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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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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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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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시국사범 (1)

DUMMY

“어머, 이게 뭔 일이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꼬마 도령이 청암정까지 행차를 다 하셨어?”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뛰어 들어오면서 내게 호들갑을 떨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긴 한복이 유니폼인가? 생각하는 사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를 반기던 그녀의 표정이 이내 마치 집나간 자식 돌아왔을 때처럼 글썽거렸다.



“아, 예.. 그간 안녕하셨어요?”



어색하지만, 나는 우선 상식적인 선에서 인사를 했다.


가만. 근데, 이 여자의 말대로라면.. 내가 지금 여기 사는 게 아닌가?



“에엥? 아니.. 도련님, 너무 오랜만이셔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존대를 하시고 그래요. 저예요. 저. 예령 이모.”



젠장. 모른다. 모른다고. 누군지 정말로 하나도 모르겠다고!



“아, 예.. 너무 오래간만이라 제가 좀 어색해서요.”



머리를 한 번 긁적여줬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같이 발가벗고 목욕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도련님도 참, 나 정말 섭섭하네.”



읭? 그게 무슨.. 아무리 봐도 40대 전훈데, 내가 왜..


더군다나 그걸 저 서릿발 같은 할망구가 내버려 뒀다고?


나는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다봤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 평생 있어본 적 없는 매뉴얼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머? 도련님 참 이상하시네. 내가 내 젖 물려 키우고, 7살 때까진 같이 씻고 그랬잖아요.”



내가 민망한 듯 어리둥절 하자, 그녀가 답을 내놓았다.



“아, 예.. 흐흐. 그, 그쵸.”



젠장. 유모 같은 분이셨구나.



“예령아. 벌써 그게 15년 전이다. 비싼 밥 먹고 흰소리 할 거면, 금천댁한테 가서 주혁이 먹을 밥상이나 좀 내오라고 해. 근데.. 너는 여태 안 씻고 뭐해?”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어정쩡하게 일어서 있는 사이.


단아하게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던 할망구가 나를 보고 잠시 이상해 하더니, 이내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며 말했다.



“아, 네.. 선생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발랄한 이모다.


예령이모는 내 밥상을 부탁하러 나가는 중에도 소파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나를 내 방 쪽으로 슬며시 밀어줬다.


그리고선 곱게 눈을 찡긋하는 모습이라니.


10년만 늙었으면..


순간적으로 나는 몹쓸 생각을 해버렸다.


전생에서 담배는 물론 술도 안 하고, 여자조차 별 관심 없던 내가 몸이 건강해지니 미쳤나보다.



‘쓰읍. 정신 차리자. 정신. 앞으로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게 태산인데, 지금 뭐하고 있는 짓인가!’



나는 스스로를 독려하며 툇마루를 개조한 안채 오른쪽의 복도로 향했다.


그리곤 그 복도 끝의 방문을 열었는데..



‘와.. 이건 또 뭐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떻게 한옥을 개조해서 이런 공간이 나올 수 있지?


별채를 통으로 고쳐서 만든 것까지는 짐작을 하겠다.


그런데 욕실과 침실, 서재와 거실까지 칸칸이 자리 잡은 방들의 구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세 칸씩 열십자로 확장을 한 건가? 아니면 칸칸이 겹으로 확장을 한 건가?


전부다 한옥의 특성 상 아주 넓지는 않지만, 보기보다 천정도 높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열어서 확인한 곳은..


옷 방이었다.


쳇. 이 시대에 이런 옷 방을 별도로 가지고 있다고?


게다가 걸려 있는 것마다 안감에 유명 디자이너들의 자수가 새겨진 양복과 코트들이다. 그것도 계절별로 수십 벌.


청바지에 티셔츠, 잠바, 츄리닝.. 캐주얼도 종류별로 한 가득이다.


이쪽 벽면은 정장 구두부터 운동화까지 온갖 종류의 신발들로 빼곡하고, 여기 이 큼지막한 화장대 서랍들은..



‘스르륵..’



허. 시계다. 대체 이게 몇 개야? 내가 아는 브랜드보다 모르는 브랜드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럼..



‘스르륵.. 스르륵..’



넥타이와 넥타이 핀, 그 아랜 팔찌하고, 브로치인가?


이건, 무슨 단추 같고, 이건 웬 꼬챙이에 장식을.. 니미. 이런 건 아예 용도도 모르겠다.



‘아, 이건 알겠네. 이건 분명히 손수건이다, 손수건!’



나는 그나마 아는 것이 있어 안도하면서도, 뭔가 구차하고 초라해지는 더러운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게 그냥 손수건이 아니라 가슴 포켓에 꽂는 포켓 치프 라는 것을 알았을 땐, 그나마 익숙해져서 괜찮았지만.



‘이 밑은 속옷하고 양말들이고.. 엉? 이건 무슨 서랍장이..’



나는 애써 무심한 척 다음 칸들을 살펴보다가, 화장대 서랍장을 2:1로 나누고 있는 오른쪽 공간을 주시했다.


그 서랍장은 보통 높이의 윗 서랍 하나와 나머지를 통으로 합쳐 하나의 문을 달아둔 형태였다.



‘스르륵.’



나는 먼저 윗 서랍을 열었다.



‘염병.. 두 개는 차 키가 확실하고, 하나는 오토바인가?’



전부다 혀를 내두를 만한 값의 수입 브랜드들이다.



‘이건 차량 설명서고, 역시 이 키는 오토바이가 맞네.’



