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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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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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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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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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하는 날 (6)

DUMMY

150화


“정말 그놈이 우리 딸아이와 그런 약속을 했다는 말이냐? 그놈이... 그럴 놈이 아니지 않느냐!”

“루지먼트 공, 우리 본체 놈도 사람의 자식인데, 어찌 죽었다가 살아 돌아와서 느낀 것이 없었겠소? 놈도 반성이라는 걸 약간은 했소. 물론 그대의 눈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어 보이긴 하겠지만.”

“그렇소! 그래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따님의 간절한 호소에, 그 도살자 놈도 결국 뜻을 굽혔던 것이오. 지금 그대가 본체 놈을 만나러 가 보았자, 말 한 마디 섞어 볼 수도 없을 것이오. 놈은 따님과 한 약속 때문에, 마주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달아나 버릴 것이오.”

“공이 원하는 것이, 도주하는 본체 놈의 못난 모습을 보면서, 실컷 비웃어 주는 것이오? 놈을 대외적으로 망신을 주어, 분풀이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공이 원하는 것이냔 말이오! 고작 그따위 자잘한 망신 주기로, 아리따운 따님을 잃은 슬픔이 치유될 수 있을 성싶소?”

“나... 나는... 단지... 어흐윽...”

“루지먼트 공, 그딴 놈에게 사죄를 받는 일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하나! 공이 정 원한다면 그리 전하겠소. 따로 조용히 그대와 워린 공을 찾아가, 정중히 사죄를 하라고 권해 보겠소. 물론 그놈이 우리 얘기를 귀담아 들어 줄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오.”

“아그네스 양이 그 미친놈에게, 비록 단 한 번에 한한 것이지만, 그대를 피해 달아나 달라 간청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소? 루지먼트 가문의 모든 역량을 다 바쳐도, 놈을 죽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그녀가 깨달았던 거요. 죽어 가는 와중에도! 효심이 지극한 그녀는 당신과 친족들이 자신의 복수를 하겠다고 애쓰다가 몰살당하는 미래를 떠올렸던 것이지!”

“두려웠을 게야. 자신 때문에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렴, 그렇고말고. 죽는 게 두렵다고 딸의 복수를 포기할 영감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당신에게 자신의 진심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할 방법을 고심했던 것이오. 그래서 자신의 복수를 포기해 달라는 유언을 당신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놈에게 직접 한 번의 수치스러움을 요구했던 것이었지. 그쪽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겠소?”

“그렇소. 따님이 보통 영민한 게 아니었소. 만약 그 옹졸한 놈이 정말로 당신 앞에서 그런 수치스러운 꼴을 보였다면 말이오. 그놈이 과연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을 성싶소? 그럴 리가 없지! 남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두려워, 변명을 해 대느라 정신이 없었을 게요!”

“맞아! 보나 마나 온 세상에 ‘죽어 가던 아그네스 양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내가 겁이 나서 도망쳤던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지껄여 대고 다녔을 것이 눈에 선하오.”

“아마 따님은 그대의 귀에 놈의 구질구질한 변명이 닿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오. 론체스터의 개레스 놈과 저기 묶여 있는 늙은 버러지와 함께, 세 현자 중 한 명으로 꼽혀 온 그대가 아니오!”

“그렇고말고! 루지먼트 공 그대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인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게요.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우리의 추론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이오?”


복제 인간들의 열정적인 웅변에 사려 깊은 벨램튼 백작도 홀랑 넘어간 눈치다.


“그대들은... 도대체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오? 로저 놈의 분신이 맞긴 한 거요? 놈의 분신들이 어찌 놈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것들까지 가리지 않고 다 털어놓는다는 말이오? 정말로 그대들이 늘어놓은 말들 중에 거짓이 없는 것이 확실하오?”

“도대체 우리가 한 말 중에 믿기지 않을 만한 부분이 뭐가 있었지? 물론 전부 어김없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딱히 허무맹랑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도 없었을 텐데? 진실인지 아닌지 하는 질문은 왜 한 거요?”

“그러게. 루지먼트 공, 부활 이후의 따님은 그대가 알던 천진난만했던 미소녀가 아니었소! 당신도 느꼈을 것 아니오,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자살 소동을 일으킨 이후부터,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지 않았소?”

“아아아...”

“죽어 본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것이 있소.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세상에 다녀온 자가 순수한 상태의 산 자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소. 거기에다 상식을 초월한 권능까지 얻어 왔는데, 그대의 딸이 어떤 활약을 펼쳤든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겠소?”

“으음...”

“거기다 방금 못 봤소? 우리가 그대를 알아보자마자, 다짜고짜 도망치려 하던 꼴을 말이오. 그대가 분명히 호통까지 치지 않았소? ‘어딜 가려 하느냐, 이놈들!’ 하고 말이오.”

