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컬문 숏폼 모음집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중·단편, 시·수필

갓파선생
작품등록일 :
2024.03.31 10:13
최근연재일 :
2024.08.19 14:00
연재수 :
6 회
조회수 :
44
추천수 :
0
글자수 :
26,781

작성
24.08.19 14:00
조회
4
추천
0
글자
18쪽

내 태양계는 뽑기다 (하)

DUMMY

내친김에 B-7까지 뽑았다. 블랙홀을 뽑는 것보다 더 나쁜 선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음 행성을 뽑는데 어떤 망설임이나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B-7은 여러모로 기대 이상의 존재였다.


B-7은 녹색 행성이었다. B-1이나 B-2와 달리 이미 생물체가 탄생한 채로 뽑기에서 나온 행성이었다. B-7은 우리 지구의 고생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는 B-7에서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등장하기 기다렸다. 곤충이 지적 생명체로 진화한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초조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B-7은 이미 생명체를 품고 태어나서 인지, 진화를 서둘지 않았다. B-7에는 내가 이름을 붙인 "진화의 찰나"라는 순간이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골디락스 존에서 멀었기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B-7은 골디락스 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생태계가 잘 유지되는 행성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B-5에서 찾았다. B-6처럼 B-5의 중력으로 인해 내부에 열이 발생했고 행성을 따뜻하게 데웠기 때문에 얼어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B-5와 적당하게 멀리 떨어진 덕분에 화산으로 뒤덮인 B-6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B-7에는 생명체로 가득했고, 창조물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B-7 밖으로 행성을 더 만들어야 했다. 그것도 중력이 강한 행성으로.


나는 뽑기로 B-8을 얻었다. B-8은 거대한 얼음 행성이었다. 마치 우리 태양계의 천왕성처럼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때문에 내부의 얼음 지각을 밖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비밀에 가득 찬 천체였다. 그럼에도 B-8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B-8은 토성처럼 크고 선명한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B-2에서 B-8의 고리를 볼 수 없었다. 아마도 2인류가 망원경을 발명했다고 하더라고 B-8의 고리를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경우, 망원경을 사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과 토성을 관측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럴정도로 도리 행성은 정말, 정말, 정말 아름다운 행성이다.2인류가 고리 행성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B-8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행성이었다. 크기도 크고 보기에도 예쁘고 중력도 강해서 B-7을 잘 보호해 줄 든든한 친구였다.


이제 가장 마지막 동전을 사용할 차례였다.


[이벤트를 고를세요]


뽑기 기계 상단의 LED 전광판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벤트를 고르라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76년마다 찾아오는 핼리 혜성이 돌아왔을 때처럼 천문학적으로 큰 볼거리를 정해라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달 착륙같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는 천문학적 사건을 고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마지막 동전을 뽑기 기계에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그전과는 달리 손잡이가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또르르, 탁-


이벤트 뽑기로 나온 캡슐은 이전과 색깔이 달랐다.흰색 부분은 동일한데 색깔이 있는 부분은 황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진짜 황금은 아닐 것이다. 여느 플라스틱처럼 가볍도 튼튼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황금 캡슐만으로도 이번 뽑기가 여태까지 뽑기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번 심호흡을 하고 캡슐을 열었다.


그리고 내 항성계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끔찍한 재앙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벤트로 뽑은 것은 "떠돌이 행성의 난입"이었다. 나는 떠돌이 행성에게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터미네이터는 내 항성계를 뚫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내 항성계에 이미 자리한 행성의 궤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B-5에도 영향을 줬다. B-5는 터미네이터의 영향으로 점점 태양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B-4는 물론 B-2까지 삼켜 버릴 것이고, 2인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나는 B-2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잠시 B-7에 시선을 머물던 사이에 2인류의 문명은 더욱 성숙해져 있었다. 큰 도시들이 생겨났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졌고, 도시와 도시가 모여 국가를 이루었다. 2인류는 바다를 항해하며 땅을 넓혔고, 문명을 확장했다. 지금의 문명이라면 항성계에서 일어난 불행을 알아 차렸을지도 몰랐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산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작고 어두웠지만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 빛은 천문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2인류는 좀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만들었고, 하늘을 더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천문학적 성과로도 지금의 불행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 했다.