나는 영문으로 된 설명서들을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게 그걸 이해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놀랐다.


그 망나니 놈을 패줬을 때도 젊은 몸의 순발력에 감탄했는데, 머리도 그런가 보다.



‘아니, 근데 국사학과라는 사람이 뭔 영어를 이렇게 잘해?’



뭣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약간의 두통이 스치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하면 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영어로 된 책자를 읽고 이해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 진기한 경험이었으니까.



‘자.. 그럼 마지막으로 여기는..’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좋은 연장을 얻은 것처럼 나는 기분 좋게 마지막 문을 당겼다. 그런데.



'덜컹!'


‘어라? 뭐가 걸렸나?’



어찌 보면 금고 문짝 같이 생긴 그 문은 무언가에 걸린 듯 열리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쪼그려 앉아 손잡이 부근을 살피다가, 우측 측면에 설치된 다이얼을 발견했다.



‘대체 이게 뭔데..’



나는 잠금장치가 분명한 다이얼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별 생각 없이 떠오른 숫자에 번호 키를 돌렸다.



“끼릭.. 끼리릭..”


‘0.. 9.. 2.. 이 친구 생일인가? 뭐, 아니면 이 몸과 머리에 새겨진 습관 같은 거겠지.’


“6. 철컥!”



무심히 돌린 번호에 서랍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부가 철재로 만들어져 금고가 틀림없는 그곳에는..


어림잡아 수 천 만원은 되어 보이는 현금 다발과 손바닥 크기의 1킬로짜리 금괴 22개가 있었다.


‘골드바’라고도 하는 저 금괴의 시가가 80년대 후반이면, 내 기억에 개당 한 천만 원쯤 되니까..


‘지랄! 금값만 2억 2천이다!’



나는 멍하니 금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앞에 나란히 놓여있던 2장의 메모를 집어 들었다.



- 할머니. 등록금하고, 하숙비랑 용돈 쓸 거 조금만 빌릴게. 취직해서 꼭 갚을 테니까 걱정 말고. 나머진 좋은 데 써. 그동안 키워줘서 고맙고, 마지막까지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이제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약속 지키고. 주혁 올림-



미친다. 이게 그나마 대학 등록금에 하숙비, 지 용돈까지 챙기고 남은 돈이라고?


거기다가 이 시계들하고, 차, 금괴는 별도고?



-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키마. 하지만, 난 나대로 니 애비 무덤 앞에서 했던 약속도 지켜야겠다. 달에 용돈 30, 생일날 금붙이 하나. 20년 고정이다. 가져가던 말든 알아서 해. 할미 죽고, 네 손 안타면, 누구든 가져다 쓰겠지. -



뭐? 달에 30? 허! 이 할망구야. 요맘때 공무원 생활 시작했던 내 장조카가 받은 게 18만원이야. 내가 그 숫자가 하도 친근해서 기억을 한다고. 기억을!


가만, 그나저나 이 할망구.. 손자랑 싸웠나? 메모 보니까 거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나간 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두 사람 다 얼마나 차고 넘치길래 이런 돈지랄을.. 에라이, 씨!



‘탁. 탁.’


- 휙! -



나는 메모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일어서며, 금고 문을 집어 던지듯 닫았다.


잠금장치에 걸려 제대로 닫히지 않은 금고문이 앞뒤로 오가며 텅텅거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이젠 내 할머니와 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영 씁쓸했다.


전생의 나도 특별히 부족함을 느끼며 살진 않았지만, 태생이 그런지 전국구 깡패치곤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다.


워낙 내 주머니에 있는 것보단 호기롭게 동생들 주머니를 채워주는 걸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뭐, 덕택에 따르는 동생들도 많았고, 내가 양원이랑은 다르다는 객쩍은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필요할 땐 없어서 또다시 개새끼처럼 주인집을 얼쩡거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악순환은 계속됐다.


그나마 출소 때마다 내 한 몸 뉘일 작은 집이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는데.


하..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있는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어딘지 알고 언젠지 알아도, 그저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곳.


문득, 나는 옷 방 한 면을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다른 나를 발견했다.


180대 중반은 되어 보일 것 같은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와 긴 다리를 가진 비율 좋은 청년.


게다가 저 얼굴은 비록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남한 최고의 예기(藝妓)였던 김지아 여사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보태, 한국대학교 국사학과를 다니고, 그 어려운 영어까지 척척 알아먹는 엄청난 두뇌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자란 부유함까지.



‘염병. 다 가졌네. 다 가졌어. 응! 이런 걸 두고, 다 가졌다고 하는 거지. 그래. 좋아! 좋다고!’


- 털썩! -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화장대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래.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다 가졌으니까, 이제 이걸 가지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써 제끼며 살면 되나?


뭐, 이 정도면 내가 죽기 전에 바라던 대로, 차고 넘치게 사람답게 살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데..



“후..”



나는 차분하게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그리곤 다시 거울 속의 청년, 김주혁을 바라봤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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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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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5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90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5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22 21화 6월 10일 (1) 23.05.20 229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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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5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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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3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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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13 12화 태풍 속으로(3) +1 23.05.15 266 8 11쪽
12 11화 태풍 속으로(2) +1 23.05.15 273 9 9쪽
11 10화 태풍 속으로(1) +1 23.05.14 318 10 11쪽
10 9화 시국사범 (5) +3 23.05.14 319 9 11쪽
9 8화 시국사범 (4) +1 23.05.13 324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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