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영잔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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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0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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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UMMY

육전호가 방 안에 틀어박힌 지도 벌써 나흘 째였다. 식사 시간에만 잠깐 얼굴을 비출 뿐, 조원들이 함께 청살검진을 훈련하는 시간에도 육전호는 숙소에서 나오질 않았다. 호기심 많은 송석구와 원자춘이 육전호의 방을 기웃거렸지만 계응걸이 가로 막고 나섰다.

“젠장, 신입 주제에 단체 연무도 안하고 어떤 놈은 아예 숙소를 옮겼는지 얼굴 한 번 못 보겠고, 누구는 저렇게 방안에서 뒹굴고만 있으니 밸이 꼴려 못살겠네.”

“쉿! 방해하지 마라. 전호한테는 지금이 중요한 순간일 것이야.”

“조장, 아무리 그래도 저 놈이 단체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실전에서 조원들한테 피해가 간다는 생각은 안하쇼?”

“이놈아! 이런 기회에 전호의 무공이 더욱 깊어진다면 우리가 한 번이라도 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생각안하냐? 청살검진도 네놈보다는 더 낫더라. 네놈 할 일이나 챙겨.”

원자춘의 입이 한자나 튀어 나온 채 겨우 물러서자 계응걸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임무를 마치고 무림맹으로 돌아오자마자 봉천우는 원로원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 벌써 삼일 째 돌아오질 않았다. 무림맹 지휘부 곳곳에 화산파의 인물들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육전호마저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자 조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애써 짜놓은 훈련계획이 시작부터 두 사람이나 빠진 채 진행되게 생겼으니 말이다.

계응걸은 연무장으로 나서다 육전호의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원자춘한테 면박을 주긴 했지만 자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원들의 일상을 살피는 것도 마땅히 조장이 해야 할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부리부리한 눈을 밀착시켰다.

창문마저 꼭꼭 닫아걸어 대낮임에도 어슴푸레한 방 안. 침상위에는 육전호가 앉아있었다. 운기조식이라도 하는지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지만 두 팔은 느릿느릿 허공을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뭐지, 춤을 추는 건가? 아니지…… 권법을 익히는 건가?’

양팔을 아주 천천히, 그러나 기묘하게 흔들다 치고 틀며 찌르는 육전호의 동작에 빠져 한참이나 바라볼 때였다.

“어이, 조장. 뭐하쇼?”

“으헉!”

탁!

계응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방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복도 끝에 기대어 선 원자춘이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이라도 훔쳐보고 있는 거요?”

“이런 썩을 놈이…….”



비록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종리연의 조언은 육전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숲에서 돌아온 직후, 잠을 잊은 채 자신이 무아경 속에 펼쳤던 유운검과 삼재검을 기억 속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다. 초식 하나하나의 조그만 변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초식에 따른 진기 흐름의 미묘한 변화까지도 되살리려 노력했다. 그렇게 유운검과 삼재검의 초식들을 하나둘 새롭게 다듬어 갔다.

한 발 더 나아가 실전 경험에까지 손을 뻗었다. 정위군 시절부터 지금까지 유운검법과 삼재검법을 사용했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실전들을 돌이켜 보았다. 터무니없는 실수와 미진했던 대응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한 순간의 실수는 곧 죽음이었다. 몇몇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서도 살아남은 건 운이었다. 앞으로는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아쉬웠던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좀 더 효과적인 대응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밖이 시끄러웠다. 계응걸과 원자춘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차분했던 마음이 헝클어졌다. 머릿속에서 그려가던 비무를 그만뒀다. 어차피 직접 검을 맞대어 확인해야할 부분들이었다.

다시 진기를 일으켜 세 번의 소주천을 끝내고 나서야 숙소를 나섰다. 석양이 지는 연무장에는 조원들이 청살검진을 수련하고 있었다. 봉천우를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전호, 누굴 찾고 있나, 봉천우?”

계응걸이 웃으며 다가왔다.

“네, 오늘도 안계신가 봅니다.”

“돌아오던 날, 원로원에서 불러서 갔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바쁜가 봐.”

“네…….”

육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로원이라…….’

남궁세가에서 남궁성도를 만났을 때, 그는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전하라 했다.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막상 무림맹에 오고 나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무림맹의 하급무사인 경비단원 신분으로 제왕검 남궁우를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제왕검 대협이 자신을 만나줄 지도 의문이었다.

육전호는 초라한 자신을 모습을 보게 되자 고개를 흔들었다.

“조장, 개인수련을 좀 해야겠습니다.”