2인류는 B-5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단지 빛을 반사하지 않는 완벽한 검은색의 대기를 지닌 미지의 행성으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2인류는 태양계를 뒤흔들고 떠난 터미네이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망원경을 만들고 천문대를 세웠을 때에는, 이미 터미네이터가 항성계를 뒤흔들고 간 이후였다. 다만 성과는 있었다. 그들은 B-3과 B-4가 점점 자신과 멀어지는 것을 발견했고, B-6 이후의 외행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유든 B-5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2인류는 오래 전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B-5의 중력이 다른 행성에 비해 유달리 강한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블랙홀이라는 개념은 알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닥친 불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태양계에 일어나게 될 비극을 알아차리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2인류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B-5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더 강해졌다. 결국 2인류가 로켓을 발명했을 때, 그들은 로켓을 이용해 B-5에 탐사선을 보낼 계획을 했다. 그러기 위해, 2인류가 얼마나 많은 로켓을 쐈는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겨우 B-2 인근에 인공위성을 올려놓는 단계에서 B-3로 탐사선을 보낼 정도로 기술이 급속도로 발견했다. 2인류의 발전 속도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2인류는 B-5로 탐사선을 보낼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의 탐사선은 B-4를 거쳐 빠르게 B-5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메라와 관찰 장비로 B-5를 주시했다.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탐사선이 B-5로 사라질 때까지, 전해온 자료는 블랙홀의 영향으로 미션 통제 센터가 아닌 전혀 엉뚱한 장소의 안테나에서 감지됐다. 그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숙제를 받은 것이다.



처음 블랙홀 개념이 등장했을 때, 우리들은 그것이 실제 존재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관찰한 2인류에게는 당연히 실존하는 존재 중 하나일 뿐이었다. B-5의 영향으로 2인류는 중력 이론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미래를 알아냈다.


하지만 불행은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숨기기에는 늦었을 때가 대부분인 법이다. B-4의 가스가 길게 늘어지며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긴 줄을 만들었다. 누구나 이상 현상을 알아차렸고, 언론과 아마추어 천문 학자의 입을 통해 B-5가 블랙홀이라는 미스터리하고 난폭한 천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쯤이면 폭동이나 사회 혼란 같은 것을 걱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인류는 어제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달리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매일매일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들이었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은 각국의 정부였다.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하고 좋은 영토를 차지하려면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2인류에게는 그들의 태양계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행성이 B-5말고 또 하나 더 있었다. 관측 결과 분명 액체 상태의 물이 있었고, 산소가 포함된 대기도 있었다. B-7이었다. B-7도 블랙홀의 먹이임은 분명했지만, B-2보다는 오랫동안 무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최후의 순간 항성계를 탈출을 하는데 더 좋은 위치에 자리한 것도 분명했다.


그들은 먼저 B-7으로 탐사선을 보냈다. 멀리서 관측하며 상상하던 모습보다 더 푸르고 아늑한 곳이었다. 불타며 떠도는 B-6가 B-7에게 또 다른 태양이 되었다. 식물은 B-2보다 더욱 무성하게 번성했다. 지금 B-7의 모습이라면 당장이라도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난지가 결정됐으니 계획을 실행하기만 하면 됐다. 2인류들은 그 계획은 "대이주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 2인류는 빠른 속도로 우주 비행이 가능한 우주선을 고안했고, 실제로 그런 우주선의 건조를 시작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모두의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대이주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하네"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이주 프로젝트에서 사용할 우주선 중 하나를 제안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우주선 개발 및 설계의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보기에는 지금의 우주선은 너무 컸고, 제작에도 오래 걸렸으며, 실제 속도도 그렇게 빠르지 않은 실패작이었다.


