년이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세상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존재.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존재. 숨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다시 세웠다. 이 깃마저 없으면 이 추위를, 나 자신의 비루함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갑자기 귓가에서 익숙한 포성이 들려왔다.

“글쎄, 별론데. 전위적이고자 노력하는 게 보이지만 너무 엉성해. 기교는 있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고나 할까.”

이건 한 저명한 미술 평론가가 나의 그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어렵게 연 전시회였다.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얼마나 많은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던가. 눈만 높았던 시절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갤러리가 내게 구원자처럼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갤러리 대표에게 감사는 물론 나를 받아준 것에 대해 송구함마저 느끼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관람객이 오면 기쁜 마음에 직접 나가 인사도 하고 작품 세계에 대한 설명도 했지만, 그때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놀랍게도 나의 전시를 만류했던 학부시절 전공 교수님과 동행을 했다. 아마 친분이 있는듯 싶었다.

“걱정이 되네. 되려 이것들이 앞으로 자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거야.”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개인전을 만류했다. 듣기 싫은 말이었다. 사실 그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확신뿐이었다. 작품들은 너무 멋지고, 화풍은 고유하며, 이 정도면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응원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갤러리와 모든 준비도 마치고 포스터는 물론 팸플릿까지 인쇄했건만, 교수님은 기운 빠지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첫 개인전을 열 거라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교수님은 나의 전시회에 찾아왔다. 직접 가져온 꽃바구니도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비록 전시회를 반대하긴 했지만 부족한 제자가 마음에 쓰이기는 했던 것 같다.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조급하기만 해서 안타까울 뿐이야.”

교수님은 동행자에게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 세계에서 인맥도 없고, 정도도 걷지 못했던 나는 그와 같은 권위를 지닌 사람의 찬사를 내심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행자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동행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내뱉었다.

“전체적으로 엉성하고 자신만의 색깔도 느껴지지 않아.”

짧막한 비평은 내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하단 말인가.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인데 전화 한번 해보지.”

교수님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위이잉.”

진동과 함께 전화가 울렸지만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 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채 갤러리를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무작정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낸 그간의 여정이, 그것을 한데 모은 전시가 별 볼 일 없다는 걸 권위자들은 알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갤러리를 나지막이 울리던 그들의 대화는 며칠이 지났음에도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남은 전시회의 일정에서도, 거닐던 길가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작업실에 멍하니 있을 때도, 잠자리에서도 울려 퍼졌다. 마치 포탄처럼 나의 온 세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내 전부나 마찬가지인 그림들이었다. 화폭에 담긴 주제와 감정은 고유하다고 여겼다. 담겨 있는 관념도 표현도 기법도 세련됐다고 자부했다. 작품들이 온전한 나의 환원이라고까지 여겼다. 이것들을 세상에 야심차게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회에서 박수갈채와 더불어 찬사를 받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남겨진 것은 그들의 메아리뿐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든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뿐이네.”

교수님을 만났던 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그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시회는 갤러리에서 비용을 지불한 3류 언론사에서만 다뤄졌고, 방문한 사람들도 지인과 동기들이 고작이었다.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전시회측에서는 작품이 팔린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자며 팔렸다는 의미의 빨간 스티커를 몇 작품에 붙였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작품은 단 한 점만이 팔렸다. 갤러리측에서는 전시회 비용도 회수하지 못한 장사였다. 나를 믿어준 대표에게 송구할 따름이었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나고 말았다.

홀로 남겨진 집에 있을 용기가 없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향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저녁에는 엄마가 해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이튿날에는 눈도 뜨기 싫었다. 엄마는 아침을 먹자고 깨웠지만 더 자고 싶다며 이불을 덮어썼다. 졸린 건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신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어느새 부쩍 늙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렀지.

“인마, 이제 너도 곧 서른인데 남들처럼 사내 구실 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언제쯤 철이 들는지···.”

아버지는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좀 끄세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음성은 나를 괴롭히던 메아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다시금 아려왔다. 서른이면 마땅히 해야 하는 사내 구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 나이에는 슬슬 결혼도 해야 했고, 집도 마련해야 했으며, 번듯한 직장도 있어야 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준이기도, 세상의 잣대이기도 했다. 과연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 것일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건 나의 운명일까, 아니면 아집일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평론가의, 아버지의, 세상의 잣대에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것이란 걸 알았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스물아홉의 무명 화가, 아니 그저 화가 지망생. 다시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세웠지만 더 이상 세울 것도 없어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어느새 약속 장소인 번화가에 도착했다. 시선을 반쯤 가린 코트 깃은 마치 바리케이드처럼 느껴졌다. 나는 방벽을 세운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란스레 번쩍이는 네온사인,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따뜻한 사랑의 노래들,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낯선 여인들, 술집 앞에 모여 화기애애한 웃음을 나누는 사람들. 모두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내게 현실인 건 세상을 부정하기 위해 세운 바리케이드와 그 안에 숨은 나 자신뿐이었다.

