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별무반(別武班) 창설
이반 표도르비치와 그의 세력에 대한 처리 문제를 빅토르에게 일임했다.
이건 빅토르에게 주는 기회이자 시험대였다.
만일 빅토르가 스트로가노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합류할 생각이라면 이반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빅토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의외로 강단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한의 의도를 간파한 빅토르는 미련없이 이반과 그의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잔인한 짓이지만 이한이 의도한 일이기에 말릴 수도 없었고 말릴 일도 아니었다.
이곳의 사정이 서쪽의 요새에 알려지면 곧바로 군대가 들이닥칠 테니까. 그러면 얼마되지 않는 친위대만으로는 결코 쉽게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제 빅토르와 카자크 전사들은 돌아갈 다리를 불사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고향을 잃고 들개처럼 떠돌던 신세다.
지난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스트로가노프의 사냥개로 살아오면서 실오라기 같은 희망조차 없었던 그들이다.
“빅토르! 후회하지 않느냐?”
오십 명에 이르는 청룡대가 급히 소환되었다. 요새는 이한의 후발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완벽하게 전투 대세를 갖추고 등장한 청룡대 50기는 빅토르를 비롯한 카자크 전사들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았다.
서로 하나가 되었지만 당분간은 알게 모르게 알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한은 그런 불편한 동거를 완벽하게 차단해 버렸다.
“카한. 청룡대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우리 요새를 건드릴 적군은 지독한 패배를 맛볼 것입니다.”
씨익. 이한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밝은 미소를 던졌다.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
카자크 전사들은 강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전투력을 까마득하게 넘어선 청룡대를 본 순간 이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오늘부터...이곳은 대고려의 영토다. 이 요새의 이름은 흑룡두. 우리 대고려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빅토로!”
“예. 칸이시여!”
“네가 흑룡두의 대장이다.”
“리...이한...,”
무척 놀란 눈치다. 이제 이한이 이끄는 청룡대의 수가 100여 명에 가깝다. 자신은 기껏 서른 정도의 카자크 전사를 거느리고 있을 뿐이 아닌가.
“청룡대 50을 너에게 붙여줄 것이다. 이곳을 노리는 세력이 누구든 모조리 격퇴하라. 할 수 있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카한!”
아무르의 다른 이름 흑룡강의 이름을 빌려 그 머리에 위치한 곳이란 뜻으로 흑룡두라 이름을 지었다.
이한은 연해에서 사냥과 모피 작업을 주로 하는 주민 쉰 가구를 흑룡두로 이주시켰다.
원래 원주민들이었던 예벤키인과 함께 고급 모피를 만들어 이한의 상단에 넘기도록 했다.
이한의 투먼 상단은 급격하게 성장하여 중형 갤리온에 해당하는 교역선 세 척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를 운용하는 책임자는 천개복과 사라운 그리고 시게루였다.
물론 그들을 총괄하는 인물은 김대복이다. 그는 어느새 투먼의 수군 제독 역할과 투먼 상단의 대객주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세 척의 중형 교역선과 네 척의 중소형 전함 그리고 스무 척이 넘는 중형급 어선이 모두 김대복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보다 작은 어선들은 토성리와 녹도, 연해에 수두룩했다. 이 모든 배들은 바로 허천의 선소에서 건조되었다.
흑룡두에서 연해를 거쳐 솔호리로 복귀하자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었다. 이한은 솔호리에서 며칠을 보낸 뒤 곧장 사군으로 향했다.
그는 여연의 이판주 촌주를 찾았다. 이한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김채언과 서림이 붙었다.
득보는 이제 솔호리를 비롯한 이한의 영지를 총괄하는 처지여서 함부로 자리를 비울 처지가 아니었다.
은정로가 뒤를 봐주고 있다지만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와 시란, 바얀이 있어 니루 전사들을 통솔할 수 있었다.
열 개가 넘는 솔호 니루가 이한의 수중에 놓였다. 공식적으로는 각 니루당 쉰 명 안팎의 전사들이 편재되었다.
실제 조선인과 야인의 혼혈이 상당수였다. 주로 야인과 혼혈들이 니루 전사의 주축이었다.
“촌주! 그간 평안하셨소?”
“천군 나리!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이한의 손을 부여잡은 이판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이제 사군 지역은 완전히 군영처럼 변해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목마다 초소가 세워졌고 출입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건 5만이 훌쩍 넘어선 유민들의 생존과 밀접하기 때문에 그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한이 부재 중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을 낱낱이 고한 이판주가 훈련장으로 안내했다.
이미 기본 훈련을 모두 마치고 정예병을 상대로 특수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또한 이한이 급히 제작한 교본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몇이나 뽑았소?”
“그건...제 아들놈이 맡고 있는지라...,”
“아! 대남이...어서 부르시오.”
