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149)
란툰반도의 마법사가 긴장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얼간이가 이 주변에 있는 모양입니다.”
당황한 이사벨 여제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다빈치 박사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들켰다고 보기는 이릅니다, 폐하. 그 얼간이는 고작..."
여제가 신경질적으로 속삭였다.
"그 자가 이 주변에 있다면서? 아직 들키지는 않았다 해도 조만간 들킬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냐?"
마지막 소대가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이사벨은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푸른빛의 지팡이를 든 자코모 다빈치가 그녀를 따라 걸어오며 말했다.
"무엇을 하실 겁니까, 폐하?"
"선제공격을 가하겠다."
여제가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미로정원은 곧장 아스틴 황궁 본 건물로 이어진다. 알현실은 물론이요 짐의 집무실과 처소가 거기에 있다. 그곳을 기습 점거한 다음 반란자들과 총격전을 벌일 것이다."
"막대한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폐하."
란툰반도의 마법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여제가 신경질을 냈다.
"짐이 여인이라고 나약하게 보는 게냐. 짐은 여러 장군들에게 전술과 전략을 배운 몸이다. 설령 적에게 들킨다 해도 궁전을 엄폐물로 삼는다면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어. 추기경이 헌병군을 이끌고 궁전으로 진입할 때까지 버틴다면..."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폐하."
다빈치의 말투가 급해졌다.
"놈은 지금 그 궁전으로 들어왔단 말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총사대를 이끌고 그곳을 접수하려 하신다면 정면충돌이 불가피합니다. 즉, 그 안은 생지옥이 될 거다 이 말씀입니다."
"짐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디에네 황녀 마마가 그 안에 있습니다."
다빈치가 얼른 내뱉었다. 여제가 일순간 침묵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대가 그것까지 어떻게..."
마법사가 설명했다.
"사실 저같은 란툰반도의 성마법사들은 보통의 사물을 탐색할 수 없지요. 하지만 다른 마법사가 주변에 있다면 다릅니다. 이것은 마법과학적으로 아주 드문 천리안 현상입니다만 방금 전 신께서 도우신 덕택에 무언가를 보았는데..."
"시간이 없다, 본론만 말해라!"
여제가 성을 냈다. 다빈치가 언성을 높여 딱부러지게 말했다.
"얼간이 딕이 용케 숨어 계시던 디에네 마마를 잡았습니다. 지금 궁전을 공격한다면 디에네 마마는 십중팔구 돌아가십니다. 아군, 혹은 적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지시거나, 놈이 절박한 심정으로 휘두르는 흑마법에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릴 것이다, 이말입니다."
여제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서 손을 땠다. 미로정원 위로 오른 총사대원들이 밑을 내려보고 있었다.
이사벨은 잠시 다빈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떡하면 되겠느냐."
다빈치가 조용히 말했다.
"제게 두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마마께서 무엇을 우선에 두고 계신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둠 속의 다빈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는 마마께서 원하셨던대로 이를 기회로 삼아 놈들을 궁전 안에서 몰살시키는 겁니다. 아무리 제가 사람을 고치는 의사라 해도, 얼간이 딕의 휘하에 있는 놈들이라면 핏덩이로 만들어버릴 방법들을 많이 알고 있지요. 다만 그렇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칠 겁니다. 물론 마마의 안전은 제가 책임질 수 있지만 말입니다."
이사벨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다빈치가 말을 이었다.
"또 다른 선택은 일종의 모험이자 사냥이지요. 제가 그 자를 증오하는 것처럼, 그 자도 저를 증오합니다. 제가 만약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얼간이는 필시 저를 따라붙을 겁니다. 이는 결코 명예로운 결투도, 자존심이 달린 대결도 아닌, 무지막지한 복수극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즉 그 놈은 저를 없애기 위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상당수의 빌랜드 마법사단들도 동원할 거란 말이지요."
다빈치가 웃어보였다. 이사벨 여제는 심장이 멎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대는 짐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 그대를 위험에 빠트린단 말이냐.”
마법사는 태연했다.
