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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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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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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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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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젯밤 땀 흘린 사이

DUMMY

“일단 기억나는 것만 적었습니다.”


고작 며칠이라고 해도, 진짜 피녹호를 보좌해왔던 사람.

생활 패턴이나 일정만큼은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취향은 뭔지 나중에 아저씨한테 물어 봐.”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시켜서 묻는 거라고 해. 아는 게 없으니까 일일이 지시해야 해서 귀찮다고.”

“알겠습니다.”


녹호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가 켜면서 말했다.

그럴 때마다 지문이 인식되었다는 문구가 어른거린다.


“휴대폰이 웹사이트 암호도 기억하더라. 그곳도 꽤 여러 군데를. 다들 이런 식으로 인터넷을 쓰나?”

“그렇습니다.”

“비밀번호도 거의 다 비슷하지? 다들 자주 쓰는 숫자나 단어가 있을 테니까.”

“예.”


굵직한 엄지가 화면을 꾸욱 눌렀다.

지문을 인식한 휴대폰은 잠금이 풀려, 애플리케이션을 주욱 보여준다.


“저장된 아이디랑 비밀번호는 어디서 볼 수 있지? 하나만 알아도 거의 다 뚫릴 텐데.”

“아마 보안이나 개인정보 항목에 있을 겁니다.”

“해 봐.”

“저도 확실히는 몰라서···. 검색해보겠습니다.”


녹호는 감금되어 있었다.

인터넷 역시 허가된 페이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휴대폰은 구경도 못 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녹호에게 유송은 유의미한 관찰 대상이었다.

모르면 바로 검색하는 행동이나, 독수리 타법을 쓰지 않는 모습이나.


“여기 있습니다.”

“음, 생각보다 남 인생 뺏기 쉽네. 계좌도 지문으로 다 뚫리던데.”


검색, 관찰을 통해 쉽게 현대인의 행동양식을 습득할 테지.

저장이 안 된 암호도 본인 인증으로 해제한 뒤, 재설정하면 된다.

모든 것이 간단했다.

현대 사회란, 놀라울 만큼 도플갱어에 취약했다.


“지하에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러다 유송이 물었다.

지시에만 움직이고 묻는 말에만 답하다가, 처음으로 질문다운 질문을 뱉었다.

녹호도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친구랑 지냈지.”

“친구 말입니까?”

“그래. 프로이트, 스키너, 할로우. 다들 똑똑해서 많이 배웠어.”


사납게 생긴 얼굴에 흥미 서린 미소가 피어난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 때문일 터.

하지만 유송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면, 차라리 학문에 전념하시면 어떻습니까?”

“······.”

“강탈한 삶보다 스스로 쌓아나간 인생이 더 가치 있을 겁니다.”


사나운 미소에 짜증이 약간 스몄다.

어쩌면 은유했던 대답이 간파당한 탓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교과서 같은 조언이 거슬렸을지도 몰랐다.

알 수 있는 건,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누구야?”


더운 곳에서 흙을 팠던 몸.

땀이 말랐다고 한들, 끈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손은 그런 뺨을 부담스레 쓸어내린다.


“도플갱···”


툭!


커다란 손이 뺨을 한 번 두드렸다.

아프지도 않을 만한 세기.

하지만 심장이 철렁할 만큼 두려운 경고이기도 했다.


“내가 누구야?”

“피해자···.”


턱!


“내가 누구야?”


다시 질문을 뱉는다.

사나운 눈빛은 유난히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유송은 한 번 흠칫 떨고선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녹호. 피녹호입니다.”


조심히 내놓은 답.

주눅 든 눈길이 녹호를 향해 기어갔고, 이내 느긋한 미소가 유송에게 걸어온다.

뺨을 쓸던 손은 이내 푹 숙인 머리 위로 향했다.


“그래, 잘했어. 앞으로 그렇게 나를 부르는 거야.”

“도련님이 아니라 말입니까?”

“무슨 호칭이 그래? 거리감 느껴지게. 자, 불러봐. ‘녹호 씨’ 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는다.