하네는 자신의 설계안을 포기하지 않고 주장했다. B-4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이는 2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경고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속도가 대이주 프로젝트 우주선의 가장 우선 고려 사항이라고 여겼고, 그때문에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네의 설계가 주목받은 것은, B-5가 파괴적인 본능을 드러냈을 때였다. B-5는 매섭게 B-4를 흡수했고 크기가 커지며 점점 중력이 강해져 갔다. 그리고 결국 B-5는 B-3마저도 산산 조각을 냈다.


산산 조각이 난 B-3는 대부분 B-5를 향해 날아갔지만, 몇몇은 B-2와 출동 궤도를 그리며 안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수 십 년 내 대멸종을 일으킬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당장 대이주가 급해졌고, 우주선의 제작이 급해졌다.


하네는 그때 2인류의 미래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된 것이다.



하네가 제안한 우주선은 핵 펄스 추진 로켓이었다. 기술적인 가능성은 이미 검토되었고, 이미 기술 실증기가 만들어 확인한 기술이었다. 지금 제작 중인 우주선에 로켓 추진부만 추가하는 방식으로 개조만 하면 되었기에 다른 설계 대안보다 월등한 이점도 있었다.


거주부는 기존 우주선을 그대로 활용했다. 그 때문에 기존 우주선의 추진부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중 몇몇의 엔진은 실제로 작동도 가능한 상태였다. 거주부와 연결되는 추진부는 하네의 설계안 그대로 사용되었다. 최종 조립을 앞둔 파츠들이 수년 동안 로켓을 타고 우주로 올라갔다. 불과 5년 만에 추진부 조립이 완성되었고, 우주선의 진수식이 거행됐다.


우주선에는 "희망호"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어졌고, 희망호의 진수식은 거주부와 추진부를 견고한 프레임으로 결합하고 가장 마지막 볼트를 조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진수식의 피날레는 샴페인 캡슐을 희망호를 향해 발사해 행운을 비는 마지막 순서였다. 그 영광은 대이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하네에게로 돌아갔다. 단순히 버튼만 누르면 되는 간단한 임무였지만, 그 당시의 하네의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발사한 샴페인 캡슐이 희망호에 부딪히자 샴페인이 터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했다. 샴페인 얼음은 무대의 꽃가루처럼 반짝거리며 희망호에게 축복을 내렸다.


희망호가 완성되고, 첫 이주민들의 탑승이 시작됐다. B-2에서 우주선을 타고 희망호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었지만, 불평을 하는 탑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긴장감이 완전히 날아갈 정도로 일이 잘 풀렸고, 가벼운 떨림과 함께 여정이 시작됐다.


블랙홀을 피해 B-7으로 향해야만 했다. 하네가 고안한 추진체가 빛을 발휘할 순간이었다. 희망호는 하네의 기준으로도 잘 작동했다. 하지만, 급하게 설계가 변경된 우주선에 문제가 없을 리 없었다. 핵 펄스 추진의 진동은 잘 제어되지 못했고, 속도를 높일 때마다 거주부에는 심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나 수면 시간에는 우주선 가속이 불가능했고, 주간 시간이라도 할지라도 핵 펄스 추진 로켓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비행 계획이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쾅-


"적색비상, 추진부에서 폭발이 감지되었습니다."


대원A가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상황보고해."


하네가 식은땀을 흘리며 조종석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추진부 쪽을 바라보았다.


"보고드립니다. 운석과 충돌로 인해 추진부 손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피해 상태는...... 자력으로 수리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비행 속도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주민들의 생존이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대원A가 침울한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망호를 공격한 것은 B-3의 잔해였다. B-5는 2인류가 달아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가 산산조각 낸 B-3로 2인류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추진부를 포기한다. 목적지로 가는 항로를 다시 계산해라."


