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 사가 - 1부 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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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현
작품등록일 :
2022.07.21 18:13
최근연재일 :
2023.03.3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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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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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DUMMY

“하필 이럴 때 먹구름이라니, 한바탕 퍼붓겠어요.”


녹음 짙은 풍광이 갑자기 회색조로 어두워지자 나자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나무 사이의 하늘을 가리켰다. 먹물을 빨아들인 솜뭉치 같은 구름이 숲 위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애런이 보기에도 비를 가득 품은 것이 바람이 툭 건들기만 해도 굵은 빗방울을 쏟아낼 것 같았다.


“아이들도 있는데 잠시 비를 피하고 가는 게 어떨까요?”


애런의 말에 테아누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더디게 가고 있는데 놈들은 빗속에서도 멈추지 않을 테니 느긋하게 그럴 순 없어. 숲에서 비를 맞는 건 우리한테 익숙하니까 폭우만 아니면 괜찮아.”


애런은 엄마 등에서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커다란 눈망울에는 졸음이 반쯤 담겨있었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은···.”


“애런 게일, 지금 아기들 걱정할 때가 아니야, 당장이라도 놈들과 마주치면 모두의 목숨이 너에게 달려있어. 비 맞고 걸리는 감기 정도는 내가 치료할 수 있으니 넌 긴장 풀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말이 좀 불편하네요. 애런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정신이나 차리라니요. 지금 애런이 느긋해 보여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당사자도 그냥 있는데 옆에서 시비조로 나서는 건 귓속에 가시가 돋쳐서 그런가. ‘무례한’ 나자리아?”


리케가 가볍게 콧바람까지 불자 나자리아는 절로 눈매가 꿈틀거렸다.


“자기 멋대로 사람을 단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행동이 아닌가요? ‘까칠한’ 제브쉬?”


“글쎄? 그쪽이 지금까지 한 걸 보면 ‘무례한’이란 단어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 안 그래, 테아누?”


앞에 가는 테아누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난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해요. 나즈. 리케 말대로 내가 맡은 일에 집중하는 게 맞아요.”


나자리아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고 거보라는 듯이 눈웃음을 짓는 리케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기억을 잃었어도 프라나로 치료하는 건 잊지 않았나 봐?”


“그것도 몰랐는데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 아이에게 연고를 발라주다가 알게 됐어. 내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쓸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몰라.”


“그래도 완전히 잊지 않은 걸 보면 기억이 아주 지워진 게 아닌 것 같다. 치료하는 것처럼 생각이 날만한 계기가 있으면 또 떠오르는 것이 있을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널 보면 바로 뭐든 생각날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솔직히 실망이야.”


“조급해 하지 마. 팔미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면 전부 다 생각날 거야.”


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지금 팔미라라고 했나? 거기에는 정기적으로 우리와 약재를 거래하는 곳이 있는데 마을로 돌아가면 알아봐야겠군.”


테아누의 말에 리케가 눈을 깜빡였다.


“끈기있는 루데나! 혹시 전서구도 데리고 왔어?”


“예!”


무리 중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에마르로 보내는 전서구를 부탁해.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금 연락하는 것이 좋겠어.”


“아쉬람에 집이 있다고 했어요.”


애런의 말에 테아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리케라는 아쉬람 출신 여자가 헤르바니언과 함께 있다.’라고 적었다. 종이를 접으려다가 미간을 모으고는 ‘헤르바니언과 함께 있다’에 두 줄을 긋고 ‘타바나에 있다.’라고 고쳐 썼다.


주근깨가 많은 여자가 가지고 온 새장 안에 부리가 검은 갈매기 한 마리가 있었다. 루데나는 테아누에게 받은 종이를 접어 갈매기의 다리에 달린 주머니에 넣고 새장의 반을 열었다. 갈매기가 긴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고맙긴 한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이 섬이 어디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와.”


“그래도 가족들에게는 아예 행방을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당신이 돌아가기 전에 미리 알리는 셈이 되겠지.”


“우리 모두 무사할 거예요. 어쩌면 그자들을 만나지 않고 바위문까지 갈 수···.”


“잠깐.”


테아누가 말을 끊고 손을 펴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나무들 너머에서 짧고 긴 리듬의 새소리가 들렸다. 테아누가 손을 입에 대고 숨을 불어 다른 새소리를 내자 잠시 후 같은 방향에서 다시 새소리가 들려왔다. 테아누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애런에게 말했다.


“로나가 놈들을 봤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애런은 마른침을 삼키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벌써 마주칠 줄이야.’ 콧등에 톡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터지더니 곧 투두둑 하고 어깨를 두드렸다.


“제길, 비 때문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겠어. 다들 서둘러 이동하고 창을 가진 자들 중 절반은 이쪽으로 모여!”


테아누가 모인 남자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부터 여기 애런 일행과 거리를 두고 이동한다. 적은 저쪽에서 오니 이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신호하면 나와서 한꺼번에 창을 던진다.”


남자들이 지시받은 방향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제브쉬, 당신은 싸움을 못하니 저쪽에서 함께 숨는 게 좋겠어.”


“그래, 너무 위험해. 어서 피해있어.”


리케는 걱정이 가득한 애런의 눈을 보며 ‘넌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그 생각은 점점 애런이 잘못될 것 같은 불안감으로 커지더니 ‘네가 없으면 난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몰랐던 사람인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알고 지낸 시간도 얼마 안 된다면서. 기억이 있을 때 난 이 애를 어떻게 여기고 있던 걸까?’


“뭐해, 어서 가!”


애런이 다그치듯 재촉하자 리케가 눈인사를 하고 남자들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아무리 기억을 못 해도 그렇지 조심하라는 말도 없이 가네요.”


나자리아가 양 손목에 고정시킨 작살날을 확인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케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자 굵은 빗방울이 쏴아- 하고 쏟아졌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제법 따가웠다. 세 사람이 다시 이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로나의 신호가 들렸다. 아까보다 크게 들리는 것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벌써 두 명이 우리와 로나 사이에 들어왔다. 이상하군. 어떻게 정확히 이쪽으로 오는 거지?”


“일단 몸을 숨기죠. 두 명이면 여기서 막아야겠어요.”


애런의 말에 테아누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이고 함께 나무 뒤에 숨었다. 애런은 호흡을 가지런히 하며 언제든 프라나를 쓸 수 있게 대비했다. 잠시 후 가렴처럼 펼쳐진 빗줄기 사이로 나타난 두 개의 잔영이 점점 선명해졌다. 두 사람은 비에 젖어 미끄러운 숲길을 평지를 다니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둘 다 검은 옷에 짧은 뿔이 솟은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한 명은 큰 키에 마른 체형이고 다른 한 명은 작은 키에 몸의 굴곡으로 보아 여자 같았다. ‘여자를 맡아요 나즈.’ 애런이 나자리아와 눈을 맞추고 검을 잡자 테아누가 고개를 젓고 자기를 가리키고는 작게 던지는 시늉을 했다.


애런이 보니 이제 대여섯 걸음만 더 오면 확실히 창으로 맞출 수 있어 보였다. 애런은 기습이 실패하면 곧바로 검기를 쏠 수 있게 프라나를 검에 불어넣었다. 세 걸음···, 두 걸음···, 테아누는 손을 입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걸음을 멈췄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놈들이 이쪽에 있는 게 확실하다며?”


여자의 높은 목소리에서 천진함이 느껴졌다.


“확실히 이쯤이었는데. 이상한걸. 우리가 오는 걸 알 리가 없을 텐데.”


“발자국을 찾아볼까?”


“그런 건 조루 자식이나 하는 거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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