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산신령 도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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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20.02.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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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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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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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오랜 기억의 꿈(4)

DUMMY

"봉구, 우리 아가."


분명히 비는 그치고 있었다. 우중충했던 하늘도 점점 밝은 톤으로 바뀌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 이 세상이 더 없이 흐려 보이는 걸까.

흐려지는 사물과 풍경. 고흐가 보았던 밤이 이러했을까.

북받친 감정이 너울지며 세상을 감싸 안았다.


"어, 엄마."


어린 아이는 눈을 감는 법도 잊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내 안에서 들린 목소리에 홀린 듯 시선을 고정했다.


"엄마!"

"엄마만 찾으면 아빠는 섭섭하단다."


내가 아직 정식으로 관악을 맡기 전, 연하와의 첫 만남에 있었던 그 싸움.

연못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사특한 감정을 머금고 자라 봉인이 풀리기만을 노렸던, 인간의 뼈로 쌓아진 가련한 악령과 싸울 때 느꼈던 그 감정.

그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내 몸에 다른 이가 실린 느낌.

단지, 이번에는 그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점만 달랐다.


"아빠!"

"그래, 봉구야. 장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가진 우리 아들."

"네 이름을 그렇게 지으실 때만 해도 왜 이리 지으셨나 했더니, 이런 연유로 그러셨구나."

"장모님이 이상하다 말한 건 당신이었어. 난 장모님을 믿었다고. 왜 어린애 이름을 이렇게 지었냐면서 잘 때마다 내게 불만을 토로하던 걸 아직까지 기억하거든."

"하아,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혹해 넘어간 게 누구신데 그러실까."


하나의 입으로 흘러나오는 두 인물의 대화.

다소 툭툭거리는 듯 보이면서도, 내게는 짝을 찾은 비익조가 서로를 향해 속삭이는 달콤한 말 처럼 들렸다.


"말하고자 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겠지, 여보?"

"엄마는 외할머니가 그 일을 하는 게 싫었어. 어렸을 때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아니? 하지만 이렇게나마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엄마한테 그렇게 심한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침묵이 흘렀다.

만약 내게 여분의 손이 있었다면 괜찮다는 말과 함께 부모님께 위안의 말씀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이 과거의 추억으로 구현된 환상에서라 할지언정 두 분의 영을 잠시나마 묶어두는 것은 내 온전한 정신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따로 무언가를 획책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마아... 아빠아..."


아이는 울고 있었다.

강렬한 충격에 말라버린 눈물샘은, 항상 자기를 지지해주던 부모님을 만나고 나서야 샘물이 터지듯 다시 솟아 올랐다.


"봉구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럼. 이건 사고였단다.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어마아아..."


비는 그쳤음에도 아이의 비는 그치지 않았다.

평생 그치지 않을 비였다.

세가 줄긴 했으나 결코 그치지 않을 비. 이승에 새긴 첫 흔적이 바랠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그칠 비였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 하면.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도, 내 마음 속 한 평도 되지 않을 작은 공간은 항상 젖어있으니까.


"밥 잘 먹고, 늦게까지 깨어있으면 안 된다."

"외할머니께 인사 잘 드리고. 외할머니 말 잘 따라야 한다. 알겠지, 우리 아들?"

"으, 으응... 잘 할 거야."

"그리고."


의아했다. 물론 내 부모님이기도 해서 더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만, 아무래도 내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앞으로 보지 못할 아이에게 하는 통한의 표현치고는 매우 짧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나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는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않았기에 모른다.

그래도,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분들의 심정이 이리도 후련할 수가 있나.


"우리 아들, 봉구야."


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말이, 내 눈앞에 보이는 어린 아이를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훤칠하게 컸는데, 우리가 봉구를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니. 고생했다, 우리 아들."

"아빠 따라서 키가 그렇게 크진 않구나. 방금 말했던 늦게까지 깨어있지 말라는 말이 무색해졌네."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거에요."


머리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고대로 흘러나왔다.

