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조자
선우가 미친놈마냥 주조자에게로 달려드는 신실자를 힘껏 후려쳤다.
<꾸엑?!>
그러자 그 자리에서 바닥에 처박히는 자칭 성직자.
<······.>
<······.>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르고, 살짝 눈치를 보던 3등신의 소녀가 다시 부채를 펼쳤다.
<‘별빛의 주조자’이니라!>
“왜 다시 소개하는 건데···?”
그러자 도살자가 팔짱을 끼더니 진지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사실 여태까지 묻지 않았던 게 하나 있었다만.>
“뭔데.”
<마스터의 정확한 성별이 남자가 맞나?>
그 말에 선우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여자겠냐?”
<꼭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간혹 성 정체성이 여자에 가까운 사람도 있지 않나.>
진짜 미친놈인가.
<솔직히 말해도 된다. 나는 편견이 없는 쪽이니까.>
선우가 이마를 짚었다.
“부탁인데 너흰 제발 편견 좀 가져줘라···.”
<그럼 대체 여자가 왜 나온 건가.>
“내가 알겠냐 그걸?”
뭔가 묘한 분위기에 두 눈을 끔뻑이던 소녀가 입가를 어색하게 올렸다.
<호, 혹시 이 몸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고.”
<뭔가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 것 같느니라···.>
거기에 뭐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끔뻑이던 선우가 머리를 긁었다.
“그러니까, 그. 넌 빙의혼이잖아. 그치?”
주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느니라!>
“그럼 네 마스터에게 빙의를 해야 하잖아. 그치?”
<음. 당연한 것이니라.>
“근데 난 남자잖아.”
<···?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인가아?>
“아니.”
이게 문제가 안 돼? 나만 지금 신경 쓰이는 거야?
선우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하던 주조자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느니라!>
“어?”
조그만 주조자가 제 가슴을 펴며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 말했다.
<이 몸에겐 낭군이 없으니까 말이다!>
“······예?”
<으음···?>
<잘못들었슴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신실자를 다시 찍어 누른 선우가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내가 이해가 잘 안 되어서 그러는데.”
<음. 말해보거라. 나의 주인.>
“낭군이 없는 거랑 이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 거야?”
그러자 갑자기 벌게지는 주조자의 얼굴.
<엇, 그,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인가···?>
“?????”
심지어는 부끄럽다는 듯 부채 뒤로 숨기까지 하는 그녀였다.
<···나의 주인은 보기보다 짓궂은 성격이로구나.>
선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니 대체 뭐가 짓궂다는···.”
<아니이, 빙의야말로 기실 진정한 혼연일체이자 일심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이지 않은가아.>
“그렇···.”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이는 달리 말하면 빙의란 서로 모, 몸을 섞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
“예?”
부채로 제 얼굴을 가린 주조자가 작게 헛기침했다.
<즉, 그, 부부의 합방과 마찬가지라는 건 이 몸도 익히 알고 있느니라!>
<푸후훕!>
<컥···!>
그 순간 양쪽에서 튀어나오는 격한 사레.
그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에 선우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시발 뭐요?”
아무래도 이번 영웅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
잠시 뒤.
혼신의 설명을 들은 주조자가 작은 눈썹을 팔자로 모았다.
<그러니까 하, 합방 같은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
“절대, 그런 거 절대 아니야.”
그 파격적인 발언으로 여자고 뭐고 머릿속에서 싹 사라진 신실자가 열변을 토해냈다.
<애초에 말이 안 되지 않슴까! 어떻게 빙의가 그게 됨까?!>
<자, 잠깐만 마스터. 나, 나 좀 누워있겠다.>
어지러운 듯 함바그 조차 뱉어내고 쓰러지는 도살자.
그 반응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주조자가 선홍빛 눈망울을 갸웃했다.
<하지만 빙의를 하면 일심동체가 되는 건 맞지 않은가?>
“아니지. 그냥 내가 몸을 빌려주는 것뿐이라니까?”
<그래도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주조자가 양손을 허리 위에 꾹, 올리곤 말했다.
<그럼 일심동체가 맞는 게 아닌가아? 나는 부부란 일심동체라 배웠느니라.>
“부부가 일심동체여도 일심동체가 곧 부부인 건 아니지!”
<모, 몸을 섞는데 어떻게 부부가 아니란 말인가! 마스터는 음란한 사람인 게야?>
돌겠네.
신실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니까 그게 왜 몸을 섞는다는 결론으로 가는 검까!>
<비, 빙의를 하면 하나가 되지 않는가!>
<와, 진심 미치겠네. 이 여자.>
그가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스터는 왜 뽑아도 이런 여자를 뽑으신 검까!>
“어이가 없는 놈이네 이거. 제일 먼저 좋다고 뛰어들 땐 언제고.”
<제기랄!>
<···차라리 변태 성녀가 백만 배는 나을 거 같다.>
물로 축인 손수건을 이마 올린 도살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을 지은 주조자가 그들을 말렸다.
