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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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두끼
작품등록일 :
2023.10.3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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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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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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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 1

DUMMY

혼란한 정국과 관련이 없다는 듯이, 요새는 고요했다. 수비 인원은 이미 점호를 마치고 취침 시간을 맞았다. 몇 시간이고 떠들던 병사들마저도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요새 안에 깨어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아직 신입 티를 벗지 못한 당직 장교인 이즈하와, 요새 안팎을 순찰하는 위병 근무자 몇 명이 전부였다.

당직 장교 이즈하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당직실에서 이즈하는 타오르는 화로를 바라보다가 요새의 감시탑들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이즈하가 처음 전입 왔을 때만 해도 여름의 끝자락이었는데, 벌써 겨울이었다.

이즈하는 요새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이 생도 시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즈하가 여태까지 살아온 고향과 그가 수학하던 수도와는 계절의 변화가 아주 달랐다. 이 외로운 극지는 일 년의 대부분이 겨울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살던 지방 기준으로는 겨울이나 다를 바 없는 날씨가 여름을 제외하면 내내 이어졌다. 이즈하는 거의 일 년 내내 털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올리니, 이즈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머무르던 고향에서의 삶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군 생활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탓일지도 모른다. 백일 남짓에 불과한 군 생활에 이즈하는 막막함을 느꼈다. 백일이 이렇게 길었는데, 앞으로 그가 복무할 40년은 어떨까. 지금처럼 고작 몇 개월이 자신의 많은 걸 변화시켰다면, 그는 과연 미래에 존재할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미래는 실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 이즈하는 앞으로도 군인일 것이고, 제대해서도, 죽어서도 군인일 예정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내내 생도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듯이, 그는 군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 외에 그가 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그랬듯이, 기사가 되거나, 귀족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군 생활을 훌륭히 마치고 난 뒤에 따라오는 명예에 불과했다.

사실, 군대라는 기관은 이즈하의 상상과는 달랐다. 그는 적과의 결전, 보람찬 훈련을 기대했지만, 현실에서는 그에게 지루한 당직 업무나, 점호, 무익한 무기 점검 따위를 맡아야 했다. 그래도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실력과 의용을 뽐낼 기회가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한 가지 두려운 점이 있다면, 그 자신이 지겨운 당직과 경비 업무에 몸도 마음도 늙어버린 선임 장교들처럼 변할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비록 첫 단추가 하잘 데 없는 경비 부대로 시작했을지언정, 경비 부대원 따위로 커리어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즈하는 다짐했다.

‘영원히 경비 부대에 남을 수는 없지. 다음엔 꼭 야전 부대로 갈 거야.’

이즈하는 자신의 결의를 잊고 싶지 않았다. 변질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 이 기상과 이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친 사람처럼 아무한테나 자기 말을 쏟아놓거나, 글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음을 이즈하는 잘 알았다. 때문에 이즈하는 오늘 어머니에게 쓸 편지에 자신의 결의를 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실하고 추진력 있는 젊은이답게, 이즈하는 당장 촛대를 가져와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어머니가 밤에는 글을 읽거나 쓰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으나, 도저히 아무 것도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어 글을 써 내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평소처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로 시작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안녕하세요. 어머니, 좋은 밤입니다. 저는 지금 요새에서 홀로 당직 근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군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이 결실을 맺었는지, 선임 장교들도 저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입니다.’

그는 한참을 쓸 데 없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머니가 기뻐할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요새에서의 생활은 단조롭습니다. 제겐 어려운 일이 없어서 평화에 찌들어 역량을 잃을까 걱정이기도 합니다···’

이즈하는 고민하다가 자만이 과하다고 생각해 해당 부분을 지웠다.

‘요새에서의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적응했습니다. 하지만, 요새의 장교들은 대부분이 군 복무를 향한 열의를 잃었다는 점이 마음 아픕니다.’

그는 혹시라도 동료들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뜯어볼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를 장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편이 이성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흥분해 동료들의 열망 없는 태도를 지적할 뻔했다. 그는 자신을 추스르면서 글을 이었다.

‘··· 때문에 다음에 전입에서는 경비 업무보단, 야전 부대에서 훈련으로 일상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와서 어머니가 자신이 묘사한 군 생활을 이해할까 싶었다. 너무 어려운 말들로 쓴 건 아닐까? 어머니가 군에 대해서 알아봐야 그렇게 잘 알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럴 때 아버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사실, 이즈하에게도 아버지가 존재하긴 했다. 아버지도 장교였고, 이즈하는 그 점을 존경해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이즈하의 생부는 이즈하의 존재 자체를 거북해한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이즈하는 심지어 사관학교의 면접관 앞에서도 그는 버젓한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거짓말을 쳤었다.


