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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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작품등록일 :
2023.05.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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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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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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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명의 친구

DUMMY

피아노를 치기로 한 지, 3일이 지났다.

학교는 평소와 같이 다녔고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노헌은.


“한 달에··· 30만 원?!”


피아노에 손가락 하나 닿지 못했다.


“대여실은 제 용돈으로 감당 못 할 것 같은데요?”

【확실히 중학생 용돈으론 비싸긴 하지.】


피아노 선생님도, 이제야 시작할 용기도 갖춘 그들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피아노.

마음 놓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가 않았다.


“문화 센터에도 전화해봤는데 예약이 꽉 차 있대요.”


시청에서 운영하는 문화 센터, 피아노 연습실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어선지 항상 예약이 꽉 차 있었다.


【학교 음악실은 허락을 못 받았고···.】


하다 못 해 돈을 주고 빌리는 대여실을 알아본 거였지만, 노헌의 지갑이 버텨주질 못했다.


【부모님께 말해보는 건 어때?】

“아뇨 그건 좀···.”


어째선지 현묵이 부모님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노헌은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처음에는 그저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하는 효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현묵이 지켜본 노헌의 집 분위기는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대표적으로 노헌과 부모님의 대화가 그랬다.


“왔니?”

“네.”


“저녁은?”

“먹었어요.”


“용돈 필요하니?”

“아, 괜찮아요.”


형식적인 대화.

가족의 대화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불편하고 딱딱한 대화는 마치 비즈니스 사업을 보는 듯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왜 동생을 대하는 태도는 또 다른 거야?’


이나은.

노헌보다 2살 어린 여동생.

그녀가 부모님과 대화할 땐 분위기가 또 달랐다.


“엄마! 나 오늘은 학교에서~”

“아 정말? 우리 딸 대단하네!”


“아빠! 이번 주 주말에~”

“좋지! 어디 갈까? 바다?”


재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헌과 나은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

그렇다고 노헌을 방치하는 건 아니었다.

얼굴을 보면 안부를 묻거나 기본적인 대화를 하곤 했으니까.


이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수두룩했지만, 현묵이 노헌을 만난 건 이제야 일주일.


‘당분간은 좀 더 지켜봐야겠어.’


남의 가정사는 항상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



피아노.


솔직히 노헌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친구 리나의 전문 분야라는 정도.


그녀가 연주한 「아라베스크」는 노헌의 심금을 울렸지만, 직접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어차피 안 되니까.

실력도 그리고 기회도.


그런 노헌에게 한 피아니스트가 제안했다.

시작의 「아라베스크」를 쳐보자고.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가르쳐준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 아닌가?

하지만, 습관이 된 걸까, 노헌은 반사적으로 거절해버렸다.


그런 그를 설득시키기 위한 현묵의 노력.


피아노를 못 쳐서 거짓말쟁이가 될 거냐는 협박.

자신의 레슨비가 얼마라는 자랑.

마지막으로 「아라베스크」를 곁들인 진심 어린 조언.


사실 협박이든 자랑이든 조언이든 노헌의 마음에 와닿는 건 없었다.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웃으며 넘기면 그만이고, 그의 레슨비가 비싸도 전공자가 아닌 노헌에겐 쓸모없는 정보일 뿐이었으니까.


그저 마지막,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가 베푸는 호의를 노헌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설까?’


노헌이 피아노를 치기로 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저 그것뿐이었다.


【―헌아?】

“아,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노헌은 정신을 차렸다.


【리나라고 했던가? 그 친구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아! 한 번 물어볼게요!”


노헌과 같은 동네에 살던 이리나.

피아노로 유명한 그녀라면 이 근처 피아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해서 보낸 문자.


[우리 동네에 피아노 자유롭게 칠 수 있는 곳 있어?]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있어, 근데 왜?]


리나에게 온 문자에는 희소식이 담겨 있었다.


“있다는 대요?!”

【하, 진짜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드는 의문.


‘그런데 내가 찾아봤을 때는 안 보였는데? 대체 어디지?’


노헌이 여러 곳을 떠올려봤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때 다시 울리는 진동.

휴대폰을 확인하자 리나가 한 위치를 찍어 보낸 것이었다.


“어? 여긴···.”


낯이 매우 익은 장소, 노헌도 어렸을 적부터 자주 놀러 갔던 곳.


【왜? 여기가 어딘데?】


그곳은 바로.


“리나네 집인데요?!”

【···어?】


지금은 프랑스로 유학 간 리나의 본가였다.


두 남자가 당황해하는 사이, 또 한 번 울리는 진동.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 해놨으니까 피아노 치고 싶을 때 와서 쳐도 돼. 참고로 늦은 시간에는 안 되는 거 알지?]


‘아직 내가 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샌가 확정된 장소.

모든 준비가 끝난 순간이었다.



♪♪♪



학교가 끝난 방과 후.


“야야, 피방 고?”


여느 때와 같이 준모가 말을 걸어왔다.

평소였다면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 피시방으로 향했을 노헌이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미안, 나 오늘은 좀 바쁘다.”

“뭐? 네가 바쁘다고? 너 학원도 안 다니고 공부도 안 하잖아!”


마치 들으면 안 될 걸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준모.


“아니 학원은 안 다녀도 공부는 하거든?”


비록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항상 평균은 넘기는 노헌이었다.


“그래서 뭐하느라 바쁜데?”

“뭐··· 피아노 연습?”