“맞아, 나도 들었어!”

“당신을 만나면 도망부터 쳐야 한다는 생각이 본체 놈의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기에... 분신인 우리들마저...”

“그러니까! 나는 아까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지기까지 했었다니까!”

“나도 나도!”

“우리 본체 놈도 꼴에 기사라고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거지.”

“제깟 놈이 무슨... 기사의 자부심은... 내가 진짜 같잖아서! 꼴값을 하고 있어!”

“그리고 루지먼트 공... 무슨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다 있소? 현자라기보다는 여우나 독사에 가까운 개레스 먼틸리나, 원소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자라고 불려 왔던, 저 늙은 걸레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 당신이지 않소.”

“딸을 잃은 슬픔이 지나치게 컸나 봐. 이 노인도 예전 같지가 않아.”

“그렇긴 하네. 이보시오, 루지먼트 공. 몇 번을 말했지만, 우리는 로저 놈의 분신이오. 놈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는 말이오. 그놈이 만약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강자에게 제압된 채, 매일 그 강한 놈의 뒤치다꺼리에 시달려야 한다면 말이오. 그놈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소? 이 정도로 말해도 못 알아듣겠소?”

“허어... 그렇구나... 로저 놈도 부하로 쓰기 위해, 그대들을 만들었을 터인데... 부하라기보다는, 꼭 반항적인 아들놈들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푸흡... 아들...이라고... 키킥...”

“생각해 보니, 제법 그럴듯한 비유요.”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아비로서 이토록 비겁하고 무능할 수가...”


이삼사오에게 날조를 맡겨 두고 뒷짐만 지고 있던 일 호가 그때서야, 제 차례가 왔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 무슨 어리석은 말씀이오! ‘무엇을 해야 하냐?’라니! 그대는 아비가 되어서, 딸의 갸륵한 마음을 어찌 이리도 몰라줄 수가 있다는 말이오? 아그네스 양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

“당신과 루지먼트 가문의 번영이오! 생각을 해 보시오! 고작 우리 본체 놈 같은 불량배에게 어린 여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이 또다시 일어나서야 되겠소! 그러고도 삼백 년을 넘게 이어 온 명문거족이라 자랑하고 다닐 수 있겠냐는 말이오? 그딴 허울뿐인 명성 따위!”

“크으윽...”

“일 호야, 말이 너무 심하다. 루지먼트 공, 저놈이 우리 본체 놈을 닮아 입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소. 그대가 이해해 주길 바라오.”

“하지만! 저놈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오. 그대야말로 할 일이 정말 많은 사람이오. 일단 후계자를 봐야 하지 않겠소?”

“맞아, 맞아. 저 버러지 같은 거버스 놈도 가문의 번영을 이어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구십을 넘게 처먹고도 계속 애를 싸질렀잖아.”

“그렇지! 저 병신이 최근 칠팔 년 동안 싸지른 애새끼가 무려 열여덟 마리...인가? 뭐, 그 정도 돼. 저 새끼는 불 마법사가 아니라 임신 마법사야.”

“순수한 육신의 성능만 놓고 보면, 그대의 신체가 저 늙은 병신의 몸뚱어리보다 딱히 떨어질 것도 없소. 나이 차이도 무시 못 하니까.”

“맞아, 당신도 할 수 있어. 솔직히 당신이 너무 담백하게 살아서 그래. 저 노망난 똥걸레처럼 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주로서 최소한의 의무는 다해야지.”

“그 말이 맞아. 오즈번 공, 당신 나이가... 아직 일흔도 되지 않았을 것 아니오?”

“일흔은 무슨! 예순을 넘긴 지도 사오 년밖에 안 됐을 텐데.”

“그럼 저 걸레에 비하면 아직 애네! 애!”

“맞아, 아직 젖먹이에 불과해!”

“어쩐지! 젖비린내가 진동을 해 대더군!”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루지먼트 가문 사람들이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모두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이를 부드득 가는데, 평생 현인 소리를 들어 왔던 노백작조차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복제 인간들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푼수 같은 복제 인간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하려던 말을 시원하게 끝마쳐 버렸다.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 아니오. 혹시 모르지. 당신 손주가 우리 본체 놈의 피붙이를 제 집으로 끌고 가서 강제로 결혼해 버릴지.”

“참교육이네! 참교육이야!”

“진정한 정의 구현이로구나!”


상식적인 루지먼트 가문 사람들의 입에서 장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운이, 모 사찰의 이름 높은 특전대를 벤치마킹해서, 편성한 ‘하씨 세가 십팔 하지운진’은 시작부터 만천하에 더러운 명성을 떨칠 조짐을 내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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