잠시 후 방벽 너머로 목적지가 보였다.

수형이의 전화를 받은 건 이 주 전이었다. 오랜만에 들어간 페이스북에는 알람이 떠 있었다. 주로 인스타그램만 하다 보니 페이스북은 들어오는 일이 없었는데 우연히 즐겨찾기에 있던 페이스북을 누르게 되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수형이가 일주일 전에 보낸 쪽지였다. 그는 오랜만에 연락을 하고 싶다고 번호를 물어봤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번호를 알려주었다.

“이번에 다들 모이기로 했어. 너도 좀 나와라. 우리도 이제 곧 서른인데 얼굴 한번 봐야지!”

그는 ‘우리도 곧 서른’이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하며 동창회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번호도 바꾸고, 페이스북도 잘 하지 않다 보니 동창들과 자연스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시작하게 된 인스타그램도 주로 작가명으로 작품을 올리는 용도로만 사용했고 개인 계정은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동창들과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친목 모임은 꿈도 없는 이들이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그런 모임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피를 하고 싶었다. 술에 잔뜩 취하고, 농담 하나에 실컷 웃어대며 현실을 망각해 보고 싶었다. 무언가에라도 위안을 받고 싶었다.

“기윤아! 진짜 오랜만이다!”

술집 입구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형이였다. 나 역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곤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나를 와락 안았다. 나는 악수를 하기 위해 허공에 뻗었던 손을 천천히 그의 등에 갖다 댔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너는?”

“나야 뭐. 왜 나와 있어?”

“잠깐 담배 한 대 피우려고 나왔지.”

우리는 함께 담뱃불을 붙였다.

“요샌 뭐 하고?"

그가 공중에 연기를 흩뿌리며 물었다.

“나? 그림 그려.”

“그림? 화가야 그럼?”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나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너는 뭐 하는데?”

“대학교 졸업한 뒤로 쭉 직장 다니지. 결혼도 했고.”

“진짜? 청첩장은 보내주지.”

“야, 여기저기 물어봤는데도 너한테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지.”

“이번처럼 페이스북으로 연락했으면 됐을 텐데.”

“내가 SNS를 잘 안 하잖아. 뭐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봤으니 됐다.”

“그래, 이렇게라도 본 게 어디야. 오랜만에 보니 너무 좋다.”

“참, 나 이번에 애 아빠 됐어.”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담배를 입에 물곤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배경화면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아기의 사진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 이름이 지유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지유. 이름도 예쁘네. 근데 신기하다, 네가 아빠라니.”

“어쩌다 보니 유부남에 애 아빠다. 근데 너도 신기하다.”

그가 담배를 끄며 말했다.

“뭐가?”

“누가 요새 이렇게 깃을 세우고 다니냐.”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리곤 술집의 문을 열었다.

이미 열 명 남짓한 친구들이 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수형이와 함께 테이블 끝에 마주 앉았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술자리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추억에 한참이나 열을 올렸다. 이야기 속에 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몇 번이나 건배를 했고 술잔을 비워냈다. 그래, 잊고 즐기자. 계속해서 술잔이 채워졌고 웃음이 흘러 넘쳤다. 비장하게 세웠던 바리케이드는 옷걸이에 걸어둔 지 오래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었다. 과거를 맴돌던 이야기는 어느새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수형이의 와이프는 벌써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동건이는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이번에는 청약도 당첨됐다고 했다. 일찍이 증권사에 취직했던 석이는 높은 연봉을 받고 코인 거래소로 이직을 했다고 했다. 규영이는 사업가가 되어 많은 직원을 거느리는 사장의 고충을 토로했다. 또 다른 친구들도 자신들의 현실적인 고충을 술잔을 비우며 이야기했다.

갑자기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곧 서른을 앞둔 남자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오갔다. 연애와 결혼, 주택 청약과 내집 마련, 주식과 비트코인, 불가피한 대출과 이제 남은 삶을 은행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슬픈 예언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에도 공감할 수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기윤아, 너는 요새 뭐 하는데?”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석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지금껏 친구들처럼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명함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물론 돈을 벌긴 했다. 지금은 입시 미술학원에서 시간제 강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화방에서 알바로 유명 화가들의 주문에 맞춰 캔버스를 만드는 일도 병행하고 있었다. 잠시 휴학을 하고 일 년 동안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고, 시급이 센 야간 상하차 알바도 자주 했었다. 그렇게 돈을 벌어 한 것이라곤 배낭 하나와 함께 낯선 세상을 여행한 것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독할 정도로 떠돌아다녔다. 이런 삶에도 목적이 존재했으니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를 움직인 건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과 창작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우정과 사랑은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야심차게 도달할 것만 같았던 꿈은 점점 아득하게만 느껴졌고, 모든 확신과 자존감은 점차 고갈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오늘의 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하는 일로 나를 규정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화가로도 나를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

“기윤이 화가잖아. 요새 그림 그린대.”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수형이가 큰 소리로 답했다.

