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추풍검 - 5분 후 갈라져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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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렉스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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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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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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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DUMMY

"선후부장한테서 들었다."


관윤이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세존이 인천항으로 가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역시 구무림으로 갈 생각인가요."


"나는 세존의 마음 같은 건 몰라. 세존이 가라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하지만··· 대성불 계획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상 이제 그럴 수만은 없겠군."


관윤이 손을 천천히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다 멸망해서 사라진 다음에 화산파의 광명을 찾아봤자 무엇 하겠는가. 어리석은 짓이지, 그건."


"세존의 대성불 계획은 진실이라는 거군요."


"그래, 모르는 척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조금 난폭하게 싸우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 말에 관윤이 끌끌 웃었다.


"서영은 아직 너에 대한 노기를 풀지 못했을 거다. 내가 설득할 테니 어서 길을 떠나라."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기절한 삼도문 석산검수 진서영의 곁에, 삼도문의 보도寶刀인 피안사신검이 부서진 채로 떨어져 있었다.


그즈음 관윤의 다른 동료들도 투기를 거두었고, 나와 관윤, 진서영 이외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선후부 조장의 입으로 대성불 계획이 진실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으니, 이제 정말로 세존을 찾으러 떠나야 할 때다.


"그럼 관윤, 아선당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내게 맡겨라. 내가 목숨을 걸고 너 대신 아선당주를 수호하마."


관윤이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관윤을 뒤로 하고 송하에게 다가갔다.


"송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예, 대협, 어떤 일이시죠?"


"부처 불佛의 진명을 내게 빌려주지 않겠어?"


나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작협에서 축통작사라는 사람한테 받은 건데, 이걸로 진명의 첨삭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네? 정말로요?"


"응, 한번 시험해 볼까?"


나는 송하가 갖고 있던 진명 몇 가지를 내 진명에 붙였다 떼었다 해보았다.


"멸아심약운명재성."


반지의 힘 덕에 나도 송하처럼 작명공을 쓸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는데,


"우와, 굉장해요."


송하는 방긋 웃으며 걱정 따위는 기우라는 반응을 보였다.


"축통작사는 도구 제작의 전문가라고 해요.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나중에 꼭 만나보고 싶어요."


"그럼 내가 나중에 만나게 해줄게. 나 이제 갑급들이랑도 아는 사이니까."


"정말이죠? 약속이에요."


"그래."


나는 송하에게서 부처 불佛의 진명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위급한 순간에만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는 대협 걱정은 안 해요. 당주님이나 대협을 걱정하죠."


송하가 옆을 돌아보는데 루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아."


"이월."


"···하하."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미안, 또 나 혼자 가봐야 할 것 같아."


"흥."


루아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대체 사과만 몇 번째 하는 거야."


"그러게."


"그렇게 마음대로 할 거면 그냥 가버려."


"···."


"···죽지만 마."


루아의 말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물론이지. 난 안 죽어."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루아에게 등을 돌렸다.


"모두들 살아서 만나자."


3식 진 비람.


바람에 몸을 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그마하게 펼쳐진 아선당의 풍경과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하늘을 박차고 인천항을 향해 올곧게 날아갔다.


***


노요한.


나다.


나의 이름이다.


신무림 세존.


모든 인간이 나를 그리 칭하며 떠받든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민중에게 바친 결과다.


그러나 이제는 노쇠했고 몸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신무림의 일은 비로자에게 일임했고, 나는 이제 누구의 부축도 안내도 받지 않고 먼 길을 떠나려 한다.


56억 7천만 년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신무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니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일에 치여서 사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낡아서 빛바랜 기억들···.


구무림에서 살던 시절, 갖은 멸시를 받았다.


그들에게 혁신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안정만이 필요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누구에게도 뇌단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혁신을 원하는 자들만 모아서 뇌단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구무림인들은 여전히 나와 뇌단법을 원하지 않았다.


나를 항상 경계하고 깎아내렸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구무림에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항상 기득권층이었다.


모두 구무림맹주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구무림이란 그 정도로 폐쇄적인 사회인가?


늙은이들의 탐욕적인 노름과 비정상적인 성벽을 받아주어야지만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10년간은 무공을 배웠고, 다음 10년간은 무공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10년을 늙은이들과 같은 곳까지 떨어지는 데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새로운 무림을 만들어 순수한 마음가짐을 가진 자들과 다시 시작하리라.


그렇게 나는 내륙으로 건너가서 대중에게 뇌단법을 선보였다.


비가 내리는 언덕 위에서 번개를 쪼개는 신기를 선보이고, 새롭게 제자를 받아 그들에게 뇌단법을 가르쳤다.


그전에도 내륙에 무공의 존재가 다소 알려지기는 했으나 소수만 누리는 취미에 가까운 것이었고, 호신술, 건강 유지 등의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나의 뇌단법은 기존의 무공과는 달랐다.


내게는 자부심, 자신감이 있었고,


내륙의 모든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운동을 잘하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요리를 잘하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노래를 잘 부르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처세술을 배우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이성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나라를 올바르게 이끄는 법을 배우고 싶나?


···뇌단법을 배워라.


나는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았다.


