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과학자-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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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scient
작품등록일 :
2022.05.1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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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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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즈음.

DUMMY

홍희근과 박규수, 조선 수군들이 배를 떠났다.


“장계를 연명으로 작성하여 올려 보내고, 잠시 이 배의 출현으로 놀랐을 백성들을 위무한 뒤 다시 오겠소이다.”

“그러십시오. 저도 좀 더 제 상황에 대해 파악을 해본 후 해 드릴 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것들을 좀 더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 사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홍희근과 지방군 뿐 아니라 중앙에서 잠시나마 높은 자리에 있었다는 박규수까지도 일단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조정은 현재 박규수와는 정치적 의견이나 이해 관계가 다른 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였으며,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조정과 지방 행정조직 사이에서 소식을 전하는 수단은 서찰을 직접 전달하는 것이라고 홍희근이 이야기했고, 군관들의 말로는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말을 달려도 날이 추워지고 있으니 늦으면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조선 조정의 의사 결정이 느릴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결정이 떨어지더라도 긍정적인 답변이 오지 않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조선 조정의 답변과 지원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움직이는 것이 나으리라.


가용한 자원과 현재 상황부터 다시 점검해보고 우선순위를 짜기로 했다.

배가 가동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증식로 타입 원자로는 몇 번인가 자동으로 공 모양의 연료를 갈고, 각종 동위원소를 원심분리하여 재생 가능한 물질을 농축해 다시 예비 연료로 들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족히 100년 이상은 가동하리라. 그동안 생성된 막대한 전기와 열 에너지는 기관부가 고장난 상태에서 주로 배를 급한대로 수리, 유지하는데 쓰였고, 남는 에너지로는 열합성을 통해 포도당과 녹말을 만들어 저장해두었던 것 같다. 평소 배 외피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것 이상으로 포도당의 생산량이 늘자, 쌓을 곳이 부족해진 포도당과 녹말은 배양조로 공급되었고, 배양조에서는 효모를 배양하여 에탄올을 뽑고, 효모를 열분해하여 효모 추출물을 분리해 둔 것도 몇 톤단위로 저장되어 있었다.아마 지금 당장 미생물 배양이나 몇몇 단세포 생물 실험은 가능했다.

물을 전기분해하고 이산화탄소와 고온 고압으로 반응시켜 만드는 합성 경유도 저장조에 몇 킬로리터정도는 들어 있었으니 이것도 연료로 즉각 사용 가능했다.

액체질소 저장고에는 플라스미드와 인공효모유전체에 유전정보를 저장해 둔 박테리아, 바이러스 샘플들이 가득했고, 주로 식량으로 활용 가능한 식물의 씨앗이나 배아가 냉동보존제에 담긴 상태로 수백여 종이 들어있었고, 간단한 유기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화학 실험장비도 있었다.


“겉모습은 전함인데 내부는 발전소 딸린 연구시설이구만...”


배 앞쪽의 16인치 100구경장 포나 뒤쪽의 포처럼 생긴 레일건은 매스 드라이버, 즉 우주 궤도상으로 간단한 위성이나 운반체를 올리기 위한 용도였으나 일단 포탄도, 장약도, 그리고 추진해서 올려야 할 물건도 없는 상태라 당장 써먹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자위용 무장으로 써먹자니 또 쓸데없이 크기도 했고... 그나마 강선이 없고 장탄통에 물려 물자를 궤도에 올리는 빈 탄은 꽤 있으니 여차하면 아무 화약이나 채워 쏘면 그럭저럭 이 시대에는 쓸 만한 무장이 되기는 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사영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당장 배를 복구하는데 필요한 금속과 기계, 장비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고, 연료와 전력, 그리고 생물자원만 어느 정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어느 정도 생산중인 전력도 원래 배의 출력에 비한다면 매우 부족한 것이었고, 배의 기능 일부만 유지하는 것에 급급한 수준이었다. 배의 기능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나머지 원자로들도 가동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급한대로 이쪽에 있는 가공 장비 몇 대로 조금씩 필요한 부픔과 장비를 만들 수는 있겠으나, 배에 필요한 수준의 철과 금속 부품을 확보하려면 몇 세기는 걸릴 것이었다.