“우와,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기윤이가 그림을 그리다니.”

“언제 나 한번 그려줘라.”

“와, 그거 하면 누드 모델도 그리고 그러지 않냐? 크, 역시 사람은 예술을 해야 돼.”

친구들이 그림에 대해, 예술에 대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입가에 맴돌았던 웃음이 하나도 남김없이 증발했다.

“무슨 그림 그리는데?”

규영이가 물었다.

올 것이 왔다. 주제, 화풍, 표현 기법 그 어느 것 하나 좀처럼 이야기로 풀어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타이틀도 무언의 언어였다. 세상은 각주가 전부라고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나름대로 나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품의 이야기를 언어로 정제해 주었다. 나는 전시 내내 그걸 앵무새처럼 관람객들 앞에서 떠들어댔다.

“저는 무언의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우리 청춘들은 기성 세대들에게는 좀처럼 납득될 수 없는 꿈과 고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각 그림마다 인물의 신체 일부가 하나씩 없는 건 청춘의 좌절을 나타내요. 반면 이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날갯짓을 하고, 춤을 추고 있는 건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꿈을 상징하고 있어요.”

이걸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고? 전시장에서 앵무새처럼 떠들던 이야기를 이곳에서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정적이 맴돌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침묵하면 분위기를 깨는 한심한 놈이 될 것이었다.

“나와 세상을 그려.”

그래도 이 자리에 머물고 싶어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다.

“뭐라고?”

규영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와 세상이래.”

동건이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세상···.”

“아, 난해한데.”

“어렵네 예술이란 거.”

친구들이 시선을 나누며 머리를 긁적였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딱 들으면 알겠는데, 너희들이 예술을 몰라서 그래!”

수형이가 너스레를 떨자 테이블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세상 살아가는 자신의 고충을 넋두리하듯 늘어놓으며 웃음을 자아낼 수 없는 것일까. 왜 공감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일까. 나의 한마디는 마치 낯선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에게 불편함만 안겨주고 말았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진중함이 아니라, 수형이의 익살처럼 밝고 유쾌한 것들이었다. 유머와 재치였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것들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근데 기윤아 항상 궁금했던 건데 화가는 뭐 먹고살아?”

“맞아. 우리처럼 어디에 취업한 것도 아니고, 그림을 파는 건가?”

동건이가 묻자 석이도 옆에서 거들었다. 옆에 앉은 친구들도 눈을 껌뻑이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그림이 종종 팔리기도 하는데, 그려서 먹고 산다기보단 그리기 위해 살아가는 거지.”

나는 대답하며 무의식적으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화가의 삶도 쉽지 않겠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보다 힘들어 보이는걸.”

“나는 고정적인 월급 안 나오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던데.”

그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갤 끄덕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지 않아?”

“웹툰 같은 거 그려보는 건 어때? 요새 기안84 보면 인기도 많고 잘나가더라.”

늘 그랬다. 무언가가 되지 못해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더 불안해하는 건 언제나 주변인들이었다. 교수님도 그랬고, 아버지도, 나를 둘러싼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나의 꿈과 희망을 절박하게 외쳐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함부로 말하기가 두려웠다. 언젠가부터 갈망하는 내가 되지 못할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이 세상 나만 빼고 모두들 서른이 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낙오자이자 부적응자였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나도 기윤이처럼 살고 싶다. 걔 보니까 그동안 팔자 좋게 해외여행만 다녔더만.”

반쯤 열린 화장실 문 틈새로 누군가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니까, 페이스북에 사진 잔뜩 있더라. 나도 여행하고 그림만 그리며 살았으면 좋겠네.”

“왜, 너도 ‘나와 세상’을 그리게?”

“미쳤냐, 팔릴 그림을 그려야지. 큰 붓으로 큰 캔버스에 선 하나 찍 긋고 제목만 멋지게 짓는 거지. 우리의 시간들, 아니면 공허의 세계. 크, 이정도면 벌써 비싸게 팔릴 각 나오지 않냐.”

“그래, 나와 세상보다는 좀 낫다.”

소변기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싫었다. 코트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수형이의 물음에는 담배를 피우러 간다고 했다. 문을 닫고 나오자 술집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래, 여긴 내가 없어도 상관없는 자리였다.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다시 코트 깃을 세웠다. 굳게 세운 건 마지막 남은 내 알량한 자존심인지도 몰랐다. 이 안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직 자격지심만이 낡은 깡통처럼 굴러다닐 뿐이었다.