축 처져 무언가를 생각하던 육전호가 다시 기운을 차린 듯 말을 건네자 계응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걱정이 되는 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계응걸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육전호는 연무장을 나섰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소나무 숲 특유의 바람소리가 시원스레 들려왔다. 며칠 전의 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나무 사이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종리연의 모습이 보였다. 종리연의 주위를 옅은 금색 광채가 한 자 가량을 둘러싸고 있는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몇몇 특별한 심법이나 신공은 그 완성도에 따라 특유의 광채나 운무를 발현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기척을 죽이면서 왔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보타문의 검후라면 이미 자신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십여 장쯤 떨어진 소나무 밑둥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운기행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식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종리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무슨 일이냐?]

때 아닌 전음에 육전호는 종리연을 살펴보았다. 아직 운기행공이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운기행공 중에 전음을 시전한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떻게 운기 도중에 전음을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육전호의 독백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종리연의 전음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십여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이 조그맣게 중얼거린 것을 정확히 듣고 전음을 시전하는 종리연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저의 조언을 듣고 나름대로 궁리한다고 해봤지만 어느 정도나 성과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저……? 그래, 얻은 것이 있는지 나를 통해 확인해보고 싶다는 말인가?]

“네, 가능하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이곳 무림맹에는 너희 무당파의 원로도 있고 동문도들도 있다. 그들을 통해 확인하면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육전호의 말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종리연.

[유운검은 적전제자만이 익힐 수가 있다 들었다.]

육전호는 종리연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금방 유추해낼 수 있었다. 속가제자인 자신이 유운검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얘기일 터였다. 육전호는 자신이 유운검을 얻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종리연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추위를 재촉하는 바람을 타고 누렇게 변한 솔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대륙의 산맥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뀔 즈음이면 하얀 눈이 저 바람을 타고 내릴 것이다.


“준비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이미 운기를 끝내고 일어서 있는 종리연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의 정면에 자리를 잡고 포권의 예를 취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게 있어 비무란 실전과 다름이 없다.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종리연의 차가운 목소리에 육전호는 다시 한 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시작하자.”

스릉!

종리연의 고풍스런 검집에서 짙은 먹빛을 띤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육전호도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육전호가 채 기수식을 취하기도 전에 종리연의 기세가 사나운 파도처럼 밀려왔다.

“윽!”

난생 처음 겪어보는 기세였다. 단지 종리연이 기수식을 취했을 뿐인데도 살인적인 기운이 자신을 옭아매는 듯 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 몸이 무거웠고 진기의 수발마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독사의 살기에 꼼짝없이 짓눌린 개구리 같은 형세였다.

겨우겨우 중단세를 취하기가 무섭게 종리연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뻗어왔다. 대적하려 해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비명 섞인 기합을 질러대며 진기를 끌어 모았다.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네댓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무복의 가슴 부분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베어져 덜렁거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베어진 것이 옷만이 아닐 터였다. 가슴은 철렁거렸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을 늘어트린 채 무심한 표정으로 서있는 종리연은 자신이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수준의 고수였다. 당대의 무당 속가제자 중 제일이라는 유세명도 이렇게 압도적인 기도를 보여주지는 못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초식도 종리연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절벽을 마주 대한 것처럼 암담한 기분이었다.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육전호의 가슴으로 종리연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종리연이 다시 검을 가져가 하단세를 취하자 예의 그 기세가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번져오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육전호 역시 중단세를 취하며 이를 악물었다. 겨우 이 정도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상대는 절대고수. 공세를 먼저 취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상대의 대응에 따라 언제든지 허초를 진초로, 진초를 허초로 변화를 줄 수 있는 초식, 뇌운만변(雷雲萬變)을 펼치며 종리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먹구름이 몰려오듯이 육전호의 검이 수없이 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몇 군데의 방위를 점했다. 바라보던 종리연의 눈망울이 흔들렸지만 그도 잠시였다. 검신에 어린 먹빛이 짙어지는가싶더니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육전호가 펼치는 초식이 변화하는 곳마다 시커먼 검신이 번뜩였다.

육전호는 기세 좋게 공세를 펼쳤지만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종리연이 가볍게 휘두르는 검에 따라 자신의 검초가 애초의 의도와 다르게 비껴가거나 꺾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력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진기의 흐름마저 흔들렸다. 벌써 꺾여버린 기세였다. 뒤로 물러서며 재빨리 유운암영을 전개했다. 수세에 강점이 있는 초식이다. 허나 종리연의 검은 여전히 날카롭고 빠르게, 때론 부드럽고 느리게, 초식의 변화를 미리미리 분쇄하며 자신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날름거리는 뱀의 혀처럼 튀어나온 그녀의 검 끝에 왼쪽 어깨를 찔렸다. 피가 튀었지만 종리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뿌연 흙먼지가 자욱하도록 보법을 펼쳐가며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먹빛 검신은 끊임없이 요혈 주위를 노렸고 그때마다 피를 뿌렸다.