“결국 사람을 모아 잘 먹이고 잘 가르쳐 기초 과학과 공학부터 새로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배를 짓다시피 하는 것이 훨씬 빠르려나..”


조선시대 사람들을 고용해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해주면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지간한 종합 대학의 대학원 정도는 돌려 척척학사, 석박사를 잔뜩 만들어야 했다. 그 인원들로 연구개발을 돌려 공장도 짓고 제철소도 만들고 원자력 발전소도 만들고 하려니 잠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혼자서 맨몸으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다. 이 몸뚱이에도 마음이라는게 있다면 말이지만.


일단 나는 냉동되어 있는 생물 샘플들 중 갈색거저리, 흔히 밀웜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해동시켜 녹말과 효모추출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녹말과 물을 적절히 배합 후 가열하고 그것을 재료로 플라스틱 통을 찍어내듯 녹말 통을 찍어내 효모추출물 분말과 녹말을 포장하고, 배 내외부를 점검하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박규수와 홍희근은 멀리 공주에 있는 공충감영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운 마량진으로 가서 조정에 올릴 장계를 작성했다. 바로 그 조정을 발칵 뒤집어엎은 그 장계였다.


“너무 사실대로 쓰자니 조정에서 믿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없으니 난감합니다.”

“아닐세. 이양선의 출현이 잦아지고 있으니 가감할 것 없이 사실대로 적어야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방비를 하지 않겠는가?”

“허나...저런 양선에 어찌 방비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조선이 가지고 있는 무력, 아니 저 청국이 가지고 있는 각종 병장과 병법을 다 동원하더라도 쳐서 이기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최소한 말은 통하지 않는가. 천행으로 아직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아니하였는지, 그 쪽도 곤란한 상황에 쳐해 있으니 잘 구슬려 회유해 본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네.”

“그렇습니다. 허나 저 배에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도저히 생각이 나는 것이 없는데... 전에 이 곳에 왔었던 양선은 통상을 요구하며 어부들에게 약과 식량, 그리고 마령서 재배법을 알려주고 갔다 하니 어쪄면 작은 도움에도 크게 기꺼워 하는 것이 저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길 바랄 뿐일세. 이 근처는 바닷가라 그나마 먹고 사는 문제는 조금 나았지만, 조선 천지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 아닌가. 솔직히 저 배에 대어 줄 만한 물자가 있을 것 같지 않으이...”

“저도 내려오는 길에 보았습니다만, 심각하더군요. 저 멀리 그 배를 보고 그 뒤로는 말을 계속 달려 이 근처 마을 상황은 어떤지 제대로 보지는 못 하였습니다만...”

“그럼 내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내가 공주 감영을 비운지도 벌써 이레가 다 되어가는구만. 나는 슬슬 복귀해서 일을 좀 해야 할 것 같으이. 여기 내가 서찰을 써 줄 터이니, 이 근처에 저 이양선의 도래로 놀란 백성들이 있는가 한번 보고, 그들을 위무해 주시게나. 내가 곧 다시 와서 직접 살피겠다고 말 해 주시게나.”


그렇게 장계를 한양으로 올려보낸 후, 홍희근은 공주 감영으로, 그리고 박규수는 주변 마을 몇 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홍희근이 공충 수영에 연통을 넣어 준 덕분에, 이 지역 출신 군관 두 명이 박규수와 박규수의 가노들 일행에 추가되었다.


닷새동안 말을 천천히 몰아 돌아보면서, 박규수는 이곳 또한 올해 유난히 식량난이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비로 포목과 쌀을 챙겨왔는데, 가는 곳마다 쌀 한 됫박, 포목 한 필이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서 오시라면서 잡아끄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으리, 나으리, 주무시는가유?”

“누구유?”


먼 길을 돌아다니고 피곤에 쩌든 박규수 대신, 군관이 먼저 반응했다. 그 소리에 비몽사몽 눈을 뜬 박규수는 방문을 열고 답했다.


