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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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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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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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66)

DUMMY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드넓은 카탈루니아의 푸른 평야에 주둔해 있던 양측 군대는 새벽녘이 되자 잠에서 깨었다. 전투준비를 의미하는 나팔소리가 고요하고 차가운 아침 공기를 호전적이게 일깨웠다. 하얀 천막들이 모여 있는 진지에는 활력이 돋았고 군악대는 드럼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사기를 일깨울 군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군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벨린 데 란테는 천막 밖에 펼친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끝냈다. 비록 그는 대대장의 견장을 달고 있었지만 결코 고급장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사총해 놓았던 바인 베스 머스킷총을 들고, 다른 총사들처럼 머스킷총의 부싯돌과 플린트 팬을 새로 갈았다.

또한 그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다, 소년시절부터 가지고 다니던 오래 된 탄약가방을 뒤집어 탁자 위에 털었다. 마력이 담긴 보라색 가루들이 떨어졌다. 아마 오랫동안 마녀의 마력이 담긴 탄약을 보관하다 기름종이가 구멍 나서 약간 바닥에다 흘렸던 모양이었다.

갈색 머리 총사가 그 가루들을 조심스레 기름종이에 담았다. 그런 다음 누가 그것을 보기도 전에 약봉지처럼 작게 접었다.

이윽고 흉갑과 투구를 쓴 금발머리 기병이 그의 천막으로 다가왔다. 벨린 데 란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봉지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한편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주저하는 듯이 검자루를 쥐며 멈춰 섰다. 주변을 지나가던 총사대원들은 아무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까트린이 벨린에게 말했다.

“오늘 전투에서 나를 네 부관으로 쓰게 해줘.”

까트린은 많이 심사숙고한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기병대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전투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곁에 목숨을 같이 거느냐의 문제 고민한 게 틀림없었다. 천으로 총열을 닦는 척을 하던 벨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어제 카라카스 대령이 내게 과감한 진격 임무를 내렸지. 아주 위험할 거라는 뜻이야. 내가 오늘 할 일은, 거대한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지.”

까트린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거절의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러나 벨린은 총을 쥐고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네 멋진 군마를 봐도 될까?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기병이 부대 주변을 선회한다면 병사들의 사기도 오를 거야.”

까트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가 벨린 데 란테를 앞서며 인도했다. 그녀의 군마는 근처의 천막에 메여 있었다. 귀가 쫑긋한 백마였다. 그녀의 용모와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은빛 갈기를 가지고 있었다.

벨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까트린이 말안장에 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네 곁을 떠날 생각은 없어. 죽더라도 곁에서 죽는 거야.”

벨린 데 란테는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삼각모를 썼다. 그리고는 머스킷총을 어깨에 메고 적들이 도열을 시작한 벌판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에는 이미 붉은 대열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거대하고 길고 가는 대열이 숲 사이 벌판의 양 끝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벨린이 까트린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가 저 너머에 있어. 참 흥미롭군. 이 느낌은….”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치 나에게 자기가 도주하지 않았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는 것 같아.”


같은 시각. 히스파니아 총사부대와 1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 평야에는 빌랜드군이 전투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악대는 한참 ‘브리타나여 영원하여라’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전투준비를 끝낸 소대부터 부사관들의 호령에 따라 이오 횡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대열을 형성한 다른 병사들의 틈으로 보강되었으며 각 소대의 끝에 자리 잡은 기수들의 브리타나 연합왕국 깃발이 펄럭였다.

그들의 대열 뒤 어느 천막 아래에 총사가 한명 앉아 있었다. 브라운 베스 머스킷총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한 손에 쥔 총검으로 계속 바닥의 모래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광포한 갈색 눈은 바닥으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안젤라.”

올리버가 다가와 말했다.

“월슬리가 우리 중대에게 우익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하달했어요. 그는 적이 무슨 공격을 가하든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태세입니다.”

“그를 죽일 거야.”

안젤라가 흥분한 목소리로 총검을 모래 속 깊이 푹 찌르며 말했다.

“여기 있다는 거 다 알아. 나에게 복수하고 싶겠지. 자기가 기르던 애완동물을 죽였으니 어떻게든 미쳐 날뛸 거야. 그만 죽일 수 있다면 이 전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겁을 집어먹은 올리버는 머스킷트리스의 눈치를 보았다. 군악대가 연주를 끝낼 즈음, 안젤라가 삼각모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공과 눈동자가 구별이 가지 않는 그녀의 짙은 갈색 눈이 멀리 떨어진 히스파니아 군대를 노려봤다.

올리버가 우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병사들이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예전의 신중하고 사려 깊었던 베스가 이번 전투 때문에 무언가 이상해졌다는 거예요.”

안젤라가 킥킥거리며 웃더니 대꾸했다.

“내가 그랬다고? 녀석들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사내가 아니야. 군인도 아니고 총사는 더욱 아니야. 나는 그저 마녀야. 너희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여겼을 거 아니야. 마녀는 저주를 거는 게 더 어울리는 법이야.”

올리버가 침통한 얼굴로 물었다.

“저 병사들은 어쩌고요? 3년 동안 당신을 따르면서 위대한 베스라고 외치던 저들을 버리기라도 할 겁니까?”

