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박스 크랙이 쏘아올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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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바리
그림/삽화
샘바리
작품등록일 :
2021.05.19 23:46
최근연재일 :
2021.06.20 23:41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1,986
추천수 :
380
글자수 :
18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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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08:00
조회
921
추천
27
글자
9쪽

호베르토 카를로스 (1)

DUMMY

오뎅 발목, 만년 땜빵, 끼워팔기.


현제대 축구부 신입생인 나를 부르는 별명은 여러가지다. 유난히도 약한 발목 힘 때문에 힘없이 뻗어나가는 슈팅으로 욕도 많이 먹었다. 물론 그다지 결정적인 슈팅을 때릴 기회도 없었지만.


내 주 포지션은 우측 풀백이다. 물론 왼쪽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 윙어 감독님 지시에 묵묵히 어디서든 뛰었다. 심지어 골키퍼가 퇴장 당한 작년 16강전에서는 골문까지 지켜봤으니 모든 포지션을 다 해봤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나는 멀티 플레이어라 부르기엔 실수도 없지만, 활약도 없는 그저 그런 만년 땜빵이었다.


“야! 정훈아! 미팅 안 갈 거냐고!”

“됐어. 그냥 쉴래. 어제 비디오 분석도 다 못 봤고 바빠.”

“으이구, 맨날 분석에, 연습에. 축구 생각만 하면 안 피곤하냐? 쉬는 것도 운동이라고. 가자. 가자. 응?”

“진짜 괜찮아, 호종아.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내일 새벽 운동 있잖아.”

“야, 걱정마. 이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와야 오히려 뽈이 잘 맞는다? 내일 보자.”


마지막 별명인 끼워팔기는 제일 친한 친구 호종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이호종. 차범근 축구대상 출신 초특급 유망주. 축구협회가 독일, 프랑스, 네달란드 등 축구 강국의 유소년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만든 ‘골든 에이지’ 멤버.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유럽리그 진출을 보장하는 수많은 에이전트들이 줄을 섰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연습경기에도 선글라스를 낀 K리그, J리그 스카우트들이 빠짐없이 우리 경기를 보러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교 랭킹 1위 스트라이커 이호종을 보러 왔다.


“이야. 확실히 클래스가 달라. 주변 도움 없이도 어떻게든 골을 때려 넣잖아. 저런 센스는 죽어도 연습해서 나오는 거 아니다. 우리 팀으로 오기만 하면 무조건 터진다. 내가 장담한다. 9번도 당장 달아줄 수 있어.”


“야, K리그고 J리그고 다 시간 낭비야. 음바페가 AS모나코에서 프로 데뷔한 게 몇살인데? 17살이야, 17살. 지금 너보다 어리다고. 나 믿고 유럽 가기만 하면, 유스, 리저브가 아니라 바로 1군 계약할 수 있다니깐?”


하지만 호종이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유럽도, K리그도 아닌 현제대에 입학했다. 평범한 풀백인 나를 포함해 동기 5명과 함께.


얼핏 듣기로는 대학 입학생 숫자가 곧 능력인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님의 극진한 로비가 빚어낸 결과였다. 누구보다 축구를 잘하지만 남들보다 별다른 목표가 없는 호종이는 2년 후 프로로 간다는 계약과 함께 그냥 현제대에 왔다. 친한 친구들끼리 술도 마시고, 놀러도 가고 편할 것 같다며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말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루틴대로 머리, 어깨, 허리, 무릎, 발목을 스트레칭했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트랙을 사뿐사뿐 뛰면서 야간 개인 운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는 그래도 꾸준히 경기를 뛰었는데, 대학교 입학 후 U리그는 한번도 선발로 뛰지 못했다. 승패가 다 결정 난 후반 44분 현빈 선배가 다치는 바람에 급하게 교체 투입된 경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훈아, 천천히 무리하지 말고, 흐름만 봐라.”


감독님은 인자한 미소로 내게 지시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한번도 경기를 뛰지 못한 신입생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실제로 경기장에 들어가 라인을 맞추고 하프라인을 지키다보니 경기는 어느새 끝나있었다. 슈팅? 패스? 아니 볼을 만져 보지도 못했다.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늘 그렇듯 연습뿐이었다.


그저 그런 축구선수, 아니 프로는 꿈도 못 꾸는 축구부 학생인 내가 호종이보다 잘하는 건 딱 하나다. 아니, 두 가지다.


연습과 준비 운동.