“무슨 일이더냐?”

“혹시 어린 사내 종이나 계집 종이 필요하지 않으신가 해서유.”

“...종?”



이미 내려오는 길에 어린 아들이나 딸을 종으로라도 좋으니 데려가라는 곳도 열댓집이나 되었다 보니, 박규수는 그 말만 듣고도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 집도 저녁때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집이었고, 아이들은 바짝 마른 채로 배만 두꺼비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으니 아마 박규수가 내놓은 쌀 됫박이 아니었으면 일가족이 아사하거나 동사한 채 줄초상 치르고 있었으리라.


“흉년을 당해 육십 노모를 부양할 방법이 없구먼유. 열두 살 먹은 아들과 열 살 딸이 있어유. 이대로 가면 쟈들도 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구먼유. 값은 오늘 주신 쌀로 충분하니까유, 데려가서 밥만 잘 먹어주세유...”


울지도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아비의 말에 오히려 박규수가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고 들었었는데 그게 진짜 ‘좀’ 나은 것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아직 아사한 시체들이 길거리에서 썩어가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곧 공충 감사께서 직접 마을마다 돌며 상황을 보고 위무하러 오실 것이오. 조금만 더 버텨보시오.”

그런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박규수는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분노했다. 이딴 꼴 바꾸어 보자고 그렇게 공부하고 책을 본 것이 아니었는가. 도대체 효명세자는 왜 그리 일을 벌여두고는 채 시작도 하지 못하고 그만 요절해 버린 것인가.


그나마 아이를 팔겠다고 한 집은 좀 나은 편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지나던 한 마을의 조금 외진 집에서는,


“빠트리지 마러, 빠트리지 마러. 밥달라고 안할게”


하는 울음 섞인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려 급히 들어가 보니, 우물 옆에 한 대여섯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아이들 둘이 엄마를 붙들고 울고 있었고, 엄마는 우물에 기대어 앉아 망연자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광경도 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물어보려 해도, 엄마는 정신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아이들만 꺼억꺼억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라, 박규수가 가노들에게 말을 하려 했다.


“너희들은 어서...”

“넵. 미음을 쑤어 오라는 말씀이십죠.”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터라 가노들의 움직임도 빨랐다.


아이들과 엄마가 너무 마르고 탈진했기에 급히 가노들을 풀어 죽을 쑤어 먹이고 나서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군역을 나갔다 지난 해 죽었고, 사흘째 아이들 먹을 것이 없어 굶다 이렇게 살면 무얼하나 싶어 같이 우물에 빠져 죽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눈물은 말랐고, 몸도 마음도 말라있던 아이들의 엄마는 이 나간 죽 그릇을 쭉쭉 빨고있는 아이들을 보며 다시 목이 메였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물 담을 오를 힘조차 없더이다.”


우물 주변 낮은 담을 넘을 힘조차 없어 쓰러져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붙들고 혹시 자기들이 밥 달라고 해서 그런 것인가 생각하여 서럽게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박규수도 한양을 떠나 내려오는 길에 비슷한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환곡은 신청하지 않는가, 신청이 어려워 그런 것이라면 대신 서신을 써 주겠다 물어보았더니 돌아오는 답은 더 처참했다. 봄에 빌려 가을에 갚는데, 이자를 3할, 연 이율로 따지면 무려 60%에 가까이 받아 쳐먹기에 차라리 빌리지 않고 굶어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남은 40%에서 소작세나 전세, 즉 논밭에 붙는 세금을 떼이고 나면 사실상 남는게 없으니 차라리 환곡을 갚으라고 뒤지게 쳐맞는 것보다 그냥 굶어 죽는 것이 곱게 죽는 길이라 하였다. 또한, 빌려줄 때는 오래 묵고 상하고 돌과 모래가 섞인 잡곡으로 빌려주고, 받아갈 때는 새로 수확한 쌀만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듣고 나니, 당장 상소를 올리고 다시 출사하여 다 엎고 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그나마 이 곳으로 내려오니, 그래도 홍희근이 온 뒤로는 수령들이나 관원들이 대놓고 고리대를 놓지는 못하고 있으나, 환곡을 줘야 할 곡창조차 비어버렸으니 어차피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이양선의 출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기대하는 듯 했다.