하네는 2인류의 미래를 믿기로 했다. 그는 추진부를 폭발시키는 것과 동시에 거주부에 장착된 기존 엔진을 사용해 비행경로를 조정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반대한 우주선의 추진체에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추진부의 차폐막을 떼어내서 거주부에 장착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결국 이민자 누구나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다.


"그냥 여기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일이 잘못되면 희망호가 산산조각이 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이주민들 중에는 정치인도 있었고, 그가 이주민의 대표 자리를 자처하며 하네를 찾아왔다.


"희망호보다 빠른 우주선은 없습니다. 구조대가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블랙홀을 이용해 스윙바이를 하는 방법은 너무 위험합니다. 블랙홀 주위에는 확인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운석들로 가득할 겁니다."


"다...... 다른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미션 센터에서 우리를 도울 방법은 없습니다."


하네의 대답에 이주민 대표는 두 다리가 풀리는 듯 했다.


"미션 센터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하던가?"


하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미션 센터에서 특별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행운을 빈다, 희망호"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교신 내용이었다.


성공의 확신은 없었다. 작전에 실패하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인 우주 비행사로 역사에 남게 될 운명이라는 것만 명확했다. 물론 2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남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불명예를 각오하는 일 말고는 하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네는 술을 달고 살다시피 하며 차폐막 이전 설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시험할 날을 맞이했다.


이주민들은 모두 각자 방에 들어가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희망호의 모든 대원들은 작전대로 자리를 지키며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네의 결심만이 남았다.


"지금이다. 시작해라."


하네의 목소리는 조용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10, 9, 8, ..., 2, 1, 폭발"


희망호가 요란하게 떨리며 거주부와 추진부가 분리됐다. 그리고 추진부가 폭발하며 그 모든 힘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그 힘을 받은 희망호의 거주부가 빠른 속도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엔진 점화, 정상 궤도로 복귀한다!"


하네의 명령과 함께, 거주부에 장착된 엔진이 불을 뿜었다. 수 십여 초 동안 희망호를 밀어주던 로켓이 멈추자, 희망호의 진동도 사라졌고 비행도 안정을 찾았다.


"그 녀석들, 우주선을 아주 엉망으로 만든 것은 아니군."


하네가 미소를 띠며 성공을 기다렸다.


"보고드립니다. 정상 궤도 복귀 실패!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목표 궤도 도달 실패."


대원A의 보고가 이어졌다.


하네는 긴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의자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긴 침묵을 지키며 계기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희망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내 항성계가 왜 이런 꼴이 되어야만 하는지 계속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일은 더더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항성계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항성계 안의 그 무엇도 건드릴 수 없었고, 단연컨데 의미 없는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희망호의 궤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아마도 물을 휘저으면 물결을 타고 배가 떠다니는,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뭐든, 확실한 것은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희망호의 사람들이 분명 무슨 일을 해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희망호가 B-7에 도착해 착륙선을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즐거우면서 허탈한 기분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분께 아르바이트 완료 문자 메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분께서 갑자기 내 방에 나타났고, 인자하게 미소를 보냈다.


"일은 잘 끝마친 것 같군. 일하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었나?"

"죄송합니다. 규칙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요. 특별히 뭘 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약속은 약속일세. 계약을 위반했으니 아르바이트비는 줄 수 없네."


나는 이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조금은 분하고 억울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런데 이 일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은 없나?"


"아니요. 충분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스컬문 숏폼 모음집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내 태양계는 뽑기다 (하) 24.08.19 5 0 18쪽
5 내 태양계는 뽑기다 (상) 24.08.19 4 0 18쪽
4 사랑한다 말하면 죽는 병이 있음 24.04.01 11 0 6쪽
3 보이는 것보다 다를 수 있음 24.03.31 7 0 7쪽
2 수업이 제일 재밌어요 24.03.31 5 0 6쪽
1 물장난으로 무림 고수 24.03.31 13 0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