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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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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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이유 (2)

DUMMY

“겁나게 지루하구먼그래.”

“음, 나름 유익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장난치는 거지?”


설총은 고개를 저었다.


“현문진인이면, 도문에서는 정통파 중에서도 정통파인 정을파의 수장 아닙니까? 솔직히 작금의 무당은 도문이라기보다는 군문세가에 가까운 곳이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과연 정을파의 수장다운 연설이었습니다. 도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시더군요.”


이제는 도교의 경전이냐? 염천호가 입술을 씰룩이는데, 설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유익한 점이 단지 그것만은 아닙니다. 지피지기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염천호의 눈이 번쩍였다.


“오호?”

“현문진인께서 그 자신을 그리 오랫동안 드러내 주신 덕에··· 그분을 좀 알 것 같거든요.”


설총은 어깨를 으쓱, 들면서 말했다.


“몇 줄 안 되는 글귀 정도로 한 사람을 파악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좀 뼈아픈 말이로구먼. 뭐··· 자네도 알다시피, 이 늙은이가 오죽 바빠야 말이지. 일일이 알아보고 다닐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 말이지.”


염천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림의 대연무장은 과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최소 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연무장이라니. 적어도 천하십이본 정도 되는 거대방파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염천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을 둘러보다 말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일단은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떨···.”


갑자기 염천호가 말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설총은 염천호가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여. 오랜만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글쎄? 실제로 기간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그간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앉아도?”

“되지요.”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던 염천호는 골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따가 따로 보자고.”

“그러지요.”

“서왕 어르신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만··· 인사 한번 드리기가 쉽지 않군요.”

“뭐, 그렇지.”


염천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천하의 무당파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린아가 아니신가. 듣자 하니, 이번 천하지회를 개최하게 만든 사람도 자네라며?”

“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지요.”

“글쎄. 무당이 자네를 통해 엄청난 걸 손에 넣었다고 하던데···.”

“저야, 구르라고 해서 굴렀을 뿐이지 않겠습니까?”


염천호는 한숨을 픽,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염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허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벌써 가십니까?”

“서로 인사를 나눈다든가, 그런 자리는 영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즐거운 시간 보내시게나. 그리고 한 소가주, 자네는 잠시 후에 봅세.”

“살펴 가시지요.”


설총은 염천호가 대연무장을 벗어나기까지 포권을 취해 보인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해서, 무허자. 어떤 볼일이 있어 저를 찾으셨습니까?”


무허는 씩,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뭐, 꼭 볼일이 있어야만 찾는 사이인가? 자네와 나는 거의 형제나 마찬가지 아닌가?”

“글쎄요? 그랬던가요?”

“이거 참 섭섭하군그래.”


설총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약왕서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제게는 더 볼일이 없어진 게 아니었습니까?”

“···이런, 이런.”


무허는 식겁한 얼굴로 주위를 몇 차례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무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전히 무모한 친구로구만. 으하하핫!”


무허가 설총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설총은 그저 무허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설총의 반응을 접한 무허는 이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이거, 영 신뢰를 잃은 모양이로군.”

“처지가 그러한지라.”


무허는 입술을 비틀고 비아냥댔다.


“뭐, 결국 내 탓이라는 건가? 그럴 만하지. 자넨 날 비난할 자격이 있네. 내가 자넬 이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말이야.”

“서로 이용한 거지요.”


설총의 대꾸에 무허는 입을 다물었다. 욕이나 푸짐하게 얻어먹을 각오로 온 것인데. 이거 참, 도리어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친구로구만. 무허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나?”

“사실이잖습니까?”


설총은 어깨를 으쓱, 들었다.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손에 넣으신 물건, 그게 맞습니까?”


무허의 눈이 커졌다. 숨을 고르며 설총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무허는 입꼬리를 들었다.


“···맞네.”

“그렇군요.”


설총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난 사실··· 자네가 나를 좀 더 매도할 줄 알았네.”

“이미 지난 일 아닙니까.”

“용서하겠다, 이런 뜻인가?”

“···글쎄요.”


설총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현보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불러온 점은··· 솔직히 용서가 안 되는데요. 안면에 시원하게 주먹 한 방 날려도 되겠습니까?”

“뭐···?”


멍하니 설총을 쳐다보던 무허가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그렇군, 그랬어. 으하하핫!”


설총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참을 웃던 무허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한 방 빚진 걸로 해주게나.”

“달아두지요.”