육전호는 이를 악물었다. 유운암영에서 유운생운으로, 천리유운으로 초식의 변화를 가져가며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은 종리연의 검은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영활하게 변화하며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절망적이었다. 자신의 무공이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처는 깊지 않다. 치료하다보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꼿꼿하게 서서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와 마주치자 육전호는 고개를 숙였다. 수치심에 콱 죽고만 싶었다.

유운검과 삼재검에 대한 조그만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마치 절정고수라도 된 양, 일말의 자부심이 없지 않았다. 종리연이 소문 속의 검후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수십 초 정도는 당당히 겨룰 수 있을 거란 자신감에 비무를 청했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무복은 누더기가 되었고 종리연의 검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로 인해 온 몸은 피투성이였다. 진기는 바닥을 보인 지 오래여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반면에 종리연은 한 식경 가까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공격을 펼치고도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광대한 무(武)의 세계를 처음으로 엿 본 것 같았다. 작은 깨달음을 통해 보았던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흔들리는 다리를 검에 의지해가며 겨우 예를 취했지만 종리연은 이미 등을 보이며 돌아서 있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검을 지팡이 삼아 어두워진 숲길을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스물여섯 군데.

상처는 모두 얕게 베이거나 찔린 것이었다. 하지만, 상체와 하체를 가리지 않았으며, 왼쪽 뺨에도 한 치 가량 얕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들이었다. 한 군데 한 군데 금창약을 바를 때마다 쓰라림과 함께 상처를 입은 과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후라는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무공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검을 들고 강호에 뛰어든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수법들이었다.

절묘했다. 먼저 상대의 수를 묶어 놓고 손을 쓰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빤히 보이는 허초에 속고, 사량발천근의 수법에 끌려가 당하고, 간단한 횡소천군의 수법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마음의 상처는 더 컸다. 철들면서부터 검에 목숨을 걸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무공이 종리연에게는 강호에 떠도는 온갖 삼류무공으로 상대해도 될 만큼 허술하게 보였다는 점이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작은 깨달음을 얻고 비무를 하기까지 며칠 동안,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음날.

붉은 태양이 태이산 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즈음. 육전호는 막 운기행공을 끝낸 종리연을 마주보며 서 있었다.


“가볍다고는 하나 하루 만에 다 나을 상처는 아니다.”

“상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어떤 상처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종리연이 완곡히 거절의 뜻을 밝히자 비무를 청하는 육전호의 음성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잠시 침묵하던 종리연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겠다.”


어둠이 더욱 짙어갈 무렵.

조원들의 눈에 띠지 않게 숙소로 돌아온 육전호는 누더기로 변한 무복을 조심스럽게 벗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오늘 입은 상처는 십여 군데에 불과했다. 어제와 같은 수에 당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수에 당한 것이었다.

피를 닦아내고 금창약을 발랐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고통 때문에 정신은 혼미했다. 모든 근력과 한 줌의 진기마저 짜내듯이 써버린 비무 탓에 온 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고 육체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허나 마음속엔 알 듯 모를 듯 묘한 성취감이 있었다.

간단하게 주변정리를 하고나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종리연과의 비무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흔히 삼류무공이라 불리는 강호의 온갖 잡다한 초식들이었지만 적절한 순간에 종리연의 검을 통해 펼쳐지자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파괴적인 위력을 보였다.

임기응변에 가까운 종리연의 검을 상대하다보니 자신도 유운검과 삼재검에 다양한 변화를 주게 되었다. 하지만 정위군 시절과 같은 난잡함은 없었다. 상황에 맞게 다양한 변초를 구사하되 나름 체계가 잡혀있는 변화였다. 이를 통해서 종리연의 즉흥적인 초식에 맞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다. 비록 새로운 상처를 얻긴 했지만 무기력하기만 했던 첫 비무에 비하면 크나큰 성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전호를 기쁘게 한 것은 종리연의 기세, 온 몸을 옥죄는 것 같은 그 기세를 버텨내며 자신이 의도한 초식들을 풀어냈다는 것이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텅 비어 있던 단전이 조금씩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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