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방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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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 패악질

DUMMY

#057



긴장한 침을 꼴깍 삼켰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위압감이 넘치는, 삼국시대에 태어났으면 김유신 옆에서 말을 타고도 남았을 법한 사람이다.


“예, 서산의 술집들로 식자재를 유통해줄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서산이면···, 충남 서산?”

“예, 맞습니다.”


여화정이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쪽은 미래 식품이 꽉 잡고 있지 않나요?”

“지금은 그렇습니다. 자료부터 보시죠.”


가방에서 준비해온 자료들을 꺼냈다.

누굴 만나던 설명할 수 있도록 강하윤과 밤새 발표 연습도 한 참이었다.


“이쪽 그래프를 보시면···.”


길고 열정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주로 어필한 부분은 미래 식품의 약점과 3H의 판매량, 앞으로 제휴를 맺게 될 술집이 얼마만큼의 매출을 올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유통비로 얼마를 쓰게 될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여화정은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그 모습은 남편의 대리인이 아닌, 책임감 있는 유통회사 대표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숨이 찰 정도의 일장연설이 끝났다.

자료를 검토하던 여화정이 흘끗 나를 바라봤다.


“굉장히 열정적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지금 어울리는 얘기는 아니지만···, 사실 저도 백현호 씨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미주 방에 사진이 엄청 많이 걸려 있거든요.”

“···제 사진이요?”

“네, 보니까 봉사활동하면서 찍은 사진 같던데.”


쓰레기 주웠을 때 찍은 사진 말하는 건가?

핸드폰 앨범에 있던 걸 인화해서 붙여둔 모양이다.


여화정이 자료들을 책상에 탁 내려놨다.


“근데 나는 착한 사람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좋아요. 지금 백현호 씨가 가져온 자료들···, 충분히 설득력 있었어요. 미래 그룹의 파이를 뺏어 먹기만 한다면 미주유통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다만···.”


다만?


“아직 확정된 게 없네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몇 개의 술집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느냐,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뚜껑을 열었을 때 단 하나의 술집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낭패였으니까.


여화정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미주유통의 거래처는 서울과 경상도 쪽에 있어요. 그쪽 물량 처리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에 충남까지 라인을 새로 라인을 뚫으려면···, 적어도 50군데 이상의 점포는 돌아야 하죠.”

“50군데···.”

“미리 말하지만, 이것도 최소예요.”


지금 3H를 납품하는 술집이 약 100군데 남짓.

적어도 절반 이상을 꿰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화정이 내 속을 훤히 꿰뚫듯 덧붙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강원도 바닥에서 미주유통보다 일 잘하는 곳 찾기는 힘들 거예요. 못 믿겠으면 다른 곳 다녀오셔도 되고요.”


대단한 자신감이다.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흔들림도 없었다.


여화정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백현호 씨가 가져온 아이템이 탐나는 것도 사실이죠. 미래 식품의 파이를 뺏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얌전히 50개의 점포를 구해오라는 말씀이군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네요.”

“물론이죠. 오히려 물렁물렁하게 나오셨으면 제 쪽에서 의심했을 겁니다. 이렇게 확실하신 분이니 더욱 믿음이 가네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요.”

“언제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한 달이면 될까요?”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50개의 점포···.”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해오겠습니다!”



< 57 >



늦은 저녁, 작업실.


셋이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깠다.

최기현이 젓가락을 뚝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27군데밖에 안 넘어올 줄은 몰랐어.”

“···살면서 그렇게 많은 욕은 처음 먹어봤어요.”


강하윤의 표정은 드물게 어두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병이라도 더 받으려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니 강하윤에게도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강하윤이 흘끗 나를 바라봤다.


“백현호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요?”

“저는 생각보다 많이 넘어온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제삼자가 거래처를 바꾸라고 하는 꼴이잖아요. 하루아침에 거래처 바꾸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나도 마음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다만, 아직은 기다려볼 여지는 충분하다.

당장 내일부터 쌓아둔 ‘3H’ 소주가 하나씩 떨어질 테고, 그건 가게 매출과 직결될 테니까.


“우리가 만든 걸 좀 더 믿어 봐요.”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났다.

흐름에 이상이 느껴진 건 일주일이 넘어갈 즈음이었다.


사장님들을 설득해보겠다며 서산 시내로 나갔던 최기현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형,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리랑 맺은 독점을 취소하겠대.”

“갑자기 그게 무슨···.”

“나도 몰라. 오늘만 벌써 5곳이 취소했어.”


서산시의 술집은 2개로 나뉜다.

‘3H’ 소주를 파는 곳과 팔지 않는 곳.


3H를 납품받지 못한 술집은 파리만 날리고 있으며, 반대로 3H를 파는 술집은 여느 때보다 호황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이건 내가 술집을 돌아다니며 직접 확인한 사실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최기현이 분을 삭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함께 할 점포들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설마 줄어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달 만에 1년 치 매출을 당길 수도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내 말이!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이유를 물어봐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입을 다물어버린다니까!”


청천벽력 같던 취소 행렬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에는 7개의 점포가, 그리고 또 다음 날에는 무려 10개의 점포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이로써 남은 점포가 고작 3개.

이건 우연이나 단순 변심 같은 게 아니다.