<싸, 싸우지들 말거라···.>
“그럼 빙의가 거시기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해.”
<하지만 하나가 되는 건 맞고···.>
“이상한 데에서 고집이 세네···?”
<내, 내 말이 맞지 않는가아!>
“아오···.”
머리를 짚은 선우가 작게 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지. 이건 구국의 결단을 할 때인 거 같다. 우리 모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주조자야.”
<으응, 나의 주인.>
“딱 정해.”
<무얼 말인가···?>
“네 고집을 버릴래 아니면.”
선우의 손가락이 어느 버튼으로 향했다.
“너 자신을 버릴래.”
그건 다름 아닌 폐기 버튼이었다.
“선택해.”
<······!!>
<마스터···!>
S랭크 영웅임에도 떨어진 그 강단에 감동 받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신실자.
거기에 충격받은 듯 주조자가 숨을 삼켰다.
<그, 그건···.>
“빨리. 어느 쪽이야. 나 팔 아파.”
<그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던 주조자가 이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 알겠느니라···.>
그녀가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빙의는··· 합방이 아니니라.>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리, 아니 끔찍한 생각이라도 했다간 S 랭크고 뭐고 그냥 바로 폐기해버릴 줄 알아. 난 한다면 해. 어!”
그러자 주조자가 다람쥐마냥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알겠느니라···. 그러니 폐기만은 참아다오. 나의 주인.>
이윽고 한숨을 삼킨 선우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실자 이놈도 그렇고 나오는 영웅들마다 한 번씩은 기강을 잡아 줘야 하냐.”
진짜 새삼 도살자가 선녀, 아니 선남이라고 생각한 그였다.
거기에 실자가 정정해달라는 듯 말했다.
<마스터. 그래도 내가 얘보단 나았다고 생각함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인정.”
차라리 실자처럼 개기는 편이 백 배는 나았다.
그건 그냥 줘 패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를 들은 주조자가 우는 소리를 냈다.
<히잉···>
“뭘 잘했다고 히잉이야 히잉은. 네가 말이야? 확 그냥. 상태창이나 열어.”
<아, 알았느니라. 열테니 너무 보채지 말거라아.>
그러자 그의 눈앞으로 떠오른 그녀의 상태창.
[영웅 ‘별빛의 주조자’]
[랭크: S]
[전용 스킬: 르키아의 망치 (M), 고귀한 주조 (Lv ???), 장인의 갈무리 (M), 만년 요리술 (M), 설경의 정수 (M), 여신의 연단술 (M), 별빛의 나그네 (M)]
[빙의 가능 시간 : 4시간]
[재빙의 대기 시간 : 2시간]
이를 읽어 내려가던 선우가 잠시 움찔했다.
‘르키아?’
왠지 모르게 익숙한 단어에 선우가 재빨리 [설경을 가르는 별빛의 검]의 장비 정보를 눈앞에 띄웠다.
[설경을 가르는 별빛의 검] [등급: 전설 (잠금)]
[제국의 수호신 ‘르키아’의 화신이 빙하에 비춰진 별빛을 받아 제련한 검으로 설경의 혹독한 눈보라를 휘감아 얼음 속성의 강력한 검기를 쏘아낼 수 있다.]
“어, 설마 이 전설 무기···.”
그가 필라테스 매트 위에 놓인 대검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네가 만든 거야?”
그러자 주조자가 큰 눈망울을 깜빡이더니 잠시 말을 골랐다.
<으응,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느니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몸이 만든 것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검의 형(形)은 여신님이 조형하시되, 이 몸은 그 검에 속성을 부여했다고 보면 되느니라.>
속성을 부여했다?
“이 검의 능력을 네가 부여했다는 거야?”
<그렇느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검의 주인이 아니라 검을 만든 사람이 튀어나왔단 얘기였다.
“자, 잠깐만!”
선우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장비의 주의사항으로 향했다.
[주의! 이 검은 그라이엄 출신 영웅의 전용 무기입니다. 따라서 그 진정한 힘은 북부의 군주에 의해서만 개방됩니다.]
설명에 의하면 별빛의 검은 전용 무기라 철성의 주인인 그라이엄 출신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주조자는 어디까지나 제련한 사람이지 북부의 군주는 아니지 않나?’
만일 그렇다면 제대로 외통수 맞은 셈이었다.
전설 무기 제대로 써먹겠다고 이걸 매개로 그 주인을 뽑으려고 한 건데, 정작 뽑은 영웅이 써먹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자 고개를 갸웃한 주조자가 이내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 그게 걱정이었던 것인가아? 나의 주인도 참. 그거라면 염려할 거 없느니라.>
그녀가 소매를 걷자 마치 눈처럼 새하얀 팔뚝이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뿅! 하고 나타난 망치가 그 조막만 한 손에 잡혔다.
<말했지 않은가? 이 검의 속성은 이 몸이 부여하였다고.>
그 순간 발동되는 스킬 ‘고귀한 주조’.
