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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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두끼
작품등록일 :
2023.10.3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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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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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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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 3

DUMMY

출전을 앞두고, 인원 점검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해도 뜨지 않은 겨울밤, 병사들은 이른 아침부터 연병장에 모였다. 병사들보다도 일찍 출근한 장교들은 이미 흉갑과 각반까지 찬 채로 구령대 위에서 병사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아직 누비 외투에 생활복 차림이었다. 사령관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휘하 장병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경험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군대로 정말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말인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장병 여러분. 어제 설명했듯이, 지정된 인원들은 전선을 향해 이동할 겁니다. 지정된 인원부터 취사장으로 이동하십시오.”

그간 만사가 귀찮아 보이던 사령관의 친절한 대우에 병사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이즈하는 병사들의 대열에 서서 자신의 제대를 취사반으로 인솔했다.

“만사가 귀찮던 양반이 저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진짜 큰일인가보다.”

이즈하는 병사들의 언행을 지적했지만, 자신도 병사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전쟁을 앞둔 병사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었다. 기대하는 병사, 걱정하는 병사, 관심이 없거나 의연한 병사가 공존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즈하는 기대하는 축에 속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취사 당번이 죽을 한 그릇씩 퍼 주었다. 본래 평소대로라면 귀리 죽이어야 했던 것이 고기가 들어간 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즈하의 소대가 전부 모이자, 그는 배운 대로 식전 기도를 올렸다.

“자, 다들 양식을 내어준 국민을 향해 기도하자.”

이즈하는 평소처럼 ‘양식을 내어준 성역의 천족 정부와 국민을 향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장 천족 정부의 영지를 향해 진군하는데, 자기 영역을 침범당할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긴 미안했던 것이다. 이즈하는 밥을 먹으면서 자신들이 정말 그간 자신을 먹이고 재워준 정부에게 대항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무리 직속 상관이 요구하니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되먹지 못한 일이었다.

정부는 군인들에게 일자리와 숙식을 제공했다. 당연히 그들이 원한 것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외적을 치지 않고, 자신들의 상관을 친다니,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식사를 마친 병사들은 각자 막사로 돌아가 세수하고 장비를 착용했다. 이즈하는 병사들이 제대로 군장을 싸고 전투 준비를 마치는지 확인했다. 경력에 무관하게 병사들은 군장을 싸는 일이 어색했다. 해가 떠오르고, 병사들은 이제는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채 제대 별로 군영 밖으로 나갔다. 나갈 때조차 사기를 북돋는 사령관의 연설은 없었다. 행군 대열은 끝도 없이 요새 밖으로 흘러나왔다. 병사들의 행렬을 따라 보급품을 운반하는 야크들까지 영외로 끌려 나왔다. 소몰이꾼들이 추운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야크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전쟁통이라는 사실과는 관련 없다는 듯이, 날은 맑고 차가웠다. 영내에서 지낸 지 그렇게 많은 날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이즈하는 요새 밖이 어색했다. 지도를 보는 일도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인데 낯선 느낌이었다. 막상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일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신참 장교들이 가장 잘했다. 오히려 요새에서 너무 오랫동안 근무한 장교들은 지도를 보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기상 상황이 그렇게 열악하지 않은 덕분에, 요새 주둔 병력은 익숙지 않은 행군을 그럭저럭 잘 해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자, 병사들은 몇 년 만에 민가로 내려왔다. 이미 민가에는 다른 부대에서 내려온 병사들이 막사를 치고 주민들에게서 이런저런 용품들을 한참 구매하는 중이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소 닭 보듯 했다. 자기네 요새 말고 다른 요새에도 병사들이 근무했다는 사실이 희한했다. 그나마 서로가 다른 부대임을 증명하는 것이 장비를 걸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뿐이었다. 이즈하의 부대는 이미 마을 내에 다른 부대가 주둔 중인 관계로. 산 중턱에 야영지를 편성했다. 병사들은 비교적 평탄한 마을 근처에서 자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만이 가득했다. 울퉁불퉁한 산지에서 잠드는 일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기에 이즈하는 그들의 심정에 동감했다.