그녀가 모든 것을 초연한 표정으로 올리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보고 나를 잊으라고 하는 수밖에. 그렇게 되면 저 레드코트들의 진정한 대장은 바로 네가 될 테지.”

올리버는 완전히 질린 얼굴로 뻣뻣이 굳어 서 있었다. 그러나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상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미쳤어요. 안젤라.”

올리버가 참지 못하고 성을 냈다.

“당신은 한 번도 내게 당신이 처한 상황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짐작하고 있어요. 아스티아노에서 몰래 숨어 당신이 그 옛 원수의 여자를 총으로 쏴 죽였을 때부터, 나는 당신이 내면 속의 괴물에 잡아먹혔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제 그 괴물이 당신에게 뭘 원하는 거죠? 피비린내 나는 복수요?”

그때 멀리 히스파니아군 쪽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위협적인 폭발음이었다. 대열을 갖추는 레드코트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히스파니아군이 발사한 첫 번째 포탄이 굉음을 가르며 하늘을 갈랐다. 그 가공할만한 쇳덩어리는 양측 군대의 정 가운데 떨어져 하늘 높이 튕겨 올랐고 이미 대열을 갖춘 레드코트들은 하늘로 튀어 오르는 적의 포탄을 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포탄은 그들과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파열되었다. 저것이 조금이라도 각도가 낮게 떨어졌다면, 그들의 대열로 튕겨 올라 빌랜드군 병사 여럿을 쓰러트렸을 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갑작스런 포격에 안젤라와 올리버가 움츠려드는 사이 히스파니아군 포병대가 다음 포탄을 쏘아 올렸다. 그들은 지금 탄착지점을 측정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운데의 포대 하나를 기준포로 삼아 탄착점을 잡은 다음, 적절한 포 각도를 찾아 일제사격을 가할 태세였다.

이번에는 꽤나 정확했다. 포탄이 빌랜드군 정 가운데 선형 대열 앞에 뚝 떨어졌다. 포탄이 밀집해 있던 레드코트들을 덮치며 쾅 하고 무릎높이로 튀어오르자 포탄의 동선에 서 있던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져 내렸다. 쇳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른 강철제 포탄이 레드코트들의 몸통과 허벅지, 무릎 따위를 치고 내려가며 피비린내 나는 궤적을 그렸다.

포탄은 대열의 맨 뒤에 자리 잡은 군악대 앞에서 땅에 꽂혔다. 깜짝 놀란 군악대는 군가연주를 잠시 멈추었고, 그 짧은 찰나에 군악대의 연주에 가려져 있던 레드코트들의 비명소리가 처량하게도 하늘을 찢었다.

“이런 맙소사.”

올리버가 눈앞에 펼쳐진 사상자들을 목격하며 성호를 그었다. 피가 튀고, 다리와 팔, 하체가 통째로 날아간 레드코트들이 욕을 퍼부어댔다. 비록 그들의 마법사단 소속 중대는 아니었지만 숙련된 군인들조차도 겁에 질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대열을 이탈할 수 없었다. 부사관들은 단창을 들어 올리며 대열을 메우라고 명령하는 사이 안젤라가 요부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걸 원했던 거야. 올리버. 이렇게 축제처럼 화려한 지옥을.”

그러면서 안젤라는 모닥불 앞에 놓아두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코르크 마개를 물어 빼서는 그 안에 든 갈색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공황 상태에 빠진 올리버를 내버려두고 그들의 중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안젤라가 그 갈색 액체를 한 번 더 마시고서는 뒤를 돌아 한마디 했다.

“저들이 아직 나를 필요로 한다면 조금은 더 있어줄 수 있어. 하지만 명심해. 올리버.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모든 이성을 포기해버릴 테니까.”

올리버는 충격을 받았다. 안젤라는 독한 럼주를 들이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우는 장면을 올리버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군 포대에서 본격적으로 포격을 개시하는 바람에, 올리버는 더 이상 멍하니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안젤라를 따라 나섰고, 그의 뇌리에는 오로지 눈물을 흘리는 상관의 얼굴과,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럼주를 먹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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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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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베나레스의 총사(169) +24 09.02.07 2,611 12 7쪽
171 베나레스의 총사(168) +27 09.02.03 2,642 9 7쪽
170 베나레스의 총사(167) +30 09.01.29 2,678 12 12쪽
» 베나레스의 총사(166) +26 09.01.26 2,735 12 10쪽
168 베나레스의 총사(165) +33 09.01.22 2,824 12 10쪽
167 베나레스의 총사(164) +28 09.01.22 2,746 9 7쪽
166 베나레스의 총사(163) +27 09.01.18 2,702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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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베나레스의 총사(153) +28 08.12.31 2,668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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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베나레스의 총사(151) +21 08.12.22 2,476 11 10쪽
153 베나레스의 총사(150) +26 08.12.21 2,586 12 8쪽
152 베나레스의 총사(149) +23 08.12.18 2,729 12 9쪽
151 베나레스의 총사(148) +17 08.12.15 2,582 10 9쪽
150 베나레스의 총사(147) +24 08.12.12 2,708 9 9쪽
149 [부록]베나레스의 총사에 대한 작가의 덧붙임(1) +14 08.12.12 3,490 5 15쪽
148 베나레스의 총사(146) +19 08.12.12 2,792 1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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