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 강도들
#005
호강시켜줄게.
당당하게 지껄인 것치고는 아무런 계획도 없다.
운 좋게 연금술 가방을 얻었을 뿐, 나는 아직도 쫄딱 망한 서른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계획이 없다고 아이템까지 없는 건 아니다.
회복 물약의 능력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팔기만 하면 입소문을 탈 테고, 대박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근데 이것도 참 골때리네···.”
국자를 젓다가 흘끗 솥 안을 바라봤다.
솥 안에서 끓고 있는 건 ‘힘의 물약’이었다.
오크의 힘줄을 넣을 때만 해도 헛구역질이 치솟았지만, 마나 가루를 넣으니 순식간에 사골 냄새로 변했다.
색깔도 하얀 게 딱 사골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국자를 젓고 불을 껐다.
솥에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괜스럽게 긴장하며 사골을···, 아니, 힘의 물약을 한 국자 크게 떴다.
"괜찮네.”
상한 힘줄 냄새가 올라오면 솥을 엎어버리려 했는데, 그럴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후루룩-
겁 없이 국자에 입을 댔다.
“······.”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내려다봤다.
구수하면서도 묘한 단맛이 혀를 감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뭐야?”
후루룩-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한 모금 마셨지만, 역시나 몸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잘못 만든 건가?
실망스러운 와중에도 맛은 좋아서 몇 국자를 입에 때려 부었다.
“에이, 실패했네.”
국자를 놓고 입맛을 쩝 다셨다.
"제조법을 잘못 본 건가?"
몸을 돌려 한약방으로 향했다.
실패한 물약은 버려야 했고, 뜨거운 솥을 맨손으로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장갑이···.”
한약방 문을 슬쩍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우드득-!
문이 통째로 뜯겨버리더니,
와장창!
문에 붙어있던 창문이 산산 조각나며 깨졌다.
멍청한 표정으로 손과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라?”
< 5 >
“신호라도 좀 주던가!”
불평을 쏟아내며 사고의 흔적들을 수습했다.
적당히 망가졌으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해볼 텐데, 문과 경첩이 완전히 뜯겨나가 그럴 수도 없었다.
유리는 쓸어서 버리고 부서진 문은 질질 끌고 가 뒷마당에 숨겨뒀다.
“후우···.”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부서진 문을 바라봤다.
어째 폭발 물약보다 더 위험한 걸 만든 기분이다.
물약의 효능은 1시간이 지나니 서서히 사라졌다.
힘의 물약을 먹고 한 짓이 고작 문 뜯기라니···.
누가 보면 문 뜯으려고 물약 먹은 줄 알겠네.
마당을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좀 늦어.”
[ 무슨 일 있어? ]
“그···, 친구들이 얼굴 좀 보자고 해서. 늦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 알았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
알겠다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뒤처리는 둘째치고, 한약방 문을 훤히 열어두고 집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코딱지만 한 동네에 도둑이 있겠느냐마는···.
“내일 새벽에 사람 불러야지.”
차라리 잘 됐다.
밤새 물약 재료들이나 왕창 구해놔야지.
조제실로 돌아와 곧장 게임을 켰다.
골드는 꽤 빵빵한 편이었지만, 제조법 물량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직접 구하는 수밖에 없나?”
상위 등급의 제조법은 몰라도 하위 등급의 제조법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고민하다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까짓거 해보지, 뭐.”
고요한 새벽이 흘러갔다.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길 몇 시간, 한약방 입구에서 웬 발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 새벽에 손님이 찾아왔을 리는 없고···.
조용히 조제실 문으로 다가가지 흐릿하던 대화가 좀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찾았어?”
“홍태가 지나가다가 봤대.”
“근데 걸리면 어쩌냐. 이번에도 사고 치면 아빠가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했는데···.”
“어차피 내일이면 서울 가잖아. CCTV만 잘 처리하면 절대 못 찾아.”
“맞아, 그리고 문 열어놓은 놈이 잘못이지!”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마구 섞여서 들려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걸 보니 근처 민박으로 놀러 온 놈들인 모양이었다.