아흐레가 지나고, 병사들은 집결 장소인 북부 사령부에 도착했다. 벌써 나가떨어지거나 병드는 인원들이 발생했다. 앞으로 할 일 중에서 행군이 제일 쉬운 일이라면서 몇몇 장교들이 나약한 병사들을 지적했다. 10명도 넘는 인원이 행군을 따라가지 못하고 민가에서 병든 몸을 치료받거나 아픈 몸을 이끌고 요새로 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북부 사령부까지 도착한 병사들은 사령부에서 간단한 간호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요새 경비 부대가 예상보다 하루 일찍 도착함에 따라, 병사들은 간만에 평탄한 사령부에서 야영지를 편성하고 편히 쉴 시간을 얻었다. 아쉽게도, 밥은 여전히 건조식품만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병사들은 하루나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한편, 경비 부대의 장교들은 상부의 명령을 받아 전술 토론회에 참석했다. 지난번 상황 설명을 맡은 귀족 젊은이 대신 중급 장교 하나가 전황을 설명했다. 이미 선발대는 국경선을 넘었다고 한다. 고산지대를 넘어, 간신히 나탈라니아 지부의 국경수비대와 마주한 서리 왕국 정규군은 온갖 촌극을 빚었다. 전쟁이라는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서리 왕국 군대는 지금이 실전 상황인지, 훈련 상황인지 알지 못하고 국경을 열어달라고 국경수비대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적은 화살 세례로 대답했고, 아군이 피를 흘리고 나서야 분노한 군대는 본격적으로 수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리숙한 병사들과 장교들의 추태가 계속해서 보고됐다. 중급 장교의 보고는 분명 참혹한 이야기였음에도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구석이 있었다. 전장에는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다. 적지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 사로잡힌 부대, 산맥을 우회해 수비대를 후방에서 공격하려다가 굶어 죽은 부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아군끼리 벌어진 살육전, 서로 계통이 다른 부대에서 벌어진 병사들의 패싸움, 사소한 말싸움에서 시작된 장교 간 결투, 보급 마차를 도둑질하는 병사들이 처형됐다는 등. 아무리 보아도 서리 왕국 군대는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었다. 사방에서 아군이 죽어간다는 이야기가 어쩐지 괴상한 희극처럼만 느껴졌다. 국왕의 원대한 계획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망가지는지 실감 날 지경이었다.

그나마 서리 왕국 부대의 전력이 지방군에 불과한 나탈라니아 지부 국경수비대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중과부적으로 국경을 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 초보에 불과한 서리 왕국 군대는 언제 싸우는지, 언제 행군하는지, 언제 적의 요새에 깃발을 꽂는지 알지 못했다.

“서리 왕국 군대는 침공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피로 전쟁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중년의 장교는 말을 덧붙였다. 다소 미화된 현실이었지만, 사실이었다. 1000년간의 평화 속에서 전쟁이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 기억하는 것은 천족 정부뿐이었다. 사관학교에서 4년씩이나 배운 용병술이 실전을 만나자 한심한 작태를 보인 것처럼, 전쟁이라는 실제 상황에서 현실이 어떻게 왜곡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즈하가 보고받은 현실은 그가 상상하던 전쟁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는 적과의 치열한 교전과 양측 장교들 간의 계략을 상상했지만, 실제 전쟁은 걸음마 하나 제대로 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서리 왕국 군대와 국경수비대의 다툼은 영웅적이라기보다는 누가 덜 어리석나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수준이었다. 두 세력의 전쟁은 덩치만 큰 어린애들의 싸움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한심한 싸움에 참여해서 한 자리라도 해 먹으려던 자신의 꼴이 무지하고 졸렬하기 그지없게 보였다.

이즈하는 각 부대에게 맡겨진 역할을 그나마 새겨듣기 위해 실망감을 뒤로하고 귀를 기울였다. 이즈하의 부대는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한동안 보급품을 전투 중인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돼 있었다. 전쟁의 실황을 알아버린 이즈하로써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런 수준 낮은 싸움에 가담해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 바에는 피 흘릴 일이 없는 보급 임무가 나을 지경이었다. 이즈하는 사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장교들이 벌이는 추태에 당황하여 잠깐 자신이 이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사실, 모두가 이렇게 못 싸우고 있는데, 자기만은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당장 며칠 뒤, 그는 보급 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야만 했다.

야영지에 돌아오자, 이즈하는 처음으로 전쟁이 두려워졌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누구도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 또한 졸렬한 지휘를 일삼아 부하를 잃고 나서야만 잘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즈하는 고향에 사관학교에서 배운 용병술 교과서를 두고 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적당히 공부하기만 한 자신을 질책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철저하게,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간 자신이 꿈을 홀대해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이렇게 창피한 일인 줄 알았더라면 그는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과거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용병술 교과서를 가져올 수도, 다시 사관학교에서 철두철미하게 공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제 맨몸뚱이 하나로 두각을 보여야만 했다. 이즈하는 다른 장교들처럼 실수하는 일이 두려워서 밤새 지도를 보았다.

어차피 행군 루트가 정해져 있음에도 걱정스러워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임무를 어떤 식으로 수행하면 두각을 보일 수 있을까? 이즈하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만이 야속하게 흘러, 국경을 넘는 날은 금방 다가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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