어머니는 이즈하가 소년이 됐을 무렵에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실혼 관계가 아니었다. 이즈하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약혼자를 두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처녀였던 어머니와의 교제하여 그녀를 임신시켰다. 아버지는 본래 창창한 장교였기 때문에 훗날 이 사건이 진급에 방해될까 두려워, 공식적으로는 이즈하의 어머니를 두고 떠났다.

물론 그도 나름 양심은 있었는지, 이즈하의 어머니에게 꾸준히 돈을 보냈다.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두 번은 이즈하를 만나러 오기까지 했었다. 이즈하는 그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부도덕한 아버지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랐다. 아버지도 장례가 유망한 이즈하를 좋아했으나, 본 처를 두고 지낼 수는 없어 유망한 아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즈하는 자신에게 이복형제 자매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소 충격 받았다. 그리고 나이를 더 먹고 나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각만큼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한때 약혼자였던 귀족 여인과 결혼해서 이젠 막대한 영지와 귀족 작위까지 얻었다고 한다.

참 얄궂게도, 아버지의 본처가 낳은 자식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어리석어서 아버지는 소년이 된 이즈하에게 ‘네가 차라리 내 장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에게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고, 두 사람은 엄연히 가족조차 아니었다.

때문에 이즈하는 철이 들고 나서부턴 사고뭉치였던 과거를 청산하고, 아버지보다도 더 정직하고 유능한 장교가 되기 위해서 공부했다. 사실, 그의 내밀한 꿈은 아버지의 부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이 이즈하가 지금의 지위를 얻는데 기여한 바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즈하도 분명히 아버지가 부도덕한 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어리석게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즈하는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진급해서 아버지가 지휘하는 부대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존경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식이면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은퇴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부대에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마음은 어머니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런 자신의 이력을 떠올리니, 이즈하는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조차도 얼마나 가식적이고 추악한지 새삼 실감났다.

‘난 정말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런 마음이 변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도통 그럴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같아서는 언제까지든, 심지어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그가 지휘했던 부대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인다운 노예근성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열망에서 벗어날 기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즈하는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서 이런 기분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는 외도를 범했고, 그런 부정이 유전되어 자신에게도 그 위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즈하는 자신의 피에 새겨진 욕망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언제나 그 욕망에 충성했다. 때문에, 이즈하는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사실 보이는 대로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혈통과 본성에 충성했던 것이다.

씁쓸한 마음에 이즈하는 편지를 적당히 마무리해 접어 치웠다. 자신의 과거와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즈하는 그런 미래를 상상해 봤지만, 도저히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과거와 본성에서 벗어난다면, 그건 이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이즈하는 자신이 도통 스스로를 잃어버리도록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자신의 삶을 떠나, 아주 다른 인생을 사는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 이즈하는 그것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마부나 시인, 심지어는 자신은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장군의 아들로 일컫는 술주정뱅이나 어머니 속을 썩이는 비렁뱅이 따위로 등장했다. 그의 공상은 점차 현실감을 잃어갔다. 이런 모습이 나일 수는 없지. 이즈하는 생각했다. 운명은 존재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 운명인데, 이런 일은 이제 일어날 수 없다.

그는 애매모호한 불안감을 밀어내면서, 현재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라고 해 봤자, 잠도 자지도 못하고 아깝게 시간이나 보내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아버지를 향해 열심히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변해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아직 젊었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둘러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이즈하는 잠시나마 그것을 원했다.

이즈하가 이런 공상에 빠져 젊음을 억지로 허비하는 동안, 이즈하가 지키는 요새 앞으로 전령 하나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야간 근무를 서던 초병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불빛을 보고 당황했다. 초병들은 전령을 막아서면서 신원을 물었다. 비단 옷으로 차려입은 전령의 복장을 보았을 때, 분명 이 근방에서 온 모습은 아니었다. 전령은 왕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들이밀었다. 시골뜨기 병사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고 당직 장교인 이즈하를 불렀다. 이즈하는 갑갑한 마음에 오히려 거수자의 등장했다는 초병들의 보고를 반기며 당직실에서 일어났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이방인의 둥지를 다시 쓰면서, 여러모로 고민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당장 제가 꾸준히 연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지난번처럼 무책임하게 매주 올라올 거라고 약속하진 못하겠습니다.


최대한 완결을 목표로 천천히라도 진행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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