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전쟁이 끝나고 곡식의 추수가 시작됐다.
사실 농사는 다른 게 아니라 추수가 가장 큰 골칫거리다.
잡초야 여자와 아이들도 할 수 있지만 다 익은 알곡은 어떡한단 말인가?
엄청난 노동력이 요구되는 일인지라 노인과 여자, 아이는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다들 익어가는 알곡을 보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때마침 페인이 징집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노동력이 추가된 거다.
“정말 다행이었지.”
“꼼짝없이 보리가 썩어가는 걸 구경해야 했는데 영주님께서 이리도 은혜를 베푸셨으니!”
“어허, 잡담들 그만하고 빨리 손이나 움직여.”
징집병들은 본업인 농부로 돌아갔다.
농부들은 각자 손에 낫을 들고 우르르 밭으로 몰려들었다.
잘 익은 알곡들을 손으로 움켜잡고 베어낸다.
서걱-서걱-
밀 이삭이 서걱서걱 베인다.
그들이 흘리는 구슬땀만큼 곳곳에는 곡식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으윽! 아이고 허리야!”
“무슨 놈의 낫질이 해도 해도 끝이 없담!”
올해는 풍년인지 밀과 보리를 베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광활한 황금색의 향연에 마을주민들은 질린 기색을 보였다.
“거 배부른 투정이나 하기는. 작년에 기억 못하오?”
“뼈 빠지게 수확해도 우리 손에 남는 것도 없었잖수!”
“영주님께 세금 안 바칠 거야? 궁상맞은 소리들 그만하고 얼른 캐기나 하셔.”
“그랬었지 참. 자자, 일들 합시다. 할 일이 많아요!”
이들은 페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면서 페인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아이언소드 가문의 페인 경은 영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악한 영주였던 하렌 피터의 목을 베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켰으니까!
페인이 영주의 자리에 오르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금감세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수확한 양의 8할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었던 이들.
한데 페인은 무려 5할 받겠다는 데다 교회에 바칠 필요도 없다고 단언했다.
만약 지주나 교회에서 개수작을 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엄벌을 놓았다.
급기야 주민들은 낫질을 하다말고 만세를 외쳤다.
“정말 페인 영주님 만세시다!”
“만세! 만세! 만세!”
세금도 낮춰주지, 일손 도우라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심지어 수확 전까지 먹고 살라고 밀과 보리도 조금씩이나마 안겨주었다.
이렇게 좋은 영주를 처음 겪어본 그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연일 들떠 있었다.
이런 광경은 비단 여기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추수의 기쁨을 누린 모든 영민이 가슴 속 깊이 새로운 영주를 칭송했다.
이런 영민들의 칭송과 달리, 지역의 유지들은 꽤 곤란함에 처해 있었다.
***
“아니, 촌장이 뒷돈 좀 챙길 수 있지 그게 그렇게 잘못이랍니까?”
“이것들이 어제는 나에게 뭐라고 한 줄 아시오? 그따위로 할 거면 영주님에게 이른다고 합디다!”
“······그거 심각한 거 아닌가? 엊그제 산등성이 너머의 마을에서 귀족 하나가 영주성으로 끌려갔다고 하던데.”
“?!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원래 관행으로 해오던 일들이지만 이번 영주께서는 단호하셔서······.”
페인은 하렌 영주가 거하게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하렌 영주가 싸고 간 똥은 영지 내에도 뿌리 깊게 내려있었는데 그중 일부가 바로 귀족계급의 일탈이다.
이 미개한 세상에도 법이라는 게 있었다.
있긴 한데, 속된 말로 귀족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평민 아래의 계급이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소용없었다.
귀족이 씹어버리면 법이 기능하지 못하는데 대체 법이 왜 있단 말인가?
그래서 페인은 법대로 하기로 했다.
“남의 여자 건드렸으면 벌을 받아야지. 시원하게 아랫도리 자르고 광명 찾자!”
“안 돼애애애애애!!!”
“어? 이놈 보게? 세금 걷으라고 보냈더니 왜 지 몸에다가 금붙이를 둘러? 노역 100년 형.”
“살려주십쇼!!!!!”
“안 돼, 안 봐줘, 좆까.”
무시무시한 철권통치가 시작됐다.
철권이긴 한데, 그 철권이 제대로 된 곳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전 영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엄청난 일이었다.
영민들이야 영주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해주겠다고 하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 기존에 제 잘난 맛으로 깽판을 치고 다니던 기득권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미 심각하게 문제가 있던 자들 여럿이 성으로 끌려가 죽거나 폐인이 됐다.
이걸 그냥 넘어가면 자신들은 두고두고 영주에게 끌려 다닐 것이다.
“더는 이를 간과할 수 없소이다!”
이대로 페인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님 들고 일어날 것인가?
그러던 중 누군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럼 맞서 싸우실 겁니까? 전(前) 영주처럼 성벽에 머리가 걸릴 수 있는데도?”
“어, 그건······.”
“세 달 만에 영지 두 곳을 함락시켰습니다. 영주들은 나란히 목이 잘렸고 그 가족은 영지 바깥으로 쫓겨났지요. 얼마 전에는 겨우 살아남은 사생아 하나도 철퇴로 쳐 죽이셨다지?”“······.”
모임을 주관한 서기관 페르난도는 통렬한 지적에 할 말을 잃었다.
페인의 무력을 폄하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뚜렷하고 대단했다.
게다가 손속은 또 얼마나 잔인한가?
그들은 성을 드나들 때마다 혀를 빼문 하렌 영주의 머리통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런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다면 이 자리에 올 자격이 없었다.
이에 페르난도는 헛기침을 뱉으면서 말을 돌렸다.