“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입 닥쳐, 이나연.”
“이건 범죄잖아!”
“토토 사이트 굴리는 건 합법이었냐?”
“그, 그건 너희들이 시켜서···!”
“그러니까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하라고. 어차피 우리 잡히면 너도 공범이야.”
얼씨구, 아주 지랄이 났네.
대화만 들어보면 양아치 중에서도 갱생 불가능한 종류의 놈들인 듯했다.
조용히 조제실 구석으로 향했다.
상대가 몇 명인지, 무슨 무기를 들고 있는지, 덩치는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원래였다면 겁부터 집어먹고 조제실 문을 걸어 잠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구석에 놓아둔 물약을 꺼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만든 힘의 물약이었다.
문도 통째로 뜯어버릴 정도였으니 저런 놈들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벌컥벌컥-
남은 물약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지만 역시 몸이 변했다는 느낌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약을 담아뒀던 스테인리스 병을 양손으로 꽉 눌렀다.
우지직-!
병이 압축기에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납작해졌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 가서 돈이나 꺼내.”
“여기 인삼즙도 있는데?! 인삼이면 존나 비싼 거 아니냐?”
“그런 거 다 짝퉁이야.”
드르륵-!
“우왁, 씨발!”
“뭐, 뭐야! 사람 있었잖아!”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놀란 시선들이 모였다.
감히 우리 한약방에서 제일 비싼 인삼즙을 들고 있는 놈을 바라봤다.
“내려 놔. 그거 진짜 인삼이야.”
“뭐야···, 혼자인 거 같은데?”
“씨발! 깜짝 놀랐잖아!”
“한약방 주인이야?”
“생각보다 젊네. 노인네가 운영할 줄 알았더니.”
대꾸 없이 조제실에서 걸어나갔다.
예상대로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놈들이다.
수를 세어보니 남자가 4명 여자가 3명이었다.
적극적으로 한약방을 뒤지는 놈들과는 달리, 멀찍이 떨어져 어쩔 줄 모르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대화로 추측해보면 이나연이라는 여자인 듯했다.
물론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남자 놈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쩌냐.”
“계속해?”
“뭘 계속해! 또 사고 치면 나 진짜 뒈진다니까?”
남자 하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가자.”
“에이, 씨발···. 한 건 하나 했더니.”
“야, 가자.”
어처구니가 가출하는 기분으로 놈들을 바라봤다.
“가긴 어딜 가? 경찰 불렀으니까 얌전히 있어.”
“우리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그런 얘기는 경찰이랑 하시고. 어차피 근처 민박 몇 개 없어서 도망가도 금방 잡혀.”
“CCTV도 없는데 어떻게 잡아?”
“여기 오는 길에는 몇 개 있지 않았을까.”
놈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마 여기까지는 생각 못 한 듯했고, 나는 나 대로 놈들의 지능에 감탄해야 했다.
“어떡하냐.”
“나 진짜 걸리면 아빠한테 뒤진다고!”
“가만히 있어 봐.”
사내놈 중 하나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설마 싶은 순간 손잡이에서 칼날이 툭 튀어나왔다.
“아저씨만 입 다물면 조용히 끝날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경찰은 알아서 돌려보내시고. 얼굴 기억했습니다?"
칼 든 놈이 픽 웃으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놈이 뒷모습을 보이자마자 뒷덜미를 덥석 잡아 벽 쪽으로 던져버렸다.
시퍼런 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상식을 초월하는 이 힘이 연약한 인간을 죽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
콰앙!
철거현장에서나 들릴 법한 굉음과 함께 칼 든 놈이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나도 모르게 기겁하며 던져버린 놈에게 달려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벽을 살피니 금이 가 있었다.
죽은 거 아니야?
“야, 임마! 눈 좀 떠봐! 괜찮아?!”
사람을 죽이면 정당방위고 뭐고 없다.
쓰러진 놈을 마구 흔드는 와중에 넋 나간 표정으로 구경하던 3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구경하지 말고 빨리 잡아!”