지난 삼십 년 좀 안 되는 세월 동안 느꼈던 내 목소리였다.

그 때 뿐이었다. 이윽고 다시 내 입에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실렸다.


"엄마랑 아빠가 봉구랑 함께했던 건 얼마 안 되겠지만."

"부모가 자식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있겠니. 잘 컸구나, 우리 아들."

"..."


젖은 소매로 젖은 걸 훔쳐 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지려는 마음을 지탱할 자신이 없었다.


"눈물 뚝. 어려서부터 눈물이 많더니만 아직도 그러네."

"걸핏하면 넘어지고 엄마랑 아빠를 찾았었는데 몇 살이 된 지금도 그래. 이러면 아빠랑 엄마가 먼 길을 갈 수 없잖니."


크흐읍.

비염이 도졌나, 왜 이리 코가 시큰한지.

돌아가게 된다면 병원이라도 들려봐야겠네.


"이미 어른이 된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커줘서 고맙다."

"팔다리 멀쩡한 걸 보니 어디 크게 다치지도 않아서 엄마는 기쁘단다. 공부는 잘 하고 있지?"

"그럼요. 낙성대에 들어갔는데요."


모종의 일이 있어 중퇴했지만.

그 말을 들은 직후, 내 입에선 행복과 뿌듯함으로 점철된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우리 아들은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다 아빠 머리를 닮아서 그런 거지."

"글쎄, 봉구 아빠. CC할 때 봤었던 자기 성적표에는 비가 내려서 싹이 트던걸."

"스읍. 여보, 다 큰 아들내미 앞에서 남편 기를 죽일 셈이야? 자기도 과탑은 아니었잖아."

"과탑이었으면 내가 자기를 골랐겠어?"


나는 눈을 감으며 두 분의 대화에 집중하다 스리슬쩍 아이를 향해 흘끔 시선을 돌렸다.

한 입에서 벌어지는 세 명의 담화. 마치 TV나 인형극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이는 완전 몰두했다.

다행이다. 저 작은 눈망울이 지금은 벌게지지 않아서.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기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그렇게 잘나가는 여자였어도 나는 당신과 결혼했을 테니까. 이렇게 훤칠한 아들도 있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몸에 실렸던 기운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아. 이제 갈 시간이구나.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하네. 매정한 사람들."

"그래도 이 정도까지 기다려줬잖아, 여보. 우리 두 아들은 앞으로도 잘 자랄 테니까."

"응. 이제 정말 속이 시원해졌네."

"아빠? 엄마?"


어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급히 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따뜻했다. 손 아래로도, 그리고 손 위로도.

느껴지진 않지만 느껴졌다. 두 개의 손이 내 위에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나중에 보자, 우리 아들."

"이왕이면 정말 열심히 즐기고 와. 알았지?"

"우리 아들."

"아빠랑 엄마는 너를."

"사랑해."


떠나갔다. 완전히 사라졌다.

흔들림을 넘어 요동치는 마음을 다시 부여잡고 나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찰나라고 부르고 싶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눈을 떴다.

하나가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끝을 맺어야 할 다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저씨, 아니 형은."

"잘 지내. 이렇게 말 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혀엉..."

"다만 나중에 그건 좀 참아주라. 방구석에 틀어박혀만 있는 건 건강에 정말 좋지 않더라고."

"형은, 혹시..."

"아, 이 말도 기억을 못 하겠구나."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혹시다.

이게 정말 현실이라면, 그래서 내가 나를 기억한다면 무슨 사태가 일어날 지 두렵다. 설사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다스리는 신령이라 할지라도 알 수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날 까봐.

그래서 지금은.


"아무튼 몸 조심 잘 하고."


애용-애용-

때마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남은 신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나는 아이의 기억을 잠시 막아두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먼 훗날에 서서히 기억이 떠오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모순의 사태를 겪지 않을 수 있도록.

하아, 이게 무슨 짓거리람. 환각인 걸 알면서도 끝내 녀석의 술수에 어울려주었다.


"나머지 일까지 모두 매듭이 지어졌으니 이제는 정말 현실의 일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는 가야만 했다.