“뭐야, 인사도 없이 벌써 가는 거야?”

돌아보니 수형이였다.

“응, 내일 할 일도 있고, 일찍 일어나야 되거든.”

나는 거짓으로 둘러댔다.

“아쉽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갈 땐 가더라도 담배나 같이 피우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공중에 연기를 흩뿌렸다.

“그나저나 너 민재 기억나?”

그가 침묵을 깨며 담배 연기와 함께 말했다.

“누구?”

나는 재를 툭툭 털어내며 무심한 듯 물었다.

“왜, 민재 있잖아. 고등학교 때 너랑 제일 친했으면서, 벌써 잊은 거야? 하긴 시간이 이렇게 흘렀으니···.”

그는 고갤 갸우뚱하며 말했다.

나는 담배를 빨려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뭐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만, 문득 널 보는데 민재가 떠오르더라고. 하긴 너무 오래 지나긴 했지···.”

수형이는 말을 이었지만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앗, 뜨거워!”

잠시 동안 멍하니 있던 나는 갑자기 손가락에 뜨거움을 느끼곤 화들짝 놀라 담배를 놓쳐버렸다. 그 사이 담뱃불이 타들어 갔던 것이다.

“야, 괜찮아?”

그는 다소 놀란 듯 걱정 어린 눈으로 말했다.

“응. 얼른 가봐야겠다.”

나는 어딘가에 정신이 홀린 듯 말했다.

“그래. 이제 연락 좀 하고 지내자.”

그는 의아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곤 걸음을 재촉했다. 어지러웠다.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어째서였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동창회를 기다리며 느꼈던 설렘은 어쩌면 민재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그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본능처럼 정류장으로 향해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노선도를 보니 목적지까지 열여섯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정거장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근원지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허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곳을 벗어난 지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의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간의 시간들이 그저 부끄럽게만 여겨졌다. 차창 밖으로 명월 고등학교가 보였다. 버저를 눌렀다.

정류장에 서서 학교를 바라봤다. 갑자기 목 언저리에서 교복 넥타이의 은은한 조임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목을 매만졌다. 하지만 풀어헤칠 넥타이가 없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교문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주위를 살피고 풀숲을 헤쳐 담장 앞에 섰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손을 비비곤 풀쩍 담을 넘었다. 목에 느껴지던 압박감이 한결 나아졌다.

각 교실에서는 생기 없는 형광등의 하얀 불빛이 밤공기를 맥없이 물들이고 있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예비 수험생들은 내년에나 있을 자신들의 차례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이제 야간 자율학습이 의무가 아닌 자율이 되었다고 했지만 지금의 모습도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맥 빠지는 것들 속에 그가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서둘러 학교로 잠입했다.

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다목적 교실이 있는 본관 4층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계단을 재빠르게 올라갔다. 떨려서일까, 단숨에 계단을 올랐던 탓일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깊은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복도 저 끝에서 희미하게 황금빛 물체가 보였다. 나는 마치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가까이서 올려다본 황금빛 현판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어둠에 잠긴 명예의 전당은 십 년 전 그대로였다. 다만 어딘가 오래된 책처럼 퀴퀴한 냄새가 났다.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켤까 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라이트 버튼을 눌렀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액자에는 누군가의 초상이 담겨 있었다. 이곳이 명예의 전당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사진 속의 인물들 때문이었다. 학교를 빛낸 영웅들! 얼마나 많은 신입생들이 이들을 우러러보았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영웅이 아니었다.

서둘러 유리 진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반에는 영웅들의 전리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트로피부터 메달, 상장, 신문 기사 그리고 기념사진들까지. 여느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유물들 틈에서 레지스탕스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이 얇은 시집은 세상에서 소멸해 가는 것처럼 색이 바랬고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유리장을 열어 조심스레 책을 꺼냈다. 전당 한구석에 기대앉아 입김을 불어 표지에 들러붙은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책장을 펼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레지스탕스(RESISTANCE)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를 시작하며 24.09.12 6 0 -
9 가을 밤의 멜로디 NEW 22분 전 0 0 26쪽
8 손에 쥔 코르크 24.09.18 3 0 28쪽
7 상처 깊은 밤 24.09.17 4 0 20쪽
6 심연의 우물 24.09.16 5 0 14쪽
5 불온사상 24.09.15 7 0 16쪽
4 데미안 24.09.14 6 0 21쪽
3 전학생 24.09.13 8 0 20쪽
2 인정의 결핍 24.09.12 8 0 20쪽
» 바리케이드 24.09.11 15 0 2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