무허는 잠시 끌끌거리다가 눈거울을 벗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자국이 남은 눈거울을 닦고 잘 싸서 품에 집어넣은 무허는 비좁은 실눈 사이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실은 송화루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서···. 그걸 확인하러 왔네만, 그럴 처지가 못 되는군.”


무허의 말에 설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들으신 그 이야기, 맞습니다.”


무허의 실눈이 크게 벌어졌다.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설총을 쳐다보던 무허는 피식, 웃었다. 배포가 그야말로 대양(大洋)이로군그래.


“빚쟁이가 된 김에 하나 일러주겠네. 빚을 갚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네.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이야기하는 거니까 말이야.”

“···듣지요.”

“현문진인과 원종대사는 이미 손을 잡은 상태라네.”

“···!”


무허는 설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지회를 선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천하에 딱 셋뿐이지. 그래서 그들을 천하삼절이라 부르는 것이고. 한데 어째서 현현진인이 아니라 현문진인인가? 이 부분이 자네가 이번 천하지회 중에 해결해야 할 의문점이 아닐까 싶군.”


무허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럼, 무운을 빌겠네.”

“···무운을.”


떠나가는 무허를 일별하고, 설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염천호를 찾아야 했다.



* * *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추분의 중추절을 앞두고, 황상 폐하의 황명이 있었다.


‘황태손(皇太孫)을 위해 이번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개복신초례(開福神醋禮: 새로 태어난 황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도교의 의례)를 치르고자 한다.’


황제는 이미 두 명의 황태자를 잃었다. 그 아래로도 네 명의 황자가 채 한 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해버렸다. 공주까지 헤아려보면, 황제는 벌써 아홉 명이나 되는 자식을 잃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새로이 태자의 자리에 오른 유왕이 황태손을 보게 된 것은 그야말로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황자와 공주들이 자꾸만 요절하는 것은, 고작 31세에 갑자기 요절해버린 황제의 사촌 형, 곧 전대 황제인 무종 정덕제의 원혼 때문이란 소문이 마치 정설처럼 퍼져 있는 판국이다.


혹, 전대 황제의 죽음에 현 황제, 주후총의 입김이 닿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불온한 소문 말이다.


애초에, 그런 소문에 ‘원인’을 제공한 건 황제 주후총, 그 자신이었다.


그는 대명제국에서 적통(嫡統)이 아닌, 방계에서 태어나 황위에 오른 최초의 황제였다. 따라서 그의 정통성은 곧, 이미 죽은 이들에게서 비롯될 수밖에 없었다.


‘대례의 의(大禮之議)’.


그것은 대명제국의 조정을 아주 뒤흔들어놓았다.


가문은 계승하지만, 적통은 계승하지 않겠다는 주후총과 방계인 주후총이 백부(伯父)인 효종 홍치제의 양자로 입적해 적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조정을 황제파와 관료파로 양분해버린 것이다.


이 일은 결국, 당시의 내각대학사였던 양정화를 포함한 중신 190명을 파관면직시키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며 마무리되었다.


황제 주후총은 결국, 생부인 흥헌왕을 황고(皇考)로 추존하여 지난 200년간 이어지던 대명제국의 적통을 완전히 종결시켜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하루아침에 190명이나 되는 중신이 사라진 조정은 그야말로 권력의 공백 지대에 돌입하고 말았다.


조정에 비어버린 자리가 무려 190개. 그것은 곧, 혼란─ 역사상 보기 힘든 수준의 대혼란을 뜻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황제 주후총의 원죄이자, 업보였다. 황위에 오르자마자 국정에 대혼란을 초래하고, 190명이나 되는 중신을 숙청함으로써 국력을 크게 쇠퇴시킨 것.


그렇기에 당연히 불온한 뒷소문이 흉흉하게 날 수밖에 없었다. 건강하던 정덕제가 물놀이 도중 물에 빠진 후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것 역시 영 께름칙한 일이었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주후총이 성군인 홍치제의 적통을 거부한 것도···.


어쨌건 간에─


주후총은 황제로서 앞으로의 황실의 핏줄이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심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태어날 황실의 후손들은 모두 건강히 잘 자라나, 황실의 대통을 튼튼하게 이어 나갈 것임을 만천하에 보여줘야 할 의무 말이다.

그래서 그런 기묘한 황명을 내렸던 것이다.