재작년에 왔던 이양선에서 마령서(감자)라는 것을 키우는 법을 알려줘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 온 배는 무슨 난을 겪었는지 피는 좀 흘리지만 더 크고 강해보이니 뭔가 다른 먹을 것이나 일거리를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 백성들의 의견이었다.


박규수는 이런 이야기들을 적어 공주 감영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답장을 받은 박규수는 마을 사람 몇과 함께 다시 사영의 배로 향했다.


“민심은 천심이라. 적어도 이 근방 사람들 민심은 확보해둬야 그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잇겠지.”


자고로 민심 확보에 가장 좋은 것은 식량을 푸는 것이었다. 의류나 농기구, 의료 지원이나 집, 학교등을 지원해 주는 것도 좋겠으나 일단 거기까지는 시간도 능력도 모자랐으니.


사영은 원자로에서 작업을 하다 배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급히 인간형 몸을 끌고 줄사다리를내려 그들을 맞이하였다. 박규수와 군관은 저번에 봤던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들은 마을 사람들인 것 같았다.


“공충 감사께서 이 글을 전하고, 마을 사람들도 몇 데려가 보라 하셨습니다.”


박규수는 기름종이로 싼 편지를 내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번에 내가 한문에 약하다고 했던 때문인지, 한글로 적힌 편지였다. 홍희근의 편지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조정의 결정이 늦어질 것 같다. 미안하다.


지금 마을 사람들 사정도 딱하고, 그 배의 사정도 딱하니 이야기한대로 식량을 주고 삯꾼으로 써 보는게 어떻겠는가. 조정에서 양이들과의 교역을 막고있으며 청나라 눈치를 보고 있으니 최대한 안걸리게 하라. 걸리면 책임은 내가 최대한 지겠다. 조정에서 청나라 예부에 물어보고 어찌 할지 결정한다니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게 해 두라.


내 글솜씨가 별로라서 조정 신료들에게 잘 안 먹힌 것 같다.


미안하다.’


홍희근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는 편지였다. 중앙 정부에서조차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예부에 문의를 넣고 그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은데, 지방관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을 결정하다니. 어느 정도 배가 복구되고 나면 몸에 좋은 것이라도 만들어 주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보답을 해야 할 것 같다.


“편지 잘 보았습니다. 공충 감사 영감께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따로 전하실 글은 없으신지요.”

“지금은 없습니다. 뒤에 저분들은 누구신지요?”

“아, 마량진 근처에 사는 마을분들입니다.”


그리고는 박규수가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근처 마을을 둘러보고, 상황을 보니 가장 급한 것이 식량입니다. 아니, 근처 마을뿐 아니라 조선은 지금 식량이 몹시 부족한 상황입니다. 식량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최소한 인력은 충분히 지원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럽시다.”


박규수가 말하자 수군 군관이 손짓을 해 저 뒤로 빠져있던 사람들을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대충 상투같이 말아 올렸거나 떡지고 삐친 머리 아래에는 전반적으로 쌔까맣게 타고 깊은 주름이 있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고생이라는 단어를 얼굴로 표현하면 저런 생김새이지 싶었다. 처음 나를 보고 놀랐는지 저 멀리, 여차하면 바로 도망갈 기세로 가있던 사람들은 수군 군관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좀 안심이 되었는지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저기, 저는 장돌석이라구 해유. 배에 먹을것과 땔감을 주고 일 시킬 사람을 찾고 있으니, 한번 가보라 하셔서 왔슈.”


개중에 좀 젊은 사람이 나서서 천천히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상태는 좀 나았지만, 긴 시간동안 가난과 영양 부족에 시달린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대부분 입고 있는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겠거니 싶은, 회색과 검은색, 황토색이 섞이고 헤어진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천 쪼가리들이었다. 그나마 돌석이라는 사람은 상태가 좀 나았지만, 나머지는 앙상하게 마른 몸에 팔다리 근육이 겉으로 다 보이는 지방 한점 없는 호리호리한 다리를 달달달달 떨며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건강해야 일을 할 터인데, 상태가 많이 심각하군요.”