“아 맞아, 너 몰래 피아노 독학했다 했지? 근데 어떻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이 다닌 나도 몰랐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친구를 뒤로한 채, 노헌은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바로 리나의 집.

노헌이 사는 아파트를 지나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전원주택이었다.


푸르른 마당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소나무, 벽돌로 지어진 2층 주택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확실히 잘사는 집들이 음악을 많이 하는구나.】


보자마자 툭 내뱉는 현묵의 감탄.

마치 남 일인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노헌은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도 프랑스 파리까지 유학 갔다 왔잖아요?”

【그거? 우리 집 돈으로 갔다 온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현묵.


“그럼, 누구 돈으로 갔다 온 건데요?”


이윽고 그가 담담하게 내뱉은 한 마디.


【장학금.】


오로지 그의 연주로 따낸 결과였다.


【우리 집은 그다지 잘 사는 편은 아니었어.】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드는 예체능 특성상, 불리한 현묵의 환경.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그로선 장학금을 따내는 것만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무튼, 들어가서 연습이나 하자.】


그 말을 끝으로 노헌은 리나의 집으로 발을 들였다.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온 집 안.


【왜 이렇게 익숙해?】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거의 맨날 놀러 왔거든요.”


리나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기에 심심한 리나를 놀아주는 건 항상 노헌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노헌의 집보다는 그녀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 나중에는 현관 비밀번호도 알려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리나네 부모님은 항상 밤늦게 들어오셔서 웬만하면 마주칠 일 없을 거예요.”


노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느 방으로 향했다.


“여기가 연습실이에요.”


오직 리나를 위한 피아노 연습실.

전체적으로 따듯한 색으로 이루어진 방, 한쪽 벽엔 악보집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이 붙어있었고 천장 중앙, 밝은 조명이 비추는 곳에.


검은 그랜드 피아노가 우뚝 서 있었다.


【연습하기 정말 좋은 환경인데?!】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하는 현묵.

그의 목소리에서 피아노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책장 쪽으로 가보자.】


그의 말을 따라간 책장 앞.

현묵은 유심히 관찰하더니 이내 노헌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바이엘···?”

【그래, 오늘부터 그 책으로 연습할 거야.】


피아노의 기초를 다지는 책, 바이엘.

독일의 피아니스트, 바이어가 만든 피아노 연습곡 모음이다.

사실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딴 바이어가 맞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바이에루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기에 바이엘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바이엘은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책에 편성된 모든 곡을 치는 건 비효율적이라, 기본적인 것만 치고 넘어갈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앞에 앉은 노헌.

악보 대에 바이엘을 올려놓고 건반 덮개를 열자, 희고 검은 건반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이름은 알고 있어?】


시작된 천재 피아니스트의 개인 과외.


“에이, 아무리 피아노를 안 쳐봤지만, 기본적인 건 학교에서 배웠죠.”


노헌은 천천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



노헌이 겨우 8개의 건반을 눌렀을 때, 현묵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게 처음 친 사람의 손 모양이라고?’


피아노를 칠 때는 손 모양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떻게 누르냐에 따라 건반 하나하나에 곡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감정의 깊이를 조절할 수가 있다.


습관이 무섭다. 라는 말이 있듯 처음 부적절한 손 모양을 습득한다면 누군가 교정해주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가는 것이 손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손 모양은―’


현묵의 눈에 너무나도 낯익은 노헌의 손 모양.


“선생님?”

【어, 어?】


갑작스러운 부름에 현묵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전에 선생님이 제 몸으로 연주했을 때처럼 따라 해봤는데, 비슷한가요?”

【뭐? 따라 했다고?!】


노헌의 발언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장시간에 걸쳐 길들어야 할 손 모양을 그저 그때 한 번 보고 따라 한다니.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현묵의 것을.


“이상하게 선생님이 피아노 쳤을 때 그 느낌이 손에 남아있어서요.”


그 순간, 현묵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콩쿨, 시상식 위에 서 있는 노헌의 모습을.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노헌은 이제 막 시작한 초보자,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시작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려면 우선 피아노와 친해져야겠지.’


현묵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달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헌아, 피아노의 건반은 몇 개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

“음, 한 번 세볼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반을 세기 시작하는 노헌을 말리곤 현묵은 말을 이었다.


【총 88개로 이루어져 있어.】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모두 합쳐 88개.

7개 옥타브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피아노의 특징이다.


【저마다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게, 마치 사람 같지 않니?】


사람도 모두 목소리도, 모습도, 성격도 다르다.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누구보다 잘 맞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중 후자,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 그들을 우리는 친구라고 부른다.


【너는 지금부터 이 88개의 건반과 친구가 되는 거야.】

“네? 친구요?”

【정확히 말하면 친구처럼 대하라는 거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연주해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한 명 한 명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누구보다 편안한 친구가 된다.


‘만약 이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차갑고 무거운 콩쿨의 무대 위.

수많은 시선이 닿는 그곳에서 피아니스트는 마치 혼자가 된 기분이 든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혹여나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을 할 때.


현묵의 손끝엔 88명의 친구가 있었다.

누구보다 오래 지내고, 함께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이.

그들이 곁에 있었기에 현묵은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시작을 두려워하는 그의 제자.

어른스럽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중학생.

노헌에게 친구가 생길 차례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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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작의 아라베스크 +1 23.05.12 317 13 12쪽
2 피아니스트와 중학생 +1 23.05.11 396 10 12쪽
1 하늘에서 떨어진 피아니스트 +2 23.05.10 687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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