‘개복신초례에 건강한 홍안(紅顔)의 소년과 소녀들을 대동하여 참가하라’는 황명 말이다. 아마도 젊고 건강한 아이들의 기운을 빌어, 황태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것이 이미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던 담하가 제갈민의 손을 붙잡고 황실의 행사에 출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황제 주후총은 그 자리에 참석한 소녀 중, 가장 아리따운 다섯 명을 꼽아 편액을 하사했다. 다섯 어린 꽃들(五苗花)이란 이름으로, 선월빙설운(仙月氷雪雲)의 다섯 글자를 친필로 써서 내린 것이다.


기실, 평범한 사대부 가문의 규수들이었다면 후궁 책봉으로 이어졌겠으나─ 제갈민을 포함한 다섯 소녀는 모두가 군문세가의 자제들로, 조정의 중신들이 보기엔 야인이나 다름없는 소녀들이었기에 그 일이 이뤄지진 않았다.


나이 오십, 지긋한 지천명에 주책맞게도 지학(志學: 15세)도 아직인 어린 소녀들을 후궁으로 삼으려 했던 황제의 행실을 감히 문제 삼는 자들은 물론 없었다.



* * *



“오오! 진짜야? 진짜 연화신산?”

“진짜라니까!”

“오묘화(五苗花)의 그 연화신산이라고?”

“과연, 천자께서 선자옥질(仙姿玉質)이라 칭하실만한 자태로군···!”

“천자께서 하사하셨다는 그 편액, ‘선월빙설운’ 말인가?”

“하기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저 정도는 되어야···.”


연화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당최, 이 얼마나 여유 넘치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본인들이 참석한 곳이 천하지회란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보다 수군거릴 거라면 적어도 좀 더 조용히 말해야겠다는 상식조차 없는 건가?


“아가씨. 불편하시다면 방에 돌아가 계심이···.”


걱정 어린 얼굴로 삼비가 진언하자, 연화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삼비의 말을 정정했다.


“소문주, 겠죠?”

“···송구합니다.”

“염려는 감사하지만, ‘동호’. 한번 생각해보세요. 연화신산은 선향문의 소문주. 작금에 이르러서는 신기천성의 중추나 마찬가지인 곳의 소문주예요. 그런 사람이 이런 자리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면목 없습니다, 소문주님.”


‘동호’─ 삼비(三秘)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연화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 품에서 쥘부채를 꺼내 펼치고 얼굴을 살짝 가린 후 말했다.


“아녜요. 그나저나 참 할 일들이 없는 분들인가 보군요. 여인의 얼굴이나 힐끔거리라고 모인 자리는 분명히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동호, 지금 우리가 천하지회에 참석한 것이 확실하지요?”

“예, 소문주님.”


연화의 말에 그 주변을 서성거리던 사내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내 사내들은 연신 헛기침을 내뱉으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흠! 큼!”

“어흠!”

“어··· 어, 어이쿠! 자, 자네, 이거 오랜만이로군그래.”

“아, 아아, 문주님. 그,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연화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까짓 편액 따위가 뭐라고···. 한심하군요.”

“나름 천자께서 내려주신 편액 아닙니까? 당금 천하에선 다섯뿐이고요.”


연화의 눈썹이 뒤집혔다.


“동호까지 그러긴가요?”

“소신은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동호···. 그 편액, 고작 열네 살 된 어린아이가 받았단 사실은 알고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지 않습니까?”

“떡잎에서 열매를 찾는 멍청이가 아닐는지?”


연화가 불쾌한 얼굴을 하자, 삼비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소신은 그저 자랑스러운 걸 자랑스럽다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가인 중의 가인을 주군으로 섬길 수 있다는 건 가신으로서는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미간을 찌푸린 연화가 한마디 쏘아 붙여주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삼비의 손가락이 연화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연화는 눈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무허자.”

“여, 오랜만이로군.”

“어쩐 일이지요?”

“앉아도?”

“될 것 같은가요?”

“이거, 이거, 좀 야박하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말이야.”


무허는 멋대로 의자 하나를 끌어다 연화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연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요?”

“인사나 좀 하러 왔을 뿐이야.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시라고.”


연화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조금 전처럼 노골적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목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야, 제갈세가의 연화신산과 무당파의 검운이 한자리에 앉은 거니까.


연화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이목이 쏠리면, 누가 이득을 볼 것인가? 그리고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


계산을 마친 연화가 팔짱을 꼈다.


“깨나 여유가 넘치시는 모양이로군요? 무당의 검운(劍雲).”


