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낯선 만남
“이거 안 팔고 저렇게 쌓아놓아도 되능교? 걱정 붙들어 매놓고 있을라 해도 마. 이래 해도 되는가 싶어 밤에 잠이 안 온다 아잉교.”
마스크 공장 현장 책임자인 공우식.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작업복을 착용하고 있던 그가 나를 보자 성큼성큼 다가와서 물었다.
주름진 눈가에 광채가 나는 눈동자.
60이 넘은 나이지만 청년의 눈빛을 하고 있다.
생산해 놓으면 곧 출하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반듯하게 포장된 채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제품을 보면서 처음엔 의아했을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창고를 채우는 상품만큼 마음 속도 근심으로 채워졌던 듯.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나중에 한꺼번에 출하될 겁니다. 걱정마세요.”
“아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오 재고가 저렇게 쌓이믄 걱정이 앞들어 간다 아잉교.”
“괜찮습니다. 때 되면 한번에 싹 사라질겁니다.”
여유로운 내 표정을 보면서도 완전히 걱정을 지울 수는 없는 듯.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에서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급여도 절대 밀리는 일 없고요.”
“뭐, 그러면야 다행이지만예.”
그제서야 낮은 한숨을 내리 쉬고는 돌아선 공우식.
생산되어 나온 완제품의 품질관리 작업을 하고 있는 작업자들에게 다가간다.
마치 자신이 사장인 것처럼 총관리자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는 사내.
그 덕분에 공장 돌아가는 일에 큰 신경 쓰지 않고 믿고 맡기고 있는 터.
섬유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형 전문가라고 사모에게서 소개를 받았다.
사모가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거래하면서 서로 신용을 쌓았다 했다.
급한 경우에는 서면 계약서도 없이 서로 믿고 처리하는 일도 잦았다 했으니.
사모도 처음부터 차량용 더스터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성 의류부터 시작해서 아이템이 바뀌다 보니 현재의 기업을 세우게 된 것.
여튼, 생산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7월에 앨리슨 드부아가 예언한 일이 현실이 되고 나면 그때부터 전 세계에서 수요가 쇄도할 것이다.
다시 차를 몰고 인천특수철강으로 돌아왔다.
- ♪♩♬♪~ ♬♪♩♬~
차를 앞마당에 대고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처음 보는 번호.
평상시 같으면 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 보니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혹시 차진구씨 되십니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세요. 저는 쥬유웨라고 합니다.”
“..누구시라고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이름에 다시 물었다.
“쥬유웨라고 샹하이에서 왔습니다. 그냥 유희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뜻밖의 중국 상하이라는 지명에 고개가 갸웃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일까?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셴화그룹(盛华集团)이라는 기업입니다. 본사는 중국 상하이에 있고요. 저는 서울 명동에 한국 지사의 대표로 와 있습니다.”
“예에. 그런데요?”
“선생님 회사에서 냉간압연강대를 수출하신다는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쪽에서도 수입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어느 분에게 소개를 받으셨는지..”
“KOTRA 중국 상하이 무역관에 있는 분께서 인천특수철강을 추천하셨습니다.”
“...그래요?”
“예. 선생님.”
뜻밖의 대답이다.
물론 요 몇 개월 우리 회사가 잘 나갔던건 사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중소기업에 불과하다.
제철이나 철강 이란 키워드만 인터넷에 입력해도 대기업의 이름이 주르륵 펼쳐진다.
물론 ‘제철음식’과 같은 먹음직스런 것들이 같이 섞여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나도 가끔씩 궁금한 마음에 키워드를 넣고 확인해 본 적이 있지만, 한번도 첫 화면에 우리 회사 이름이 뜬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소규모 사업체를 KOTRA 무역관이 소개했다고?
뭐 어쨌든, 기분 나쁘진 않다.
“그래서, 뭘 도와드릴까요?”
“저희가 수입하는 규격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공장을 방문하고 말씀드려도 되겠는지요?”
“그건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당장은 수출품이 밀려있어서요. 한 달에 18톤(ton) 이하라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너무 소량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희도 2분기 수입쿼터까지 모두 채워져 있습니다. 3분기부터 선생님의 회사로부터 수입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공장을 방문하고 캐파(Capacity : 생산능력)를 확인한 후에 가능하면 계약을 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럼 날짜는...”
“우선 저희 사장님께 말씀드려보고 그 후에 알려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전화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금 전화드린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냈다.
아,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차진구란 이름으로 빛을 본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사장이나 고 이사, 아니면 오 부장으로 연락이 올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여튼, 우리회사 생산 물품을 사 가겠다는데 마다할 이유야 없는 일.
한층 업 된 기분으로 사무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 * *
“이렇게 큰 회사가 우리 회사하고 거래하고 싶다고 전화했다고?”
“예. 사장님.”
인터넷에서 찾아낸 셴화그룹은 우리 회사와 견줄 수 없는 대기업이었다.
국내 10대 기업 안에 드는 것 같은 규모.
IT에서 백화점, 부동산에서 철강까지 수많은 분야에 자회사를 가지고 있는 초대형 기업.
철강 분야를 소개하는 페이지만 프린트했는데도 12장을 넘어간다.
역시 사장도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면서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얘네들 혹시 뭐 딴 꿍꿍이 있는 건 아닐까?”
