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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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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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52)

DUMMY

추기경이 총사대 대위를 내려보았다. 짧은 수염에 가려진 그의 입술이 비쩍 말라 무언가 말이 나오길 갈구하고 있었으나, 그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 기미를 눈치 챈 벨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얼마 동안 누워 있었던 거지?"

리베라 추기경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알기론 2시간은 넘었지. 자네는 산 마르틴가 구석의 골목에 쓰러져 있었고."

헌병군 장교들이 벨린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붕대로 감은 배를 움켜잡고 킥킥 웃었다.

"당신들이 거리에다 12파운드포를 쐈나?"

추기경이 대답대신 고개를 위로 들어 그들 앞에 있는 대리석 건물을 가리켰다. 총사대 대위 또한 통증을 이겨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대리석 건물의 지붕 부분에 각인된 히스파니아어를 읽었다.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였다.

건물을 아우르는 곳곳에는 부서진 대포와 포탄에 맞아 파괴된 건물 파편 따위가 널부러져 있었다. 불길이 치솟아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으며, 시체들과 그 시체들이 흘린 피웅덩이와 부상자의 비명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추기경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막 산 마르틴가를 점령했다. 주스티안 데 모리체 휘하의 동방회사군은 아스틴 궁전으로 후퇴했지."

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헌병군들이 그를 둘러싸고 수근거렸다. 그들은 저 총사대 장교가 악착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추기경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쉽지 않은 전투였네. 놈들을 기습한 덕택에 승리를 얻었지만, 우리의 피해도 막대해. 여하튼 중앙은행과 동방회사 본사에 있는 은괴를 확보했으니 놈에게 강탈당한 제국의 자산을 도로 되찾은 거나 다름없어. 그 놈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지."

헌병군들의 부축을 뿌리치며 벨린 데 란테가 드디어 일어났다. 그는 잠시 통증을 이기려고 애쓰며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헉헉거렸다.

벨린이 숨을 고르며 대꾸했다.

"당신은 여전히 바보로군. 겨우 은 따위에 만족하다니. 당신이 이번 전투에서 실패하면 제국은 다신 히스파니아인 황제를 바랄 수 없을 거야. 정녕 그것을 바랬던 건가, 추기경 각하?"

추기경이 고개를 숙였다.

"깊이 반성하고 있네. 성직자로서,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용납 받지 못할 짓을 했어.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은화 30닢을 받았지만 내게 기다렸던 것은 망신과 죽음뿐이었지. 그건 그렇고."

리베라 추기경이 물었다.

"자네가 모시던 폐하는 어디 계신 건가? 어쩌다 자네 혼자 동떨어져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됐던 거지?"

벨린은 대답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리본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카락이 산발로 흩어졌다.

벨린이 멀뚱히 서 있기만 한 헌병군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궁전을 공격해야 해.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늦어."

벨린이 손가락으로 광장 방향을 가르키자 어느 헌병군 대위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동방회사군은 아스틴 광장으로 도주했소. 그곳에는 반란자들이 모은 동방회사군과 그들을 지원나온 빌랜드군이 수비진을 구축하고 있다오. 우리는 지금 저들을 섬멸하기 위해 대포를 끌어모으고 있소."

벨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대위가 침착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북쪽에서 당신들의 펠리페 총사연대가 회군중이오. 그들이 내일 오전까지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벨린 데 란테가 진노하여 몰아 붙였다.

"그건 승리가 아냐!"

헌병군 대위가 말을 멈추었다. 순간 벨린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나는 느낄 수 있어. 폐하께서 저기에 계시다는 걸! 만약 폐하께서 서거하신다면 우리의 영광스런 제국은 그날로 끝장나겠지!"

헌병군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순간 전쟁 혹은 다른 이유로 광포화한 눈동자와 대면했고 그것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벨린도 스스로 입을 벌렸다. 어느 상황에서도 냉철히 판단하던 그의 이성이 몇 분간의 복수혈전에 어떻게 타락해버렸는지 그 스스로도 깨달은 거였다.

그때였다. 깃털달린 모자를 쓴 헌병군 전령이 말을 타고 다가와서는 리베라 추기경에게 전갈을 주었다. 그의 부관이 대신 받으려고 하였지만 추기경은 그 전갈을 빼앗아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전갈을 다 읽은 추기경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가 벨린 데 란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자의 말이 옳아."