“크흠, 큼! 생각해보니 영주께서는 충성의 대상이지 싸워야 하는 적이 아니오.”
“?? 방금 하신 말씀하고는 다른-.”
“어허! 내 말은!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분께 충성심을 보여서 옆에 바짝 붙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여기 있는 전원이 덤벼도 페인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까이 달라붙으면 그 위세를 등에 업고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은 어려워도 있다 보면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겠지.’
‘기다리면 답이 나올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지금만 해도 전 영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근데 그 지지 중 일부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굳이 매를 들지 않아도 주민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일 거다.
그들은 자기 위에 누가 서는 게 불만인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을에서 떵떵 거리며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불만을 가졌던 거였지.
“하지만 당장 수익이 줄어들었는데······.”
“쯧쯧. 생각 좀 하시오, 생각! 영지가 부유해지면 자연스럽게 세수도 늘어나니 우리가 얻는 비율이 줄어들어도 결과적으로는 부와 명예, 권력을 다 얻게 됨을 왜 모르오?”
“그것도 그런가?”
화려한 페르난도의 입담에 하나둘씩 넘어가는 회의 참석자들.
페르난도는 뒷말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봉기는 없던 일로 하고 선물이나 준비하시오.”
“그렇군! 선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요. 영주의 마음을 사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영주는 기사출신이라고 하니 무구를 선물하는 것이 좋을 것 같······.”
서로 쑥덕이며 어떤 선물이 좋을까 고민하는 모습.
그런 광경을 보면서 페르난도는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불미스런 사태를 조기에 진압한 것도 훌륭한 공적인 법. 이것은 내 공적이니 영주께 아뢰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지!’
과연 통수의 민족다운 마인드였다.
승산이 없다고 여기자 발 빠르게 아군을 이용해먹는 잔머리라니!
그동안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프랭크푸트 성으로 향하였다.
품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선물들은 덤이었다.
진짜는 그들이 페인을 자신들의 영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근 영지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세력구도가 뒤틀려버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동부에 신흥강자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칠레로스와 카로크를 빼앗았다라, 재밌는 자로군.”
중후한 인상의 장년인도 그러한 소식을 접하였다.
얼마 후 일단의 무리가 페인의 영지를 향해서 출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 곳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 변화를 이용하려던 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긴 행렬이 이어진 것이다.
야만과 폭력의 시대.
세상은 페인의 무력을 원하고 있었다.
***
사람이 몰려든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덕분에 프랭크푸트 성의 문지기들은 좋은 날이 다 갔다며 한탄을 했다.
대기열이 0분에서 1시간이 넘도록 늘어났으니 검문하는 것만으로도 변소 갈 시간도 없었다.
“정명하신 페인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스더 가문에 속한 상인으로······.”
“모트라 아비옹이 영주께 인사 올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약소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오오오! 기사 중의 기사이신 아이언소드 경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옆에서 모시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데 어찌 한 자리 주실 수 없을까 하고······.”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페인을 찾아왔다.
그들은 상인도 있고, 귀족도 있으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방랑기사나 야심가도 있었다.
페인은 그런 그들을 정신없이 맞이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쫓아버리고 싶지만 저 좋다고 찾아온 건데 그러는 건 좀.
‘그건 쌍놈의 자식이잖아.’
노빠꾸인 페인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귀족 노릇 좀 해보겠다고 다짐까지 했는데 바로 때려치우는 건 꼴사납다.
“어서 오시오, 내가 이 땅의 주인인 아이언소드가의 가주 페인이오.”
평소에 안 쓰던 말투를 써서 오글거렸다.
그래도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페인은 이쪽 세상에서 배운 게 쥐뿔도 없다.
하나 전생에서는 엄청난 양의 미디어에 노출됐었기에 군주 흉내야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 페인의 환영에 방문객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상인은 상인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서로 끼리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근본 없는 자라고 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군.”
“소문과 달리 예의를 아시는 분입니다.”
“성으로 오면서 보셨소? 길거리에 똥이 하나도 없었소이다!”
성(Castle)은 영주의 얼굴이자 자존심이다.
성 하나를 쌓아올리려고 누대에 걸쳐서 재산을 탕진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성은 태생적으로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좁은 장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물처리를 할 장소도 부족하니 냄새가 심했다.
현대의 청결함을 기억하는 페인으로서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일.
따라서 그는 분뇨를 한데 모아 버리도록 만들었다.
화장실.
흔히 뒷간이라 부르는 장소를 지정하고 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싸지르거나 버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자들에겐 수치를 유발하도록 궁둥이를 까서 곤장을 맞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주민들의 반발?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곤장 한 번 맞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저도 모르게 규칙을 지키게 됐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위생이다.
“성이 이토록 깨끗하니 영주의 마음씨도 깨끗할 겁니다.”
한 사제는 페인의 이런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교회는 사람 죽이는 걸 죄악시 여긴다.
그래서 기사나 귀족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이 냄새나지 않는 청결한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사는 집이 깨끗하면 집주인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하는 법.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페인에 대해 좋은 생각을 품게 됐다.
“그보다 정말 잘생기셨단 말이지.”
“나에게 딸이 있었으면 혼인을 권유해보았을 겁니다.”
가장 큰 호감요소는 역시 외모였다.
그들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보듯 매의 눈으로 연신 페인을 훔쳐봤다.
정작 페인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아니, 더럽잖아.’
현대인의 감성으로 중세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고역이다.
기득권의 인물들은 이런 페인의 생각을 몰랐다.
그저 그의 호감을 사려고 엉겨 붙어서 호감도만 더 떨어트렸을 뿐이다.
- 작가의말
내일은 휴재일!
월요일 오후 6시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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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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