“아니에유, 이래뵈도 통뼈라 몸 쓰는 일은 뭐든 할 수 있구먼유.”


사영은 잠깐 고민하다 박규수와 이야기했다.


“기근이라도 들었습니까?”

“씨 뿌릴 때 가뭄 들었다가 그 다음에 홍수가 들이쳐 올해 농사는 망한 탓이 크지요. 그나마 이 마을 사람들은 바다하고 뻘에서 먹을 것을 좀 건질 수 있어서 하루에 한끼는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구요?”


이거 뭐 배 복구보다 사람 목숨부터 복구해야 할 일이다. 일단 마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더 해보아야겠지만, 이것 때문에 홍희근이 자신의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람들을 보낸 듯 싶기도 하다. 농경사회에서 겨울에 식량을 얻을 방법은 거의 없으니.


“그래두 저번에 이양선이 와서 감자 농사법도 알려주고 해서 그 덕도 좀 보았구먼유.”

“이양선이 감자 농사법을 알려주었다구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저번 봄에 왔던 영길리 배 암허스트 호에 한문을 할 줄 아는 독일인 선교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감자 농사법을 새로 알려주었고, 시기도 적절하게 올해는 기온이 낮아 고구마보다 감자가 꽤 잘 자랐던 모양이었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의료 지원도 해 주고, 이것저것 새로운 문물도 가르쳐주고 떠난 적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사영이 왔을 때에도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대해줬었나 보다. 밥주고 약주고 책 주는 이양선이라니. 어찌 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사영 또한 겉모습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존재이고, 내용물은 배와 기계인데 적대감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암허스트호와 그 선원들에게 감사하며, 사영은 마을 사람들과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와 할 일, 삯에 대해 이야기했다.


“적어도 백명 이상은 일하러 나올것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유. 한 겨울에 집에만 있어봤자 새끼줄이나 꼬고 짚신이나 만드는 것 외에 뭐 있겠슈?”

“삯은 식량하고 연료로 드릴겁니다. 처음 2주간은 일단 배우기만 하시고, 일은 2주후부터 배워가며 시작하시죠.”

“밥하고 땔감 주신다면야 뭐든 좋지유. 듣자하니 쌀은 아니라고 하던데 어떤건가유?”


녹말에 효모를 풀어 배양 후 열처리를 거친 가루는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뜨거운 물에 풀어서 한잔씩 나누어주자, 조금 짭짤하고 뒷맛이 찝찝하지만 고소한 맛이 나는게 꼭 미숫가루에 메주 가루를 섞은 것 같다는 평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내놓은 다른 한 가지 식량도 의외로 평이 좋았다.


“이건 처음 보는 벌레네유?”


갈색거저리 애벌레, 흔히 말하는 밀웜이었다. 쪄서 말린 밀웜을 내놓으며 걱정했지만, 한두개 집어먹어 본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상당히 겉 껍질은 단단했지만, 땅콩하고도 비슷하고 약간 건새우 맛도 은은하게 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밥 먹는것보다 굶는게 더 많은 조선에서, 벌레는 흔한 식량자원 중 하나였다. 맛이야 상관 없이, 탈만 나지 않는다면 조선인들은 벌레를 거의 간식이나 준 식사처럼 먹어치웠던 것이었다. 물론 밀웜의 겉모양이 호감이 가는 것은 아니나, 그 맛은 그런 사소한 것을 덮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조선에서 단백질은 항상 부족한 영양소였고, 밀웜은 그 단백질을 꽤나 채워줄 수 있으면서 지방 함량도 상당했기에 포만감도 있었다. 사영은 밀웜을 나누어주며 집에서도 쉽게 키울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알려주었다.


배가 복구되는 대로 다른 삯도 추가로 지급할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신이 나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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