그건 상대보다 우위에 선 사람이 내리는 칭찬이었다.


“···네, 녹호 씨.”

“듣기 좋네. 앞으로 계속 붙어 다녀야 하니까, 입에 붙여두는 편이 좋을 거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후,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땀 말랐으면 다시 지하에 가자. 피도 닦아야 하고 내 친구도 데려와야 하니까.”

“아, 책도 옮겨야···.”

“다른 사용인 오기 전에 끝내야 해. 가자.”


녹호가 앞장서서 나섰고, 유송이 그 뒤를 따랐다.



***


널따란 거실.

그 소파에 녹호가 앉아있었고, 유송은 그 옆에 섰다.

밤새 흔적을 지우고, 지하에 있는 짐을 방으로 옮겼다.

어제 살인이 있었다고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째, 씻고 와도 얼굴이 그 모양이야?”


밤에 쉬지도 않고 움직인 만큼 각자 샤워를 끝마쳤다.

하지만 멀끔한 녹호에 비해, 유송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누가 봐도 피곤한 안색이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딱히 문제 될 일도 아니니까.”

“누군가 의심할 수도···”

“그것도 괜찮아. 내가 곤란할 일은 없거든.”


의문스러운 말.

유송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뭐라고 입을 막 열려던 순간, 중년 수행원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그렇게 됐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유송 양이 좀 피곤해 보이는데···.”

“아, 어젯밤에 너무 못살게 굴었거든.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고.”

“···예, 알겠습니다.”


은근한 음담패설.

녹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팔을 휘적 저었고, 수행원은 익숙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무슨 말인지 깨닫고선,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유송은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다리 아플 텐데 여기 앉아.”

“녹호 씨, 이건···”

“왜 빼고 그래? 어젯밤 땀 흘린 사이끼리.”


녹호는 그렇게 말하며 가느다란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유송은 힘없이 당겨져 그 허벅지 위에 주저앉았다.


“여기가 더 좋나 봐?”

“정말···.”

“왜? 할 말 있어?”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조용한 압박이었다.

유송도 입을 다물고선 조용히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녹호 옆자리에 조신하게 앉았다.


“식사 준비시키겠습니다, 도련님.”

“그건 그렇고, 얘 수습 기간 얼마나 남았어?”


사나운 얼굴이 가볍게 옆을 턱짓했다.


“유송 양에게 한 달 정도는 배우게 한 뒤, 맡길 계획입니다.”

“그냥 오늘부터 내가 데리고 다닐게.”

“많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많이 배워야 할 업무가 많습니다.”

“뭐가 어때? 시켜봤자 잔심부름밖에 없을 텐데. 솔직한 말로, 아저씨보단 나를 훨씬 즐겁게 해줄 수 있잖아?”


수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한 당사자가 그러겠다고 하니,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식탁으로 모시겠습니다.”


녹호는 느긋하게 안내를 따랐다.

넓디넓은 거실을 가로질러서 또 다른 방, 식사실로.


만찬도 벌일 수 있을 만큼 넓은 식탁이 보인다.

벽에는 유화 그림이 잔뜩 걸려 있고, 주홍빛 조명이 따스하게 내리쬔다.

레스토랑이라도 온 듯한 분위기, 하지만 자리는 하나뿐이기도 했다.


“빨리 차려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자 하나 더 가지고 와. 얘도 먹여야지.”

“···예?”


수행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유송은 멀뚱히 서 있다가 조심히 귓속말했다.


“원래라면 저는 식사 때 시중을 듭니다. 더 필요한 음식을 가져온다든가, 와인을 따른다든가.”

“아침인데?”

“대식가셨던 터라, 매끼를 과할 정도로 드셨습니다.”

“하긴, 자주 배고프긴 하더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스토랑에서 볼 법한 카트가 나온다.


“연어 전채요리 나왔습니다.”

“메인은?”

“스테이크와 오일 파스타를 준비 중입니다. 디저트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아이스크림으로.”

“알겠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당사자가 직접 검수한 연기에, 수행원이 제공한 정보인 덕이다.