초등학교때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새벽 운동, 저녁 운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전지훈련에 가면 도망 한번 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갔다. 호종이는 워낙 연령별 대표팀에 자주 왔다갔다하는 마당에 컨디션 조절을 핑계로 힘든 훈련은 슬쩍 빠지곤 했다.


“감독님, 저 대표팀 코치님이 허벅지랑 발목에 약간 피로가 누적..”

“아 그래? 당연히 쉬어야지. 아프면 바로바로 말해. 응? 몸이 재산이다.”


훈련 열외는 용납하지 않는 선배들도 호종이는 아무도 건들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초특급 유망주는 훈련을 빠져도 경기장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일본 청소년 대표팀과 아시아 지역 예선을 마치고 돌아온 금석배 전국고등학생축구대회 결승전은 잊을 수 없다. 인천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달려온 호종이는 후반전에 부랴부랴 투입됐다. 0대2 였던 스코어는 어느 순간 3대2로 바뀌어 있었고, 우린 우승 메달을 들고 신나게 웃고 있었다.


“야, 권정훈. 니 차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태성고 졸업했고, 포지션은 여기저기 다.. 음.. 뛰라는 자리 뛰는데.. 아무튼 우측 풀백입니다. 장점은··· 어..”

“장점은 뭐라고?”

“아.. 한번도 다친 적이 없습니다!”

“지랄. 장난하냐?”


축구부 신입생 환영회 당시 자기소개 시간에 나는 당황한 나머지 부상을 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대지를 가르는 날카로운 킬패스, 경기의 흐름을 읽는 냉철한 판단력, 상대를 압도하는 강력한 피지컬 따위의 대답을 기대한 선배들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진짜 나의 장점은 준비 운동을 철저히 한 덕분인지 건강한 몸이었다. 생각해보면 혹사를 당할 정도로 많이 뛴 적도 없고, 위험한 경합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안전제일주의 마인드탓일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거친 태클로 십자인대가 끊어져 8개월을 쉰 호종이가 입버릇처럼 부러워하는 게 칼 한번 대지 않은 건강한 내 몸이었다.


‘한 명 제치고, 치고 나가서 달려드는 스트라이커 머리를 향해..’


몸풀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개인 훈련을 시작했다. 나름 오버래핑 상황을 상상하며 달려가다가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팅.


너무 발목에 힘이 들어갔는지, 공이 덜 휘어들어갔고 골포스트를 때리고 말았다. 아니 때렸다는 표현보다 스쳤다는 게 정확하겠다.


‘다시. 이번에는 한번 접고 수비수 제치고 왼발로 낮고 빠르게..’


털썩.


공을 차기도 전에 갑자기 힘이 풀리며 그대로 그라운드로 쓰러졌다.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삐이이익.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고, 분명 정신은 차렸는데 몸을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170cm가 채 안되는 나와 비슷한 키에 빡빡머리, 다부진 허벅지. 그리고 환한 미소.


‘외국인? 누구지? 나 좀 일으켜줘요. 네? 헬..헬프 미!”


일으켜주려는 상대방의 몸짓에 저절로 손을 내밀었고, 악수를 하는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달라졌다. 그리고 축포가 터지면 눈 앞에 글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뭐야. 잠깐 기절한건가? 속이 좀 울렁거리긴 하는데. 코피 나나? 그것도 아닌데. 너무 무리했나 오늘?’


“저기요! 여기 공 좀 차주세요! 죄송합니다!”


반대편 그라운드 반쪽에서 풋살을 즐기던 사람들이 멀리 걷어낸 공이 내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들어왔다. 아까 왼발 크로스 연습을 하려다 쓰러진 생각이 나서, 습관적으로 왼발로 가볍게 멀리보고 공을 찼다.


깡!!!!!!


아까 골포스트를 맞췄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운동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아웃사이드를 맞고 UFO처럼 휘어들어간 공이 엄청난 궤적으로 휘며 골대를 맞췄다. 골대가 흔들리는 게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 파워였다.


“헐.. 쩐다. 뭐야? 방금 휘는 거 봤어?”

“야 미쳤다. 맞았으면 죽을 뻔 했다.”


“죄송합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놀란 마음에 큰 소리로 사과를 하면서 정신없이 물통과 개인 장비를 챙겼다. 뭔가 내 몸이 이상해진 것 같단 느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아까 눈앞에 떠다니던 글자들이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바로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호베르투 카를로스(Roberto Carlos)! 브라질! 레알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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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베르토 카를로스 (1) 21.05.20 922 27 9쪽
1 프롤로그 +2 21.05.19 1,075 43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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