이판주가 소년병 하나를 불러 이대남을 급히 소환했다.
“충. 천군 나리! 오셨습니까?”
아비를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서글서글한 호남형인 이대남이 각이 제대로 잡힌 군례를 바쳤다.
아비 이판주 밑에서 무예를 익혔고 최근 지휘관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젊은 장수였다.
“고생이 많군. 별무반은 몇이나 뽑았나?”
“그게...많지는 않습니다. 5백 정돕니다.”
생각보다 적다. 최소한 천여 명은 될 것으로 판단했다. 5천 병력 중에 겨우 1할만 별무반에 선발된 것이다.
이한의 표정을 본 이대남이 변명을 했다.
“소인 놈이 생각건대 별무반은 특별한 부대라 여겼습니다. 최소한 일당십(一堂什)은 기본이요 유사시 일당백(一當百)도 감당해야 할 전사가 아닙니까?”
순간 이한은 이대남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대남이 선발한 별무반의 실력이었다.
“가자!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예. 나리!”
이대남은 잔뜩 긴장했다. 지난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엄청난 훈련을 거듭했다. 다행히 천군 나리의 지원은 충분했다.
유민들은 굶지 않았고 스스로 자급할 수 있는 종자까지 보급했다. 이미 감자는 수확을 했고 그게 아까운 곡식 대신 유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무기는 풍족하게 제공받지 못했지만 여연에 별도로 야장간을 갖추고 병사들이 사용할 간단한 창과 칼을 제작했다. 유민 중 장인 출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
그만큼 조선 땅 안에서 장인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활 역시 비싼 각궁은 겨우 2백여 개를 보급받았지만 솜씨 좋은 장인들이 나서서 탄성이 좋은 목궁을 만들어 지급했다.
각궁보다는 못했지만 만주족이 사용하는 활보다는 성능이 뛰어난 놈이었다.
그럭저럭 2천의 정예군은 썩 괜찮은 무기를 지급받았다. 하지만 3천의 예비병력은 아직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지 못했다.
그건 재물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많은 수량을 한꺼번에 갖추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었을 뿐이다.
이대남이 이한을 대동하고 훈련장에 나서자 도열해 있던 5백의 전사들이 지휘관의 구령에 일제히 군례를 바쳤다.
이진한의 기억을 갖고 있던 이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군기였다.
이한이 무엇보다 놀란 것은 별무반의 무장이었다. 전부 기병이었다. 처음부터 말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을 뽑아 훈련을 시킨 덕분이라고 했다.
처음에 사군지역에는 전투가 가능한 말이 백여 필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투먼에서 비밀리에 반입한 전마였다.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이한이 이대남에게 명했다.
“별무반의 실력을 보고 싶다.”
“예. 천군 나리!”
이대남이 부장에게 명을 내렸다. 5백의 기병 전사들이 마치 훈련하듯이 질서정연하게 시범을 보였다.
달리는 말에서 표적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데 명중률이 대단했다. 솜씨 좋은 자들은 50보 정도의 거리에서도 표적에 적중시켰다.
이한은 아무런 표정 변화없이 병사들의 시범을 주시했다. 이대남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자신이 보기엔 썩 괜찮은 실력이라고 여겼는데 천군 나리는 한마디 칭찬도 내비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대남은 교본을 수십 번이나 독파했다. 별무반이 수행해야 할 전투가 어떤 것인지 나름대로 추론하고 이를 병사들에게 훈련시켰다.
발이 부르트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변경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전운에 마음이 급했다.
천군 나리가 아니었다면 사군지역의 유민들은 무방비 상태로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시범은 어느덧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별무반 병사 중 50여 명으로 구성된 총병의 시범이 이어졌다.
타앙. 탕. 탕. 타탕. 타앙.
전원 기마 상태에서 표적을 향해 사격을 한 뒤 말에서 뛰어내려 앉아 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진 사격에 70보 거리에 놓여 있는 표적에 총탄이 박혔다.
빗나가는 총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비싼 물건이기 때문에 총탄 보급이 여유롭지 못했을 터인데도 이처럼 엄청난 명중률이라니.
“좋군. 좋아!”
혼잣말로 떠드는 이한의 말에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던 이대남의 입고리가 올라간다.
“이 부장.”
“넵. 천군 나리!”
“각개 전투 시범을 보고 싶다. 가능하겠는가?”
“그러믄요. 바로 시작하겠나이다.”
이대남은 신이 났다. 이한의 표정으로 보아 지금까지의 시범을 나쁘게 보지 않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대남이 명을 내리자 깃발이 나부꼈다. 이미 대군을 지휘하는 묘리를 터득한 대남이다. 이 또한 교본에 따른 것이지만 이를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지휘관의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이대남은 이한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대로 된 무장 하나를 건진 것이다.