당연히 김무배에게도 물어보려 했지만, 전화도 안 받고 술집도 닫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술집 역시 입을 다문 상태다.


어릴 때부터 인사하고 자란 삼촌들이 얼굴을 싹 바꾸고 문전박대해버린 탓에 아무리 나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작업실.


셋 다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배 형 술집 좀 다녀올게요.”

“거기 사람 없다면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단두대에 목구멍 대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남은 시간은 고작 보름 정도였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봐야 했다.


강하윤과 최기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요.”


차를 몰고 곧장 김무배의 술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여러 술집이 눈에 들어왔고, 파리만 날리던 가게들에는 손님들이 북적였다.


3H를 납품받은 술집은 모두 문을 닫았고, 덕분에 다른 술집들만 노 난 셈이다.


“어? 잠깐만···.”


차를 급히 갓길에 멈춰 세웠다.

문 닫은 술집에 웬 종이가 한 장이 붙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안내문 】


안내문을 읽어내려가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문 앞에 붙은 건 ‘영업정지’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처분 내용은 ‘청소년 주류 제공’이었고 처분 기간은 무려 3개월이었다.


뒤늦게 따라온 강하윤이 눈을 찌푸렸다.


“이거 냄새가 좀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서산에서 장사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머릿속을 간질거리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데 뒤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왔다.


창백한 표정으로 달려온 남자는 술집 사장인 문용수였다.


“이, 이런 거 붙이지 말라니까···!”

“사장님!”

“그냥 못 본 거로 해! 알았지?”

“잠깐만요! 얘기 좀 해요!”


문용수가 안내문을 뜯더니 후다닥 뛰었다.

잡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문용수가 차에 오르더니 부웅 자리를 떠나버렸다.


닭 쫓던 개 마냥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데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 김무배 】


그토록 기다리던 김무배의 전화다.

황급히 전화를 받자 김무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호야, 새벽에 잠깐 집으로 올 수 있어? ]


* * *


늦은 새벽, 김무배의 술집 앞.


잠복하는 형사처럼 운전석에 앉아 김무배를 기다렸다.

비쩍 마른 그림자가 나타난 건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일부러 강하윤과 최기현도 떼 놓고 온 참이었다.


“형.”


김무배가 주변을 살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누가 보면 현상수배라도 걸린 줄 알겠다.


“들어가자.”


김무배를 따라 들어간 술집에는 응당 남아있어야 할 온기가 없었다.


“···형도 영업정지 맞았어요?”


김무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새에 그는 살이 더 빠진 듯했다.


“이거 사고 아니죠?”

“현호야.”

“누가 한 짓이에요? 설마 3H 납품 못 받는 술집들끼리 담합 해서 이런 짓을···.”


만약 사실이라면 실로 추악한 짓거리다.

거래처를 바꾸는 모험은 죽어도 하기 싫으면서, 그러는 와중에 3H는 팔아서 이윤은 남기고 싶다는 거잖아?


답답한 마음에 김무배의 어깨를 잡았다.


“형도 그렇고, 왜 다들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대책을 세우든 뭘 하든 하죠!”

“나니까 그나마 널 만날 수 있는 거야.”

“···예?”

“나는 이미 망하기 직전이었고, 자식도 없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서산에 상인회가 있어. 나도 거기 소속이고. 문제는 거기에 3H를 못 받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거지.”

“설마···.”

“맞아, 영업정지도 다 거기서 한 짓이야. 3H를 받기로 한 가게들을 테러하는 건 물론이고, 그 집 아들딸까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자식들까지?”

“동네 좁잖아. 어른들끼리도 알고 지내는 만큼 애들끼리도 알고 지내는 거지.”


어른들의 싸움에 애들까지 끌어들인다니.

농촌 카르텔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김무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얘기 밖으로 새나가면 영업정지로 안 끝나. 그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게 문 닫게 할 거거든. 그래서 피해자들이 기를 쓰고 입을 다무는 거지.”

“형은 괜찮아요?”

“당연히 안 괜찮지. 나도 망하기 싫어서 네 전화 피하고 숨어다니고 했는데···.”


김무배가 쓰게 웃었다.


“생각해보니까 망해가던 가게 살려준 사람이 너였더라고. 나도 염치가 있는 놈인데 어떻게 계속 널 피해다녀?”

“신고는 했어요?”

“잠깐은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누가 자기 가게랑 아들딸 미래까지 걸면서 그런 짓을 하겠어.”


착잡한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고작 3H 납품하는 거 막으려고 따돌리고 괴롭힌다는 거네요? 다 큰 어른들이?”

“···나도 면목이 없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 상인회가 얼마나 폐쇄적인지는 하는 짓거리만 봐도 알만했다.


섣불리 고발하거나 일을 키웠다가는 외려 애꿎은 희생자만 늘어날 수도 있다.


“형, 그쪽 상인회장이 누구예요?”

“사거리 포차 운영하는 마학수.”

“누군지 알아요. 제가 직접 만나볼게요.”

“마, 만나서 어쩌게?”


어쩌긴.


“끝장을 봐야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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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46 - 녹색 괴물 +8 24.09.02 3,691 119 11쪽
45 045 - D-1 +8 24.09.01 3,971 1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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