“...글쎄요...”
입가에 흐릿한 웃음을 흘리며 사장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인터넷에서 기업을 확인한 후 내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사장도 느끼고 있는 것.
‘도대체 왜?’
이런 거대 기업이 한참을 뒤져봐야 나올만한 우리 회사에 무슨 의도로?
하지만, 대답이 나올 리 없다.
기껏해야 무역 거래다.
그 이외의 비즈니스를 그들이 제시할 것도 아니다.
아니 무슨 이상한 사업을 제시한다고 해도 거절하면 되는 일.
그렇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없다.
만나서 으레 그랬던 것처럼 무역 거래가 가능한지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뭐, 별일이야 있겠냐? 오라고 해서 기념 사진이나 찍어 놓고 내년 회사 홍보 책자에 올리기나 할까? 이런 대기업에서도 거래 제안이 올 정도로 경쟁력있는 기업이라고 말야.”
“...예.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방문 가능 날짜를 알려달라고 했다고?”
“예. 이사님하고 공장장을 불러서....”
“에이, 그럴게 뭐 있어? 그냥 차 부장하고 나만 있으면 되지.”
나를 올려다보며 사장이 씨익 웃었다.
“차 부장 언제 시간되냐? 난 그냥 당장 내일이라도 오라고 하고 싶은데...”
“...내일.. 말씀이십니까?”
내 표정에서 불편함을 느꼈던지 사장이 슬쩍 입맛을 다셨다.
“뭐, 사실, 와도 거래가 성사될 거 같지도 않고, 그냥 인사하고 사진찍고 보내버리고 싶어서 그러지, 뭐. 헛된 꿈 꾸지 말고 말이다.”
“예, 뭐 그럼. 내일 시간 내 보겠습니다.”
“그래? 어허허허...!”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은 사장.
“괜찮으면 지금 내가 전화해볼까?”
“...아, 예. 사장님. 전화번호 드리겠습니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사장이 내가 건네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어, 그래. 서울이니까 지역번호 02에...”
수화기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숫자를 확인하면서 사장이 하나 씩 버튼을 누르고 있다.
양쪽으로 올라간 입꼬리는 귀에 걸려있다.
그런 사장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얼마나 커다란 성공을 갈망했을까.
자기 딴에는 자수성가 해서 이만큼 키워왔지만,
아직까지 너무나 거대한 사모의 그늘에 있었을 거 아닌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슬좋은 부부처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자존심에 금 가는 일을 겪어왔을까.
사모야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장인 장모, 그리고 며칠 전에 봤던 사모의 먼 친척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칼날이 되어 사장을 괴롭혀 왔을 터.
아내의 비즈니스에 견주어 뭔가 그래도 보여줄 것이 있다는 것을 손에 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내와 주변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결과.
싱가포르의 월드커넥트와 인도네시아의 업체와의 거래도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일로 이어진 우연의 결과 아닌가.
이제는 오롯이 사장이 일구어 놓은 업적의 결과이다.
KOTRA에서 인정하고 중국에 있는 대기업에 소개해 준 것이니 말이다.
“아, 여보세요?”
양 눈꼬리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도록 사장이 웃었다.
“예. 맞습니다. 내가 사장이오.”
등을 의자 뒤에 대고 느긋하게 앉아 사장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괜찮습니다. 몇 분이나 방문하실 계획인가요?”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 본 사장.
“아, 예. 물론 차 부장도 자리에 있을 겁니다. 예. 오후 3시 경 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사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일 세 시경에 3명이 방문한다고 그러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세 시에 맞춰 일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공장장 불러서 대충이라도 청소해 놓으라고 하마. 나가서 남은 일 봐라.”
“알겠습니다.”
사장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내려왔다.
별것은 아니겠지만 좀 걸리는 것이 있다.
아니 걸린다기 보다 좀 궁금하다.
여전히 그쪽에서 처음에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
그리고 통화 중에서도 사장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물론 나도 자리에 있을 거라고...
별 일은 아닐 것이다.
한꺼번에 열 일을 하자니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과 잠이 아닐까?
“차 부장님.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셔야 할 것 같아요. 넘 피곤해 보이는데요?”
무역서류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구한서가 내 생각을 그렇게 확인시켰다.
* * *
중국 셴화그룹의 손님들을 태운 리무진이 도착했다.
영화나 티비 화면으로만 보던 리무진을 처음 본 구한서가 옆에서 ‘와아~’ 하며 놀라워했다.
정차한 차 안에서 내린 젊은 남성.
부지런히 발을 옮겨 차량의 뒷문을 열었다.
마치 영화를 찍는 듯 차 밖으로 검은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날씬한 두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슬며시 몸을 밖으로 내는 여성.
검은 쟈켓에 검은 스커트 차림이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늘씬한 몸매에 품위 있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소유자다.
중국인하면 정신 사납게 시끄러운 이미지를 떠올렸 건만.
상당히 고혹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담은 여성이 사장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사장님.”
그렇게 사장에게 인사를 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사장 옆에 서 있던 고 이사와 강 부장을 보며 목례한다.
공장장과 오 부장까지 본 그녀.
그런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순간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그녀가 나를 향해 발을 옮겼다.
“처음뵙겠습니다. 차 부장님.”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의 한국어 발음으로 나에게 말을 건넨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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