추기경이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산 호라티오 요새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는군. 단 한명에 마법사에 의해. 사악한 마법으로."

벨린이 추기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당신 설마 그곳에 그걸 숨겼었나?"

추기경이 한숨을 쉬며 실토했다.

"크라우네 데 엠페라도가 거기에 있었다네. 누군가 그것을 알고 가져갔어. 무참한 살육만 남겨놓고.“

“그것이 보통의 관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알 텐데.”

벨린이 침착함을 되찾으며 또박 또박 말했다. 추기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고, 모든 이들이 눈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깨닫자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광장을 공격한다. 이사벨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페하 만세!”

심각성을 깨달은 헌병군 장교들이 사방으로 뛰어가 명령을 전파했다. 그들이 나팔을 불고 드럼을 두드리며 병사들을 대열로 모으는 사이, 벨린은 바닥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머스킷총을 한 정 주웠다.

추기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몸으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벨린이 머스킷총의 점화장치를 털어내고 약실을 비우며 대꾸했다.

“당신들을 믿을 수 없어. 또한 당신들의 신념도 믿을 수 없지. 비록 몸은 이렇지만 나는 당신들보다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어.”

벨린 데 란테가 자신의 탄약가방을 개봉하고 탄약을 하나 꺼냈다. 리베라 추기경은 그 갈색머리 총사가 탄약포를 입으로 뜯어 총구에 붓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의아해했다. 그가 보통의 흑색화약이 아닌 붉은 빛이 감도는 모래처럼 고운 입자를 총구에 부었던 것이었다.

추기경이 흥분했다. 성직자인 그는 그 붉은 빛이 감도는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며 뿌린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었다. 저것이 제대로 응집되기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벨린이 격발장치의 장전을 끝내고 총을 들었다. 그가 이를 번뜩이며 사악하게 웃어보였다.

“복수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거지. 나는 이미 기회를 한번 놓쳤어. 두 번 이상 놓치고 싶지 않군.”

벨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망령이 무고한 자들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추기경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벨린 데 란테가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추기경은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는 그저 총사대 대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은 채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볼 뿐이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추기경에 명령에 따라 산 마르틴가를 접수한 헌병군들이 집결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반란군과 그 반란을 지원한 빌랜드 레드코트들이 바리케이드를 친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될 터였다. 양측의 군세는 엇비슷했고 군세가 비슷하면 공격 측이 불리하기 마련이었지만 헌병군은 이미 상당수의 대포를 끌어 모아 광장과 연결되는 시가지 끝에 배치한 상태였다.

벨린 데 란테는 광장과 바로 이어지는 어느 건물에 숨어 그들의 대포가 불을 뿜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곳에 방열되어 있던 헌병군의 대포들이 아스틴 광장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포성이 울림과 동시에 포탄이 파쇄음과 함께 광장의 포장재를 깨트리고 튀어올랐다. 그 대포들의 일제사격이 일으킨 파편과 먼지 때문에 일순간 바리케이드에 숨은 동방회사 반란군과 빌랜드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벨린은 창가로 그 전투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 굴레에 연루된 모든 이들이 저 궁전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육감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가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저 반란군들이 타격을 입어야 했다. 놈들의 빈틈을 발견하여 몸에 박힌 칼을 비틀듯 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일격이 장전된 머스킷총을 조심스레 어깨에 붙였다.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헌병군들이 먼지를 헤치고 함성을 지르며 어둠 속에서 뛰어 들어왔다. 이른바 총검 돌격이었다.

총검 돌격 앞에는 항상 무자비한 일제사격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었다. 헌병군들이 돌격하는 사이 먼지가 걷히면서 동방회사군과 붉은 제복차림의 빌랜드군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군기를 직각으로 세움과 동시에 머스킷총을 겨누고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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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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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베나레스의 총사(149) +23 08.12.18 2,729 12 9쪽
151 베나레스의 총사(148) +17 08.12.15 2,582 10 9쪽
150 베나레스의 총사(147) +24 08.12.12 2,708 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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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베나레스의 총사(146) +19 08.12.12 2,792 1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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