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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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가別歌
작품등록일 :
2012.11.27 07:38
최근연재일 :
2016.12.1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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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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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남협 고검 괴탁주

DUMMY

탁주濯宙는 태생이 벙어리였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은 남과 다를 바가 없으나 오직 말문만은 평생을 트지 못했다. 할 수 없으니 더 하고 싶어 글을 익혔다.

다행히 재주가 있어 이른 나이에 문필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니 출사는 언감생심이라. 세족은커녕 사족도 못될만큼 한미하였으나 나름 토호로 행세할 정도는 됐던 집안은 독자 탁주의 장애로 점차 기울었다.

그래도 탁주의 아비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표국을 운영했던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십 년. 마침내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가장 중요한 표행을 떠났던 아비는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어미가 드러눕고 가솔들은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삼월. 홀로 어미의 장례를 치른 탁주는 봉분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십 년. 몰골은 허름하나 눈빛만은 형형한 사내, 탁주가 하산했다.


탁주가 고향에서 처음 한 일은 한 무리의 사람을 벤 것이다. 시작은 왈패의 한 일수꾼이었다. 놈은 한창 빚쟁이의 딸을 끌어내던 차였다. 행인들은 길을 피하고 놈의 주변으론 기세등등 패거리가 가득했다. 그대로 두면 소녀는 밤맞이꽃(몸파는 여자의 은어)이 될 터였다.

이때였다. 소녀의 어미가 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정을 하다 일당의 발길질에 나뒹굴었다. 돈놀이꾼들에 시달리던 어미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쳤다. 순간 눈에 불똥이 튀었다. 탁주는 잔뜩 분노하여 손때 묻은 검을 뽑아 놈에게 달려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내던지는 모습에 행인들이 우르르 갈라졌다.

놈의 입장에선 기도 차지 않는 일이었다. 마지막 집이니 후딱 끝내고 매향이 품에 안겨 맛난 청주를 먹을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는 와중에 피죽도 못 먹은 듯 얼굴에 버짐이 핀 웬 병신이 나름 화난 표정으로 “어어어······!”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 앞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희극적인지 주변 동료 중 몇은 허리를 꺾은 채 꺽꺽 웃어댔다.


“이런 시부럴 병신 새끼가!”


놀림감이 됐다 여겨 머리꼭지까지 화가 솟은 놈은 단박에 허리춤의 짧은 칼 독니를 뽑아들고 마주 덤벼들었다. 놈의 칼은 정말 먹이의 급소를 노리는 뱀의 이빨처럼 거침없이 탁주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어?”


날카로운 검이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놈은 칼을 떨구며 허물어졌다. 병신이라 여겼던 탁주가 쥔 검이 제 칼보다 훨씬 길다는 걸 잊은 대가였다. 물론 같은 짧은 칼을 쥐었다 한들 이기는 건 탁주가 됐겠지만 이미 죽은 놈이 거기까지 알 리는 없었다.

한편 탁주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놈과 그 놈의 복수를 외치며 달려들던 패거리와 또 그 복수를 한답시고 거리 저편부터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들이닥친 나머지를 죽인 것까진 좋았다. 다들 그를 은인이라 부르며 공손히 대했다.

문제는 관군이 오면서부터였다. 한낮의 대로변에서 살인이 벌어졌다는 신고를 듣고 출행한 관군은 대뜸 탁주를 향해 창을 들이밀며 신분을 밝히라 윽박질렀다.

사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보통의 관군이라면 불문곡직 탁주에게 몽둥이찜질을 놓은 뒤 옥에 처넣고 자신들의 활약상을 부풀려 적은 보고서를 상부로 제출한 뒤 죽든 살든 잊어버렸을 터였다.

