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 사가 - 1부 별의 조각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거물현
작품등록일 :
2022.07.21 18:13
최근연재일 :
2023.03.31 18:30
연재수 :
112 회
조회수 :
4,044
추천수 :
64
글자수 :
411,114

작성
23.02.06 18:30
조회
26
추천
0
글자
8쪽

97화

DUMMY

혹시나 해서 쓰러진 사람들을 한 명씩 살펴봤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흑갈색 머리칼에 피부색이 진한 갈색인 것이 이 마을 사람들 같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죄다 마을 사람들뿐이고 해적은 한 명도 보이지 않지? 저항할 틈도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으···.”


화르륵 소리를 내며 불타는 방갈로 너머에서 들린 신음 소리에 뒤렉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뒤편으로 갔다. 불꽃이 넘실거리는 모퉁이를 돌아서자 뒤렉보다 몸집이 세 배나 큰 남자가 온몸이 피로 물든 채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다. 생기 없는 눈으로 겨우 뒤렉을 본 남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여보시우! 정신 차리시우!”


뒤렉은 남자에게 다가가 옷을 찢어 상처를 살폈다.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배와 가슴에 칼날이 꿰뚫은 자리에서 피가 꿀럭꿀럭 솟아 나왔다.


“조금만 참으시우.”


뒤렉은 애런의 가방에서 바지를 꺼내 남자의 상처를 꽁꽁 싸맸다.


“으···, 노..옴들···, 카..나우 찾···, 커헉!”


남자가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


“해적놈들이 뭘 찾는다는 거우?”


뒤렉이 남자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그가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헉···, 헉···, 카나..우로···, 흐···, 모코를···, 쫓아갔···, 으···.”


“카나우? 모코? 허어, 이게 무슨 말인지···, 가만···, 해적놈들이 카나우라는 것을 찾는다는 거우? 모코를 쫓아서?”


남자는 자꾸만 위로 넘어가려는 눈동자를 가까스로 끌어내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이 어디로 갔소?”


“흐어···, 저어···.”


남자는 무거운 쇳덩이를 든 것처럼 부들거리며 손을 들다가 털썩 내려놓았다. 그와 함께 등뒤애서 와르르 소리를 내며 방갈로가 무너졌다. 뒤렉은 피송곳니를 들어 튀어오는 불똥을 막았다.


“여보시···.”


돌아보니 남자는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려고 한 방향과 시선이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향하고 있었다. 뒤렉은 남자의 눈꺼풀을 눌러 눈을 감겨주고 고개 숙여 애도했다. ‘이발디께서 날 이끌어 당신 죽음을 지켜보게 하셨으니 내가 그 유언을 들어주리다. 부디 영면하시우.’ 밤하늘을 보고 방위를 확인한 뒤렉은 피송곳니를 고쳐 쥐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반지가 정한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는 규칙 따위를 지키려고 아자니를 숨겨? 그런 어리석은 미신 때문에 아자니를 죽게 만들다니 정말 용서할 수 없어. 나자리아도 그레이힐 사람들도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애런은 거칠게 검을 휘둘러 눈앞에 거슬리는 나뭇가지들을 마구 베었다.


‘그래! 여기가 섬인지 육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적이 드문 숲속인건 분명해. 당신이 신처럼 떠받드는 반지가 어디 한번 신랑감을 잘 찾아보라지!’ 애런은 손가락에서 나자레스를 잡아 빼고 주위를 돌아봤다. 달빛이 닿지 않아 먹지처럼 새까만 나무 그림자를 향해 반지를 힘껏 던졌다.


떨어진 자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 너머에서 툭하고 반지가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성질 괴팍한 꼬부랑 할아범이나 만나라지.’ 애런은 벌써 나자리아에게 복수한 생각이 들어 가슴 한구석에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성큼걸음으로 숲속을 걸으며 아직 다 삭히지 못한 분을 나뭇가지들에게 풀어 대는데 쏴아 하고 나뭇잎을 흔드는 산들바람에 실린 멘드라이 꽃향기가 애런 앞을 스쳐갔다. ‘아자니?’ 거칠게 손발을 놀리다 멈칫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애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늘 그녀에게서 나던 꽃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항상 네 곁에 있고 싶은 내 마음이야.’ 아자니가 반지를 줄 때 한 말이 떠오른 애런은 허겁지겁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여기쯤인 것 같은데, 저긴가?’ 애런은 반지를 던졌던 곳에서 뒤가 급한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네 발로 걷는 짐승처럼 이리저리 수풀을 짚어가며 찾았지만 손에 걸리는 건 작은 돌멩이들뿐이었다. ‘에잇! 젠장!’ 애런은 나무에 기대앉아 씩씩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고 바닥을 짚는데 닿는 감촉이 남달랐다. 한 움큼을 쥐어들고 펴보니 손바닥 안에서 달빛을 받은 늑대머리가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네가 남긴 정표라서 버릴 수가 없구나. 그렇다고 마냥 갖고 있을 수도 없고···.’ 애런은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반지를 들여다보던 애런은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왼손 약지에 끼웠다. ‘이건 반지의 선택이 아니야. 아자니에 대한 내 의지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애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나무뿐이었지만 어디든 상관없었다. ‘나자리아에게서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애런은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도대체 왜들 아자니를 그냥 두지 않은 거지? 아비라는 사람은 자식을 노예로 팔고 와스프는 소나 말처럼 대하고, 듣도 보도 못한 백작이란 작자는 결혼을 하겠다고 납치를 하질 않나, 나자리아에 거미까지, 다들 아자니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어. 그 애가 그리니어라서?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거라고! 아자니는 그저 빵 굽는 걸 좋아하는 상냥한 아이일 뿐이란 말이야.’ 애런을 붙잡으려는 듯이 내민 가지들이 싹둑 잘려 나갔다.