"폐하께서는 그때를 노려 궁전을 기습하시는 겁니다. 주스티안 데 모리체와 주안 스피놀라를 체포하고, 디에네 마마를 구하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제 목숨은 물론이고 마마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으니 훨씬 위험한 도박이 됩니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딜레마에 빠진 여제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 선택은 폐하의 몫입니다. 요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지요. 옥좌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디에네 마마를 바라십니까."
딜레마에 빠진 이사벨이 벽에 등을 기댔다.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취할 것인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을 여제는 도저히 단번에 내릴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듯, 통로 위로 드러난 밤 하늘을 올려보며 처량히 중얼거렸다.
"오 미 디오스(오, 신이시여)."
* * *
머스킷총을 든 안젤라 노스트윈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침실이었다. 마호가니 가구들과 도자기들,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벽과, 벽에 걸린 풍경화, 인물화들이 샹들리에 촛불에 빛났다.
'이곳이 스페냐드들의 황제가 살던 처소라고?'
안젤라는 냉소를 흘렸다. 그녀는 벨린 데 란테가 이 방의 주인을 모셨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몇 시간 전 벨린과 첫 번째 전투를 치렀을 때 가슴에 은빛 휘장을 달았던 이 방의 주인을 본 기억도 있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벨린을 쳐다보던 그 총사복장의 여자는 황족의 피를 물려받은 이만이 발산할 수 있는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 주인을 떠나보내고 나를 죽이려 할 정도로 녀석의 복수심은 굉장했던 모양이군.’
안젤라는 벨린 데 란테의 복수심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슬슬 실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복수심과 비례하여 이율배반적인 연민의 감정도 한쪽 뇌리를 잠식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안젤라의 눈앞에 서 있는 보디스와 치마 차림의 젊은 갈색머리 여인에게서 증명되는 것이었다. 벨린 데 란테의 여종은 분명 안젤라를 쌍둥이처럼 닮았고 이거야말로 그 갈색머리 총사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혹은,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거나.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고? 천만에. 차라리 착한 안젤라와 나쁜 안젤라로 구분 짓고 있다면 모를까. 그래, 그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현실상에서는 도저히 나쁜 안젤라를 사랑할 수 없으니 착한 안젤라를 만들어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불쌍한 쪽은 저 여자 노예뿐이겠군. 그렇게 결론에 도달하자 안젤라 노스트윈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더구나 이제는 그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여자를 사로잡았으니, 얼마든지 그를 궁지에 몰 수 있었다.
벨린 데 란테는 배에 총검을 꽂아 넣는 따위의 부상으로 굴복할 자가 아니었다. 안젤라는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흑마법으로 주변을 탐색해 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고, 자신들의 황녀를 지키기 위해 애쓰던 가련한 자들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레드코트들은 디에네 제2황녀를 지키던 자들을 벽에 일렬로 붙여놓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모두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벨린 데 란테의 여종은 왼팔에 총상을 입었고, 황녀를 호위하던 기병대원은 허벅지에, 키가 크고 덩치가 큰 거인 총사대원은 몸의 이곳저곳이 총검에 찔려 피를 흘렸다. 가장 상태가 나쁜 이는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두르고 있던 금발머리 총사였다. 그는 황녀의 도주를 도우려고 문을 열자마자 레드코트들의 표적이 되어 다리에 총을 맞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서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디에네 황녀는 한곳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애당초 그녀는 정신이 나가 있던 게 분명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검을 든 올리버가 안젤라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2명이 죽고, 11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안젤라는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올리버가 질문했다.
“저들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저들이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관심 없어.”
안젤라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들이 우리 병사들을 죽였는데요?”
올리버가 우려하는 어조로 물었다. 응당한 복수를 해야 하지 않냐는 투였다. 안젤라는 굽히지 않았다.
“관심 없다니까. 저 계집애만 있으면 돼.”
안젤라가 데 란테의 여종을 쳐다보며 흡족하게 미소를 지을 즈음이었다. 문가에서 두 발을 모아 경례하는 소리가 났다. 비어든 박사와 주스티안 데 모리체, 스피놀라 중령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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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서는 마법사들끼리 치고받을 듯 합니다. 배때기에 총검이 박힌 벨간지께서도 나타날 듯. 다크 홀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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