삶의 모든 소망을 이루는 방법을 정말로 뇌단법의 학습 하나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진 구무림 시절 펼쳤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구무림 시절과는 달리, 나는 단숨에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얼마 가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땅이 신무림이라 불리고, 나는 신무림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시 신무림 수뇌의 양아들로 들어갔고, 그의 성씨를 이어받아 노요한이 되었다.


수뇌 또한 나의 제자였고, 나는 신무림을 무공 중심의 사회로 차차 만들어 나갔다.


뇌단법을 널리 퍼뜨리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한 활동이었으나,


무공을 배울 준비가 되지 않은 어수룩한 사람부터 배울 자격이 없는 사악한 사람까지,


모든 인간이 무분별하게 무공을 배웠고,


신무림은 점차 폭력의 시대가 되어갔다.


왜냐,


뇌단법이라는 무공을, 폭력을 추구할수록 업무 능력이 향상되니까. 꿈에 그리던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상향평준화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타인과 경쟁을 해야 했고, 대중은 더더욱 뇌단법과 무공에 빠져들었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대인이라면 필수로 배워야 할 교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니 자연히 폭력의 시대,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과유불급.


종류를 불문하고, 중독이란 좋지 않은 것.


모두가 뇌단법과 무공에 몰두하는 이 흐름을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금세 포기했다.


이 흐름은 이제 나조차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현재의 불편한 몸에서 탈피하고 강건한 신인류가 되어가는 기쁨에 휩싸여, 뇌단법과 무공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민부터 상류층까지, 신무림의 주민 모두가 나의 제자이자 지지자가 되었고,


머지않아 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모든 것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돈이나 명예, 권력 따위는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젊음마저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이 그리워하는 순수한 어린 시절, 활력 넘치던 젊은 시절.


그랬다. 내 힘은 시간마저도 거스르는 경지에 이르렀고, 언제든지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중년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어느 날 고층 빌딩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내 발밑에 놓인 세상을 바라보며,


그 세상에서 하루가 멀다고 싸움을 일으키고,


뇌단법과 무공이 퍼지기 전보다 점점 불행해지는 신무림인들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원한 세상인가?’


사람들을 위해 개발한 뇌단법이, 사람들끼리 상처입히는 수단으로 변질된 이 세상이?


나 노요한은 이 정도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아니, 예상은 했다.


다만, 포기했을 뿐.


전 인류가 나를 찬양하는 기쁨에 휩싸인 나머지,


'그래, 이 흐름은 이제 막을 수 없다.'


그런 변명을 대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한 대가였다.


그때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에겐 자부심도, 자신감도 있는데, 왜 흐름을 막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뇌단법은 뭐든지 가능한 무공이 아니었던가?


뇌단법만 배우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수십 년 동안 떠벌리고 다녔는데···


결국 뇌단법은 전지전능하지 않았고,


나 역시 한낱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회귀,


아직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젊은 날로 돌아가고픈 욕망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는 해보았지만,


온 세상의 시간을 되돌려서 다 같이 옛날로 돌아가는 일은 뇌단법으로는 불가능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하.


···병신에다 사기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젊음을 유지하기를 포기하고,


형벌로써 내 손발에 노화라는 무거운 수갑과 족쇄를 채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후 나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괴로워했고, 자괴감에 빠져 살았다.


이대로 죽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이라도 끝내자.


다소 거친 방법이 될지라도, 이 흐름을 끝내자.


그리고 기왕 끝낸다면 좋은 방향으로 끝내자.


그런 생각으로 나는 사방팔방으로 조사를 하고 다녔고,


그 결과 떠올린 수단이 바로 대성불, 전 인류의 성불이었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나는 영원히 최선에 닿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끝내는 대성불은,


영원히 차선일 뿐이다.


전 인류의 성불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나는 괴로워하고 있을 테지.


그리고 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할 테지.


이젠 얼굴마저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한결같으니까.


영원히 늦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내게 삶의 기쁨을 준 존재.


나의 마음에 꽃을 피운 존재.


그 시절 그대로, 영원히 어린 존재.


회귀의 갈망과 번뇌 따위는 겪지 않는 존재.


오늘같이 우울한 날에 찾아가도,


30년 전처럼 즐겁게 반겨줄 존재.


“하나.”


그 이름이 나의 입에서 튀어나올 즈음,


나는 어느새 그리운 거리 앞에 있었다.


나와 제자들이 동고동락하며 살았던 곳.


뇌단법의 발상지.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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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살의 23.10.09 36 2 15쪽
110 천수살법 이천 5 23.10.06 43 2 14쪽
109 천수살법 이천 4 23.10.05 29 1 11쪽
108 일대제자 23.10.04 31 2 13쪽
» 집으로 23.10.03 3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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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석산의 색, 매화의 향 2 23.09.29 38 1 13쪽
104 석산의 색, 매화의 향 1 23.09.28 30 1 12쪽
103 대일여래大日如來 23.09.27 46 2 15쪽
102 재회와 결집 23.09.26 34 1 14쪽
101 작명사 협회 2 23.09.25 30 1 16쪽
100 작명사 협회 1 +1 23.09.22 57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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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항쟁의 내막 1 23.09.20 43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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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천마신공 파비야 1 +1 23.09.18 46 2 13쪽
95 발도문 5 23.09.15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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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발도문 2 23.09.11 4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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