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영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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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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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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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0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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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UMMY

육전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 시진 가량이 지나서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가 보네.”

힘겹게 눈을 뜨는 데 머리맡에서 정우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우태와 표일구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찌된 일이죠?”

육전호는 지금의 상황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몰라서 물어? 훈련 끝내놓고 그냥 쓰러졌잖아!”

이어지는 표일구의 상황설명을 듣고 나니 대강의 일이 짐작되었다. 침상에서 내려와 정우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냐, 아냐. 신세는 무슨…… 무림에서 그 정도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라네. 그나저나 자네 배고프지 않나? 우리도 아직 저녁식사를 안 했으니 같이 먹자고.”

정우태는 무안한 듯 손사래 짓을 하더니 육전호를 재촉했다.

모옥을 나서니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자신의 육체가 한없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연무장은 이미 어둠에 잠겨 가고 있었다. 귀밑머리를 스치고 가는 선선한 바람결에서 생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산중의 가을은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정우태와 표일구의 뒤를 따라 천천히 식당을 향해 걸으면서 오후에 있었던 퇴출훈련과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짚어보았다. 마지막에 진기가 고갈되는 허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래도 큰 벽을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이미 저녁식사 시간을 넘겨서인지 넓은 식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교두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 놨네, 걱정하지 말고 앉으라고.”

정우태의 권유에 따라 가장 안쪽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검은 무복 차림의 사내가 몇 가지 음식들을 가져와 내려놓았다. 족히 네 사람 분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양이 많지?”

김이 모락모락 솟어오르는 음식들을 살피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표일구를 보며 정우태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말고도 아직 저녁식사를 못한 사람이 있지. 오! 저기 오고 있구먼.”

정우태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봉천우가 식당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이런 썩을…….”

표일구의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세 사람이 앉은 탁자로 다가 온 봉천우는 비어 있던 육전호의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나?”

“네, 덕분에.”

“야 육전호, 저 떨거지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뭐, 한 게 있어야 고마워하지. 난 그래도 호법이라도 섰지만 저놈은 그 상황에서도 나무그늘에 앉아 원시천존(元始天尊) 흉내나 내고 있었을 뿐이야.”

봉천우와 육전호의 짧은 대화를 듣던 표일구가 빈정거렸지만 봉천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태연한 기색으로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표일구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흥! 내가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협의(俠義)를 행한다고 큰소리치는 백도 명문의 제자치고 그 속까지 제대로 된 놈을 본 적이 없다.”

표일구의 날이 선 발언에도 봉천우의 안색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단지 무심히 한 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맞아.”

표일구는 자신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응 없이 오히려 동조하고 나서는 봉천우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그랬어?”

“네?”

뜬금없는 봉천우의 질문에 육전호는 영문을 몰랐다.

“그렇게 무리를 하지 않았어도 열두 번째 안으로 충분히 올 수 있었을 텐데.”

“…….”

잠시 침묵하던 육전호는 입을 열었다.

“그게 뜻하지 않은 진전에 제가 잠시 흥분을 했었나 봅니다.”

육전호의 얘기를 듣던 정우태의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

“허허허, 평소에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 보이더니 그런 실수를 할 때가 있군그래. 무인은 항상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 그게 삶의 방식이든 무공이 되든지 간에 말이야. 그래도 그 와중에 진전이 있었다니 다행이군. 자네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르기도 어려운데…… 자네의 미래가 기대되는군.”

육전호는 정우태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태 형님이 생각하는 제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제 미래는 평범합니다.”

육전호의 말에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봉천우와 표일구도 궁금한 듯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계속 하라는 주위의 눈빛에 잠시 당황하던 육전호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주섬주섬 풀어 놓기 시작했다.

차(茶)를 유통하는 조그만 상회를 하시던 부모님 덕에 꽤나 넉넉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오전과 오후를 나누어 서당과 무관에 다니던 일. 학문에 재능이 있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형.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늦둥이 막내 여동생 혜아. 이렇게 단란한 가정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갑작스럽게 막히기 시작한 상회의 유통자금과 그로 인해 점점 쌓여가는 부채는 끝내 상회를 경쟁상회에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 그 충격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형제는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고 때마침 형에게 날아온 군대징집은 육전호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가 없게 했다. 글공부밖에 모르던 형을 대신하여 정위군에 입대한 것이었다.

얼마간의 무공을 익혔고 몸이 날래다는 이유로 비찰대로 배치된 후, 비찰대를 지휘하던 유세명을 만나 무당파의 무공을 배우게 된 일. 북방의 전쟁이 끝나자 무당파를 방문했었고, 그 와중에 고향 친구를 우연히 만나 가족들의 근황을 들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을 빚을 갚기 위해서 유세명 장군께 부탁을 드렸죠.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여기저기 알아보시더니 추천서를 써 주시면서 무림맹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위험한 일이지만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라 하시면서…… 제가 꿈꾸는 미래는 이런 겁니다. 우리 가족들이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살 수 있는 것, 단지 그 것뿐입니다.”

“…….”

육전호의 긴 얘기는 끝이 났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흐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긴 여기 교육생 중에 한두 가지 사연 없는 이가 있을까…….”

정우태는 안타까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몇 달 후.

여섯 달 동안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친 교육생들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무림맹의 정식 경비단원이 되기 위해 낙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불안함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던 올 때와는 다르게 기대감과 새로운 긴장감이 흘렀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얼마 전에 형산파(衡山派)하고 혈왕문(血王門)이 호남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붙었는데, 형산파가 거의 멸문하다시피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 혈왕문이 그렇게 강했나? 형산파가 구대문파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만고만한 중소문파는 아니잖아?”

“구주사도천(九州邪道天)에서 혈왕문에 고수들을 지원했데. 그래서 뒤늦게 무림맹에서도 풍운각(風雲閣) 소속의 고수들을 파견했는데 늦었다고 하더라고.”

마차 안 구석에 앉아 있던 삼십대 장한이 동료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댔지만 같이 타고 가던 예닐곱 명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형님, 우리도 혈왕문과의 싸움에 동원될까요?”

육전호의 질문을 받은 정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산파가 무림맹 소속이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당연히 참여하겠지, 하지만 겉으로는 아닐게야.”

“네? 겉으로는 아니라뇨?”

정우태의 말에 육전호가 의문을 나타내자 옆에 있던 귀검치(鬼劍痴) 표일구가 거들었다.

“이봐, 전호. 우리가 받은 교육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우린 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들을 하게 될 거야. 무림맹의 행사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일들. 일종의 쓰레기 청소부 역할이지.”

표일구는 말을 하면서 정우태의 옆에 누워 있는 십일 호, 봉천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들 네 명은 육천호가 자신의 과거지사를 털어놓던 날부터 서로를 형, 동생이라 부르면서 지내고 있었다.

산동북검 정우태가 마흔 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귀검치 표일구와 화산파의 적전제자인 봉천우가 스물여섯으로 동갑이었고 육전호가 스물하나로 가장 어렸다.

표일구의 말은 들은 육전호는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록 돈이 필요해서 지원을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엔 얼마간의 공명심(功名心)이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뛰어난 무공과 그에 걸맞은 멋진 별호를 달고 강호를 활보하면서 무림인들의 칭송을 받는 고수들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전호야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지금은 비록 그늘진 곳에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네 의지가 굳건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볼 것이고, 누구든 너를 인정해 줄 것이다. 설령 네가 지금 떳떳치 못한 일을 하더라도 가족을 위하는 네 속사정을 안다면 누구도 너를 쉽게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정우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네, 형님…….”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을 한 육전호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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