무허의 눈자위가 살짝 벌어졌다. 오호, 무명(武名)을 언급한다? 손실 계산이 벌써 끝났나. 여전히 계산은 빠르군그래. 무허의 눈이 빠르게 좌우를 오갔다. 과연, 다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 할 말들을 하고 있지만, 무허는 주변의 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무허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여유까진 아니고. 잠깐 짬이 났달까? 그 정도일세. 연화··· 신산.”


‘연화’에서 말을 끌자, 삼비의 주먹에 핏대가 돋았다. 무허의 눈이 그를 향했다.


“자네도 잘 지내셨는가? 삼···호?”

“동호, 입니다.”

“아하, 그랬나? 자네가 동씨였지, 참.”


슬그머니 끈적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무허는 손을 내저었다.


“에이, 장난일세. 왜 그리 심각해? 말했잖나? 그저 인사를 좀 하러 왔을 뿐이라니까.”


손을 내저으며 둘러대는 무허의 태도에, 연화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쪽은 속 편하게 인사나 나눌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요.”


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상체를 숙이는데, 무허가 재빠르게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

“···!”


연화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허는 팔짱을 끼고는, 검지로 제 입술을 가리켰다.


“편하게 들어도 괜찮아. 소리를 조금 가리는 중이거든.”


연화는 삼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삼비는 입가를 가리고 귀엣말했다.


“입 모양과 나오는 소리가 다릅니다. 전음입밀의 수법을 이용해 소문주님께만 다 들리도록 단어 사이사이를 뭉개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상승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수법이지. 한 입으로 두말하기라···. 진짜 될 줄은 몰랐다니까? 옆에서 자꾸 자극을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말이야. 연습 좀 했지.”

“···그렇군요.”

“참, 가능하면 그쪽 목소리는 삼비, 자네가 좀 가려주겠나?”


삼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허는 눈거울 사이로 안광을 빛냈다.


“지금 나는 감시하에 있다고 봐도 무방해. 뭐, 따지고 보면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두 배가 됐지.”


연화는 미간을 좁혔다.


“현문진인에··· 사형들?”

“정답.”

“사형들이라면, 질투?”

“그것도 정답. 뭐, 그쪽 분들은 나와 사부님의 진실한 관계를 잘 모르니까 말이야. 괜히 더 친밀해 보이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 질투할 만하지. 게다가,”


무허는 안 그래도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우리 ‘사부님’이 앞으로는 무당이 아니라 천하를 쥐고 흔들 것 같으니까 말이야.”


무허를 따라 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원종대사와 손을 잡았군요.”

“정답이야.”

“마음이 바뀐 이유는?”

“갚을 빚이 좀 생겼다고 해두지.”

“···한 소가주?”

“에이, 사생활은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마.”


연화는 이제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요?”

“응?”

“처음부터, 현문진인을 무당 밖으로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던 게 아니냐고요.”

“···헤에.”

“현현진인이 없다면, 이번 천하지회의 모든 실권을 쥘 사람은 현문진인뿐이니까요. 천자에게 장문령을 볼모로 잡힌 원종대사야, 현문진인과 손을 잡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고요.”


무허는 말없이 씩, 웃어 보였다.


“현문진인으로서는 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기회였겠죠. 그래서··· 약왕서를 가져갔군요.”

“···그렇지.”

“그래서, 원하는 게 뭐죠?”


무허는 엄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쥐고 빙글빙글 머리를 주물렀다. 진심으로, 무서운 여자라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무허는 머리에 손을 댄 그대로 말했다.


“사실, 제갈이 직접 왔으면···. 그냥 원래 계획대로 밀고 갈 생각이었지. 염라왕이든, 걸협이든, 끼어들면 곤란하거든. 내 계획에는.”

“원하는 걸 물었어요.”


무허는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눈거울까지 벗어 두 눈을 드러낸 무허는 연화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지표를 던져줘.”

“무엇의?”

“정천맹(正天盟).”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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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9화. 염병, 천하 (2) +1 23.12.09 455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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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27화. 간극(間隙) (3) +1 23.12.04 464 8 16쪽
96 27화. 간극(間隙) (2) +1 23.12.03 451 9 13쪽
95 27화. 간극(間隙) (1) +1 23.12.02 474 12 16쪽
94 26화. 쿤달리 (3) 23.12.01 443 8 15쪽
93 26화. 쿤달리 (2) 23.11.30 444 5 16쪽
92 26화. 쿤달리 (1) 23.11.30 481 9 14쪽
91 25화. 역려과객(逆旅過客) (6) +1 23.11.29 473 8 15쪽
90 25화. 역려과객(逆旅過客) (5) +1 23.11.28 463 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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