말투나 태도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었다.

시선이 음식이나 허공으로만 향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


식사가 끝나고 녹호가 일어섰다.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중년 수행원은 그릇을 천천히 정리하는 중이다.


“외출할 테니까 차 준비해, 유송아.”


유송도 아이스크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치 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어떤 차량으로 하시겠습니까?”

“글쎄? 안목 좀 보여 봐. 오늘은 뭐가 좋겠어?”

“알겠습니다.”


녹호가 능청스럽게 대꾸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만하게 까딱이는 턱.

유송도 고개를 끄덕이고선 앞장서서 실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시 아무도 없는 장소로 둘만 이동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봐.”

“예?”

“정신 놓고 있지 마. 아까 실수했잖아?”

“···어떤 차를 탈지 물어본 것 말입니까?”

“그래, 그 멍청한 소리에 내가 죽을 뻔했지.”


다른 수행원이 있을 때 그런 질문을 해선 안 됐다.

어색한 대답을 했다간 이상함을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마. 너도 공범이야.”

“···죄송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어떤 대답을 하지?”

“보통 차종을 말하십니다. 나중에 목록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녹호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오늘은 저걸로 하자. 화려하고 좋네.”

“저것···, 말입니까?”


형광색이 요란한 차량, 고급 외제차의 대표 주자다.

허풍을 조금 보태자면, 골목을 지나면 건물이 옆으로 비켜서야 할 정도로 비싸다.


“제가 운전을 못 하는 편인데 괜찮습니까?”

“못하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끼워지겠지.”

“아···.”

“빨리 움직여.”


유송은 종종걸음을 쳐서 먼저 뒷자리를 열어주었다.

녹호가 그 안으로 털썩 주저앉아, 얼른 다시 운전석으로 간다.


“어디로 모십니까?”

“글쎄? 적당히 번화가? 놀기 좋은 곳 있잖아.”

“알겠습니다.”


밝디밝은 차량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왔다.

실내 차고가 열리고 환한 빛이 들어온다.

인생을 강탈한 이후, 제대로 즐기는 외출이다.


“천천히 해.”

“알겠습니다.”


녹호는 멀어져가는 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십 년을 갇혀있던 곳, 하지만 마음 놓고 바라본 적 없는 건물이다.

이제야 이 삶이 실감이 나겠지.


“금방 도착합니다.”

“그래?”

“예, 서울 안이라 그렇습니다.”


외출이 흔치 않았던 만큼, 거리 감각을 고려해서 설명한다.


“바로 이 앞 골목인데···, 더 들어갑니까?”

“아냐. 근처에 주차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운전, 딱히 어려워 보이진 않네?”


운전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짧은 과정이지만, 겉보기로는 참 쉬워 보였다.


“이 차로 다니시면 비슷하실 듯합니다.”

“역시 비싼 게 좋은가 봐?”

“그렇다기보다는, 주변에서 알아서 조심하는 통에···.”


그 말에 녹호가 옆 창문을 가볍게 훑는다.

사방에는 시야가 트여, 서울 거리가 한 눈으로 보였다.

요란한 형광색 차량이 옆으로, 알아서 다른 운전자가 거리를 벌려준다.

혹여 스치기라도 할까 두려운 거겠지.

그 덕에 세상이 두 사람을 에스코트 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의말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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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화. 사이비 목사가 될 준비 +1 24.01.19 70 1 12쪽
24 24화. 벌이가 괜찮은 사이비 +3 24.01.18 78 1 12쪽
23 23화. 가정 파탄 +1 24.01.17 81 1 12쪽
22 22화. 창세기 +1 24.01.16 81 1 12쪽
21 21화. 세뇌의 시간 +1 24.01.15 92 1 13쪽
20 20화. 독대 +1 24.01.12 95 1 12쪽
19 19화. 쥐와 고양이 +1 24.01.11 95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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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화. 목을 조르다 +1 24.01.09 115 3 12쪽
16 16화. 천선분식 +1 24.01.08 114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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