뻐억! 뻑!
등으로 발길질 비슷한 게 느껴졌다.
아프기는커녕 마사지 건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유리병을 손으로 터트려버렸을 때도 가볍게 긁히기만 하지 않았나?
힘의 물약은 맷집도 늘려주는 모양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야, 임마! 눈 뜨라고! 죽으면 안 돼!”
“개새끼야! 홍태한테서 손 떼!”
“에이, 귀찮게 진짜!”
한 놈의 다리를 잡고 가볍게 던졌다.
덤벼들던 세 놈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넘어졌다.
“끄으···.”
“괘, 괜찮아? 살아있어?”
“으···, 으아악!”
깨어난 놈이 귀신이라도 본 듯이 물러났다.
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방구석 백수도 모자라 살인범이 될 뻔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했다.
“도, 도망쳐!”
“홍태는?!”
“몰라, 씨발! 그냥 뛰어!”
도미노처럼 넘어진 세 놈이 벌떡 일어났다.
쓰러진 놈을 두고 훌쩍 뛰었다.
뛰어서 앞을 막으려는 생각이었는데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으아아!"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속도를 내가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와장창!
잘못 쏜 물로켓처럼, 혹은 볼링공럼 날아가 도망치던 놈들의 등짝을 그대로 박아버렸다.
"커헉!"
"어딜 가?!"
"씨···, 씨발! 이거 안 놔?!
도망가던 세 놈을 와락 껴안았다.
그 와중에도 너무 세게 안아 터져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안아야 했다.
그리고 있기를 몇 분.
마당으로 요란한 사이렌과 경찰차가 들어섰다.
“현호야!”
“얌전히 이리 와, 새끼들아!”
“너희 하늘 민박에 있던 놈들이지?!”
김재선 경관이 사색이 되어 내 쪽으로 달려왔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경찰들이 깔고 앉은 놈들에게 은팔찌를 하나씩 선물했다.
김재선이 급히 나를 살폈다.
“현호야! 너 괜찮아?!”
“예, 괜찮아요. 안쪽에 여자 셋이랑 칼 들고 설치던 놈 하나 더 있어요.”
“카···, 칼을 들었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순간 머리로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안타까운 표정으로 미간을 짚고···.
“저놈들이 한약방 문을 다 부숴버렸어요.”
“뭐?!”
김재선이 도끼눈을 하자 놈들이 펄쩍 뛰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우리가 언제?!”
“저 새끼 거짓말하는 거예요! 문은 원래부터 부서져 있었다고요!”
들은 척도 안 하고 귀를 후비적거렸다.
김재선이 혀를 쯧 차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약방에 CCTV는 있지?”
“그게 얼마 전에 고장이 나서···.”
“흐음.”
김재선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CCTV를 내놓았다가는 한약방 문짝을 뜯어먹은 사람이 나라는 게 밝혀질 터였다.
문이야 혼 좀 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맨손으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였다.
문득 한약방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너희도 빨리 나와.”
“우, 우리는 말렸어요!”
“시끄러! 그런 얘기는 경찰서 가서 해!”
도둑놈들과 함께 온 여자들이었다.
별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한 사람에게 눈이 꽂혔다.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덜덜 떨고 있는, 유일하게 말리려고 했던 여자였다.
이름이···, 이나연이었나?
친구 잘못 사귀어서 인생 종 치는구나.
칼 들고 덤빈 놈은 빼도 박도 못하고 특수 강도죄일 테고 이나연도 법의 심판을 피해가기는 힘들 터였다.
물론, 거기까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고개를 휙 돌리자 김재선이 다가왔다.
“현호야, 우선 이놈들 경찰서로 인계해서···.”
말하던 김재선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 역시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져야 했다.
쌍라이트를 켜고 거칠게 달려오는 자동차.
그 옆으로 낫과 호미, 야구 방망이 등을 들고 뛰어오는 익숙한 얼굴들···.
전쟁터의 장군처럼 달려오던 박창덕이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어떤 개새끼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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