‘하나 더, 그 아가씨 말이다, 다른 곳에선 될 수 있으면 그 머리칼을 감추거라. 그리고 웬만하면 테세이아는 가지 말거라. 그리니어는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여길 떠나려고 마음먹은 이상 아가씨의 안전은 전적으로 네게 달린 게야. 할 수 있겠느냐?’ 애런은 클라우드가 물수제비를 가르쳐 주며 한 말을 떠올렸다.


‘스승님은 이렇게 될 걸 아시고 물수제비를 알려주신 건가? 후우, 이젠 다 소용없게 됐어. 그날 내가 갤런드와 싸우지 않고 아자니랑 약속을 지켰다면 우린 메리치에서 예전처럼 잘 살고 있었을 거야. 프라나 쓰는 법을 배웠다고 우쭐해져서 복수할 마음을 참지 못했어.’ 거칠게 휘두르던 검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화이트 브릿지에서 무리하게 싸우지만 않았어도 리케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거미가 아자니를 해치는 일도 없었겠지. 검기만 믿고 나선 내 잘못이야.’ 애런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엄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엄마의 증표인 그 목걸이만큼은 죽을 때까지 간직하려고 했는데 허무하게 잃어버리다니. 이렇게 될 거였으면 대모에게 줘버리고 당장 아자니를 데려오라고 할걸. 결국 엄마도 잃고 아자니도 잃어버렸어.’ 애런은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아빠의 검을 쥐었던 손이 다른 이의 손처럼 낯설어 보였다.


‘누구 탓을 할 게 아니야. 난 아자니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나 망쳤어. 모든 게 나 때문이었던 거야.’ 숲에 들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온갖 밤의 소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주위를 채웠다.


‘나즈에게 돌아가야 해.’ 애런은 검을 넣고 걸어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모닥불에서 화가 치밀어 나자리아를 노려봤을 때 그녀는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나즈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려고 용기를 냈는데···, 난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응?’


저만치 앞에서 나뭇가지에 걸린 회색 천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주변에 갈기갈기 찢어진 천조각들이 더 있었다. 나무에 걸린 천자락이 흔들거릴 때마다 시원하면서도 아련한 향기가 났다. ‘이건 나즈의 향낭 냄새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으아아악!”


캄캄한 나무 그늘 너머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는데 맞은편에서 검은 옷에 검은 가면을 쓴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엘더 사가 - 1부 별의 조각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안내 (9월까지) 23.03.31 8 0 -
공지 각 회마다 삽화를 넣을 예정입니다 23.03.12 14 0 -
112 112화 23.03.31 11 0 9쪽
111 111화 23.03.27 13 0 8쪽
110 110화 23.03.24 20 0 9쪽
109 109화 23.03.20 19 0 9쪽
108 108화 23.03.17 15 0 8쪽
107 107화 23.03.13 15 0 9쪽
106 106화 23.03.10 14 0 8쪽
105 105화 23.03.06 15 0 9쪽
104 104화 23.03.03 18 0 8쪽
103 103화 23.02.27 17 0 8쪽
102 102화 23.02.24 16 0 8쪽
101 101화 23.02.20 15 0 8쪽
100 100화 23.02.17 19 0 9쪽
99 99화 23.02.13 22 0 8쪽
98 98화 23.02.09 21 0 8쪽
» 97화 23.02.06 27 0 8쪽
96 96화 23.02.03 23 0 8쪽
95 95화 23.01.30 26 0 9쪽
94 94화 23.01.27 24 0 8쪽
93 93화 23.01.23 25 0 9쪽
92 92화 23.01.20 27 0 9쪽
91 91화 23.01.16 30 0 8쪽
90 90화 23.01.13 31 0 9쪽
89 89화 23.01.09 30 0 7쪽
88 88화 23.01.06 32 0 10쪽
87 87화 23.01.02 41 0 8쪽
86 86화 22.12.30 41 0 8쪽
85 85화 22.12.26 41 0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