문제는 목을 잃고 나자빠진 시체가 서른 구 가까이 된다는 거였다. 그만한 수의 장정을 정확히 목을 베어 죽일 실력과 체력, 그리고 독심까지 갖춘 자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손아귀가 다 축축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체면도 체면이거니와 그간 이놈들이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받은 뒷돈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런 우습지도 않은 대치를 이어가게 된 것인데, 말을 할 수 없는 탁주에겐 칼을 쥐고 달려들던 왈패들보다 권력의 이름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관군이 더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각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서로의 사정 속에 시간을 죽이던 중이었다. 갑자기 탁주가 검을 빼 들고 그에 놀란 관군이 어어,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탁주는 그러거나 말거나 칼끝으로 바닥에 고인 핏물을 찍더니 이내 어느 집 2층 난간으로 뛰어올라 집주인이 널어둔 이불 위로 마구 칼을 휘둘렀다.

구경하던 행인은 물론 관군조차 영문을 몰라 눈뜬장님마냥 버벅이는 동안 탁주의 기행이 끝났다. 그리고 칼을 들어 이불을 가리키는데 글을 아는 몇몇 이가 놀라 탄성을 질렀다. 이불에는,


소생은 양명 괴가의 자손으로 이곳 방지현 토박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게요. 사정이 있어 십 년의 유랑 끝에 이제야 돌아왔소.

한데 이런 경사스러운 날 사사로운 도당 결성, 고리대를 이용한 폭리, 인신매매를 버젓이 일삼아 고향을 좀 먹는 우환을 만났으니 어찌 손을 놓고 있으리오.

배운 것이 검이니 검으로써 말하건대 나는 협을 행하였을 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바 만일 나를 잡아 가둔다면 이 피 묻은 이불보는 곧 결백을 고하는 상소가 되어 민심을 타고 황궁을 향할 것이오.


그랬다. 탁주는 핏물로 이불에 문장을 지어 자신을 해명했던 것이다. 비록 문장 짓기를 업으로 삼는 문장가에 비할 실력은 아니었으나 내용은 명백하고 어투는 담백하니 외려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에 포졸의 우두머리가 새끼 포졸을 시켜 지금의 상황과 탁주의 고변이 적힌 이불보를 현감에게 전할 것을 명하니, 이를 모두 들은 현감은 무릎을 탁 치며 이리 감탄했다 한다.


“어허, 한낱 벙어리조차 일의 옳고 그름을 알고 실천하는 것을 본관은 그저 허벅지에 살 찌는 줄도 모르는 채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으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도다. 여봐라. 가서 그 벙어리 협객을 정중히 청하여라. 아니, 아니다. 내 직접 가도록 하겠다!”


처음 사람들은 그를 방지현의 벙어리 협객이라 하여 방지아협舫地啞俠이라 불렀다.

다시 십 년이 지나고 그가 방지현을 넘어 남부 전역을 돌며 협행을 잇자 호사가들은 탁주가 탁월한 무예와 기이한 성정으로 동부를 주유한다 하여 달리 동유東遊라 불리는 관천맹풍에 비견할 만하다며 그를 남부 제일의 협객, 즉 남협南俠으로 추존하고 그 별호를 민초의 억울함을 고변하는 검이라는 뜻의 고검告劍이라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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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협 고검 괴탁주 16.12.10 197 1 7쪽
15 동유 관천맹풍 한굉 16.12.04 113 1 5쪽
14 강일백 매무기 +1 15.02.24 252 1 5쪽
13 사기沙記 13.12.27 173 2 5쪽
12 입타상루立唾上樓 13.04.23 255 2 10쪽
11 Race Syndrome -0- 13.04.22 185 1 4쪽
10 황해(荒海) 13.03.09 305 1 3쪽
9 인생 제길 솔로 +1 12.12.26 239 1 1쪽
8 콜라주Collage +1 12.12.13 410 1 7쪽
7 으 아니……. +1 12.12.03 353 1 5쪽
6 오르골(Orgel) +4 12.12.01 669 3 20쪽
5 청소왕의 Clean&Clear - 부제 : 본격진지뻐ㄹ글 +2 12.11.29 501 3 8쪽
4 홍란(1) +2 12.11.29 361 3 5쪽
3 토선생총전, 여는 마당 +2 12.11.27 315 3 4쪽
2 추행록(1) +4 12.11.27 707 2 4쪽
1 6:40 +2 12.11.27 535 4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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