[스킬 ‘고귀한 주조 (Lv ???)’]
[설경의 공주가 별빛의 인도를 받아 터득한 주조법]
[장비의 정보를 일부 수정하거나 원하는 정보를 한 줄 이상 추가할 수 있다.]
[이때 사용자는 수명 혹은 ‘설화의 파편’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며 대상의 장비 등급, 수정되는 내용, 수정된 횟수에 따라 필요한 대가의 량이 달라진다.]
[띠링!]
[‘설경을 가르는 별빛의 검’은 ‘별빛의 주조자’가 제작한 검입니다!]
[자신이 제련한 장비이므로 1회에 한하여 주조에 대가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망치로 몇 번 두드려주면···.>
탕! 탕! 탕!
주조자가 망치로 검을 두드린 그때였다.
[스킬 ‘고귀한 주조’의 효과로 ‘설경을 가르는 별빛의 검’의 주의사항이 수정되었습니다!]
그 메시지에 놀란 선우가 황급히 별빛의 검의 장비 정보를 다시 띄웠다.
[주의! 이 검은 그라이엄 출신 영웅의 전용 무기이지만 그 진정한 힘은 제작자인 ‘별빛의 주조자’도 개방할 수 있느니라.]
다시 본 주의사항은 웃기지도 않은 말투로 바뀌어있었지만, 그 효과는 실로 강력했다.
[설경을 가르는 별빛의 검] [등급: 전설]
[아르키아 제국의 북방을 지키던 그라이엄 대공가에게 대대로 전해지.....]
중략.
[장비 스킬 ‘철성은 녹슬지 않고’]
[북방의 설경과 함께 푸른 등불의 철성을 일시적으로 현현 시킬 수 있다.]
[해당 설경에 지배당한 자는 상태이상 ‘둔화’에 걸리며 모든 능력치 레벨이 30% 감소한다.]
“···!!”
선우가 두 눈을 끔뻑였다.
‘장비 정보에 걸려있던 잠금 표시가 전부 사라졌어?’
<후후, 보았는가아?>
거기에 주조자가 부채를 촥! 피더니 제 가슴을 펴곤 말했다.
<이게 바로 이 몸의 힘이니라!>
이를 본 선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얘 폐기했으면 좆될 뻔했다.’
생각한 것보다 스킬이 더 사기였다.
*
한편, 꾼 사냥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팬카페.
<어둠의 꾼꾼사모>에선 오늘 대단히 중요한 오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무명을 덕질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카페이자 알게 모르게 경쟁 포지션에 있던 팬카페, <이름없음>과의 회담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각 카페의 주요 회원들이 모이는 최초의 자리.
특별히 파티룸까지 대여하여 가지게 된 모임에는 가면을 쓴 열댓명의 사람들이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어둠의 꾼꾼사모>의 회원들. 다른 한쪽은 <이름없음>의 회원들.
그런 가운데, <꾼꾼사모> 측에 앉아있던 한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이 자리를 빌어 모임에 흔쾌히 참석해주신 <이름없음> 회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모이지 않을 수가 있어야죠.”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물 가면들.
그때 두더지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꾼꾼사모>의 ‘쭈이’님께 재차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가 물었다.
“꾼 사냥꾼과 무명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정말 사실입니까?”
일순 이어지는 침묵.
<꾼꾼사모>들의 시선이 탁자 끝에 앉아 있는 강아지 가면에게 향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아지 가면, ‘쭈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다. 제가 똑똑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 꾼꾼님께서 스스로를 ‘무명’이라고 하시는걸요.”
그러자 웅성거리는 파티룸.
거기에 두더지 가면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허어, 그렇군요.”
그 말투에 한 꾼꾼사모 회원이 눈빛을 날카롭게 세웠다.
“왜 그러시죠? 설마 우리 꾼꾼님이 무명이라서 실망했다, 뭐 그런 건가요?”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한숨을 삼킨 그가 고개를 젓더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본인에게 들으시는 게 좋겠군요.”
“네?”
“저희 카페에 가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분이시지만··· 중요한 참고인이라 특별히 참석을 요청드렸습니다. <욘서>님.”
그러자 ‘쭈이’와 마찬가지로 끝자리에 앉아있던 ‘욘서’라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늘씬한 비율에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놀라길 잠시.
두더지 가면이 덧붙였다.
“이건 사실 여기 계신 저희 ‘이름없음’의 영자급 회원분들도 들으신 적 없는 내용입니다. 아무쪼록,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들으시고 너무 충격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욘서님.”
“네.”
거기에 욘서가 슬픈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사실··· 무명, 그러니까 꾼 사냥꾼님께선.”
작게 심호흡한 그녀가 말했다.
“현재 시한부나 마찬가지십니다.”
“!?”
“네??!”
그 말에 <이름없음> 쪽의 고양이 가면이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뭐라구요?!”
그 고양이 가면의 카페닉은 ‘최강빈곤녀’.
본명은 최가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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