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영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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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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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DUMMY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오전 내내 무공을 수련하던 육전호는 점식식사를 한 후 원로원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정원으로 들어서는데 시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비의 안내에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열려있는 서재가 보였다. 수많은 책들이 사방을 두룬 책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이었다.

글을 쓰고 있었는지 남궁우가 붓을 든 채 육전호를 반겼다.

“사문의 일은 어찌 되었나?”

“징계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궁우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주 앉은 탁자 위에는 글씨를 쓰다 만 종이가 곱게 펼쳐져 있었다. 몇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였다.

“이게 무슨 글인지 알아보겠는가?”

남궁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제갈량의 출사표 같습니다.”

조금 망설이다 대답하는 육전호였다.

“흠…… 자네가 살아온 행적을 보면 문장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용케 알고 있구나.”

“가깝게 지내는 형님 한 분이, 좋은 문장을 읽는 것도 수행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셔서. 그래서 이런저런 책들을 조금씩 읽어보고 있습니다.”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우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구나. 그 형님이라는 분 얘기 좀 해 보게.”

육전호는 봉천우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얘기했다.


“곡진의 제자라…….”

육전호가 얘기를 마치자 남궁우가 눈을 감았다. 기억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남궁우가 중얼거렸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바르게 잘 자랐구나. 화산파이기에 가능한 일일 터…….”

무슨 얘기일까.

남궁우의 독백 너머 가려진 부분이 궁금했다. 하지만 왠지 봉천우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궁우 역시 고개만 끄덕거릴 뿐 더 이상 봉천우에 대한 말은 없었다.

잠시 탁자 위에 놓인 쓰다 만 종이를 바라보던 남궁우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성도의 청 때문이네.”

“……?”

“성도는 자네가 무가(武家)에 뜻을 두고 있다고 했네.”

“네?”

육전호는 깜짝 놀랐다. 무가라니.

남궁성도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문득, 남궁세가에서의 그 밤, 남궁성도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귀향하더라도 무림을 벗어날 수는 없을 거라 말하던.

“성도가 멋대로 넘겨짚은 건가?”

“그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그려보던 자신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무공을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단순했지만 무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무가(武家)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짙은 안개가 한꺼번에 확 걷힌 느낌이었다.


성긴 빗줄기에 정원의 괴석들이 검게 젖어들고 있었다.


남궁성도가 남궁우에게 청한 것은 막연히 무가의 당주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민을 좀 했네. 나 역시 선친이 생존해 계실 때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데다 지금은 가문에서 쫓겨난 것과 다름없는 신세다보니 마땅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다가 생각을 조금 바꿔보았지, 만약 성도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를. 그렇게 생각하니까 서법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때마침 자네도 문장공부를 하고 있다니 잘 되었다 싶네. 서법을 병행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렸을 때, 글을 배울 당시에도 나뭇가지를 붓 삼고 땅바닥을 종이삼아 연습했었다. 정식으로 붓을 쥐고 종이에 글을 써본 것은 손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서법이라니.

난감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르신께서 제게 도움이 된다하시니 그리 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육전호가 승낙을 하자 남궁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남궁우는 세가와의 불화 때문에 무림맹에 칩거를 한 지난 십 년 동안 서법과 문인화를 꾸준히 익혀왔다.

낙양과 그 인근에서 글이나 그림으로 소문난 이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그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서법과 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수행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자네에게 달린 것. 하지만 얻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남는 것은 분명히 있을 터.”

남궁우는 여분의 붓과 벼루, 먹 등 서법을 익히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육전호의 앞에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을 바른 몸의 자세와 마음가짐, 그리고 먹을 갈고 붓을 잡는 자세 등 필요한 여러 가지를 설명 하고는 빈 종이에 영(永) 자를 써서 건넸다.