그러니 달콤했던 꿈아.


깨져라.


* * *


쨍!


"깨졌나."

"호, 혹시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제가 알아서 치우죠."

"그래도 어찌... 바깥에 나가서 그 고생까지 하셨다고 들었는데."

"깨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얼음이 좀 부족하네요. 아이스볼 좀 더 가지고 와주시겠어요?"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몽랑 님."


홀로 남겨진 자리, 여성에서 남성의 형상으로 돌아온 그는 읽고 있던 책을 그대로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영기로 뚫어놓은 그 틈새서 어찌 돌아..."


피식. 몽랑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등받이를 있는 힘껏 젖히며 의자에 몸을 실었다.


"뭐, 그 정도는 되어야 몸소 나갔던 재미가 있겠지요."


* * *


"도봉구! 괜찮아?"

"도 산신! 정신은 들어?"

"...죄송합니다. 잠깐 정신을 잃었었네요."


봐라. 저들의 표정과 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게 공간이동이나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류의 술법이었으면 저들이 이러고 있었겠어?

아까 보았던 그 광경, 그 세계는 환각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아랑 님은요?"

"아직까지는 버티고 계시긴 하나..."

"돌아온 모양이구나."


가장 고생하셨을 분.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아랑 님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네요."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너는 괜찮은 거냐?"

"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도 기운이 넘쳤다.

용의 육체에 손을 대려던 그 때보다도 훨씬 확신에 넘쳤다.

훨씬 더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더 정확하게.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제주 땅 속 깊숙한 화기가 뭉쳐 빚어낸 양의 정수가, 불꽃의 기운이 되어 관악산신의 손끝에서 피어나니.

무릇 독은 불에 약하다는 논리는 이곳에서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원래대로."


해치지 않아야 할 부분은 그대로 남기고, 오로지 살과 뼈를 잠식하는 독기만 말끔히 태워버렸다.

그렇게, 두억시니가 남겨놓았던 저주의 연환은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


* * *


[계속되는 폭우에 일가족 참변. 신고자는 어디에 - 2]


(전략)

다행히 기적적으로 아들 도XX(6) 군은 차량의 바깥에서 기절한 채로 구조되었으나, 남편 도XX(34〮서울 XX구) 씨와 아내 김XX(32〮서울 XX구) 씨는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특이하게도 사체는 피가 닦여진 채 차량의 뒤쪽에 온전하게 남아있었으며, 아들 도 군의 몸에는 성인의 것으로 보이는 외투가 덮여져 있었다.

현재 도 군은 머리에 부상을 입어 사고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 중에 있다.

경찰은 사고 현장이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음을 확인,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는 한편 수습자가 소방서에 신고 전화를 한 인물과 동일인인지 등에 관하여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강완일보 김XX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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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125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4) +4 21.02.03 88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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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120화. 전화위복, 금상첨화(1) +1 21.01.22 124 8 13쪽
» 119화. 오랜 기억의 꿈(4) +4 21.01.20 105 7 12쪽
119 118화. 오랜 기억의 꿈(3) +3 21.01.18 110 5 11쪽
118 117화. 오랜 기억의 꿈(2) +2 21.01.15 113 7 11쪽
117 116화. 오랜 기억의 꿈(1) +3 21.01.13 122 7 13쪽
116 115화. 아랑(3) +3 21.01.11 126 8 12쪽
115 114화. 아랑(2) +3 21.01.08 124 7 13쪽
114 113화. 아랑(1) +3 21.01.06 131 10 12쪽
113 112화. 몽랑(3) +5 21.01.04 155 10 12쪽
112 111화. 몽랑(2) +1 21.01.01 160 12 11쪽
111 110화. 몽랑(1) +1 20.12.30 158 9 12쪽
110 109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4) +1 20.12.28 150 9 12쪽
109 108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3) +1 20.12.25 153 8 12쪽
108 107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2) +5 20.12.23 157 7 12쪽
107 106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1) +1 20.12.21 148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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