“구양순의 서체로 쓴 것이야. 여러 서체를 두루 배웠으나 내가 자네에게 우선 가르치고 싶은 것은 구양순의 서체이네. 이 글자를 쓰는 것으로 서법 공부를 시작하겠네.”


남궁우는 육전호에게 영(永)자를 반복해서 쓰는 것으로 운필의 여덟 가지 방법을 익히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을 통해 구양순체를 가르쳤다.

두 시진 동안 간단하게나마 당대(唐代) 서법의 대가였던 구양순의 서체를 배운 육전호는 숙소로 돌아와서도 영자팔법에 몰두했다.

예전에는 서법이라 하면 왠지 분에 넘치고 따분할 것 같았으나 막상 시작해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붓을 놀려 점과 획을 그어 나가는 것이 그랬고 단순하게 보이는 한 획도 그 속에 붓과 손의 미묘한 여러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를 일으켰다.


육전호의 생활은 틀에 박힌 듯 똑 같았다. 새벽과 오전에는 검법을 수련하고 조원들과 함께 청살검진을 비롯해 정위군과 교육대 시절 배웠던 여러 가지 잡기들을 수련했다.

오후에는 숙소에서 구양순체를 연습하거나 남궁우를 찾아가 자신이 쓴 것을 검토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저녁 이후에는 책을 읽거나 운기행공을 했다. 몸도 마음도 편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식사를 한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숙소에서 구양순체를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 밖에서 봉천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호. 들어가도 될까?”

“네, 형님. 잠시만…….”

육전호는 대답을 하면서 방안 이곳저곳을 어지럽게 나뒹구는 종이들을 서둘러 치웠다.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었기에 서법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숨겼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으니.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선 봉천우가 한 장의 종이를 들어 살펴보고 있었다.

“구양순체군. 서법 공부를 하고 있었나?”

“네…….”

육전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육전호를 바라보던 봉천우가 미소를 지었다.

“진즉에 알았으면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을 텐데……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그게 사실은…… 부끄럽기도 하고, 모두가 무공수련을 하느라 바쁜데 저만 너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숨겼습니다.”

“아니다. 지금의 너한테는 이것만한 수련도 없을 것이다. 너에게 도가의 경전을 찾아 읽으라 했던 것도 같은 방편이었고. 아무튼 네가 스스로 길을 열어 가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봉천우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육전호의 물음에 봉천우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 경비단을 떠난다.”

“네?”

“사문의 결정으로 풍운각으로 가게 되었다. 경비단에 들어 올 때부터 계속 요구해오던 것인데 이젠 더 이상 거절할 수 없게 되었어.”

봉천우의 갑작스런 얘기에 육전호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지난 번 금가장의 일로 인해 풍운각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확대한다 하더구나. 사문의 많은 형제들이 이번에 새로 풍운각으로 가게 되었어. 나 역시 그렇고…….”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는 형님이 경비단을 떠난다기에 아주 멀리 떠나는 줄 알았습니다.”

육전호가 미소를 보이자 봉천우의 얼굴이 조금 환하게 펴지는 듯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조장이 내 얘기를 하겠지만 너한테는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니니 가끔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찾거라.”

말을 마친 봉천우가 육전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육전호는 임무를 마치고 맹으로 복귀하기가 무섭게 원로원으로 불려 다니는 봉천우를 보면서 어쩌면 경비단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더구나 낭인 출신이 태반인 경비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산의 적전제자였으니.

봉천우의 마음을 생각해 애써 밝은 표정을 보였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운기조식을 취하는 육전호의 마음 한 구석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더니 서둘러 꼬리를 감췄다.


그날 저녁. 조원들이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계응걸이 봉천우의 얘기를 꺼냈다. 상부의 결정으로 경비단을 떠나 풍운각으로 가게 되었다고. 육전호 외에 그리 가깝게 지낸 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는지 모두들 섭섭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짧지만 서로의 속마음이 담긴 인사가 오고갔다.


작가의말

추천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오타를 지적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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