열 명이 한 조가 되어 진행된 각개 전투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참호를 이용한 전투부터 은신술과 침투술 그리고 단검술과 연노 사격까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 되었다. 모두 집합!”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한이 크게 소리쳤다. 두 시진 이상 시범이 진행되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이한의 첫 일성이다.
이대남은 바짝 군기가 든 모습으로 집합 명령을 내렸다. 마치 바둑판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집합 대열을 이루고 있는 별무반은 이한의 기대 이상이었다.
‘대단하다. 석 달 만에 이게 가능하다고. 이대남..., 정말 대단한 놈이다. 나머지 병사들도 만만치 않겠군.’
흡족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모두 수고했다. 이 부장! 특식을 준비하라.”
“예. 천군 나리!”
솔직히 별무반 병사들의 식사는 조선군 정예병인 갑사 못지않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이한의 특명에 의해 밥도 충분히 제공되었지만 고기와 생선도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호사(豪奢)였다.
이판주는 이한의 명을 받아 아껴두었던 술을 동이 째 내놓았고 사냥으로 잡은 고기와 건조한 생선이 제공되었다.
훈련장은 금방 잔치 분위기를 연출했다. 120명이 한 부대였다. 열 명이 한 대를 이루었고 마흔 명이 소대가 되었다. 3개의 소대가 하나의 특임대가 되었고 특임대 넷이 모여 별무대가 되었다.
“이 대장!”
“예. 나리.”
“앞으로 별무대는 넷으로 늘어날 것이다. 별무반을 이끌 지휘관은 바로 너다. 할 수 있겠느냐?”
감격. 이대남은 온몸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별무대 하나만 해도 엄청난 군대다. 솔직히 조선군 따위 몇천도 두렵지 않았다.
건주위 기마 전사들이 매우 사납다고 했지만 별무반의 상대는 아니라고 여겼다.
말을 다루고 활을 쏘는 실전 경험이야 그들을 능가하기 쉽지 않겠지만 별무반은 만주 전사와는 질이 다른 무장을 했다.
특임대 단위로 유격 전술을 편다면 얼마든지 놈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무려 이런 별무대를 넷이나 지휘하게 된다니.
“목숨을 걸겠습니다. 나리!”
“그 목숨...더 큰 일에 쓸 것이니 소중히 하라.”
“나...나리!”
이대남의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판주 역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자식이 인정받는 모습에 그간 쌓였던 설움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촌주! 지금 우는 것이오?”
“아...아니. 불티가 날려서 그만..., 허허. 나리 제 술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따르시오.”
이판주가 권한 술잔을 가득 채운 이한이 단숨에 삼켜버렸다. 네 명의 특임대장과 함께 술자리를 하던 이한이 병사들이 먹고 마시는 곳으로 향했다.
이한이 등장하자 병사들이 무척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한은 병사들과 조금의 허물도 없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십인대 단위로 뭉친 곳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자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권하는 술잔을 한두 잔씩만 마셨음에도 거의 백여 잔에 이른 것이다.
훈련장에 마련된 숙소에서 잠에 빠져든 이한을 위해 친위대 열 명이 밤새 불침번을 섰다.
다음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이한은 기분 좋은 숙취를 느꼈다. 서림이 조그만 종지에 무언가를 담아 건넸다.
“드세요.”
삼과 헛개 열매를 달여 만든 진액이다. 이한이 제조법을 알려주었고 투먼에서 비밀리에 조제를 한 물건이다.
피로회복을 빠르게 해주었고 숙취 정도는 가볍게 물리칠 정도로 뛰어난 약효를 보여주었다. 아무나 복용할 수 없는 비싼 놈이다.
“뭐 이 정도 숙취에 그 비싼 놈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아꼈다가 나중에 먹지.”
“쓸데없는 소릴랑 말고 빨리 드세요.”
평소에는 공손하기 그지없는 서림이지만 이한의 안위와 건강에 관한 일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새끼. 아...알았어. 먹으면 되지. 왜 인상은 쓰고 그래.”
약이란 게 다 그렇다. 무지 쓰다. 서림이 감초 조각을 하나 내밀었다. 이한이 얼른 받아 입에 넣고 씹었다.
“하아...조금 덜 쓰게 만들면 어디 덧나나.”
“쓰니까 약이지. 우리 아바이 이거 몇 번 복용하더니 회춘한 것 몰라. 이거 아주 요물이라니까.”
사실이다. 휘경 선생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잘 먹지 않지만 서달 스승은 주기적으로 복용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하던 양반이 완전히 이십대 청년 부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과하면 넘쳐. 적당히 드시도록 해.”
“뭐 내 말을 들어 처먹어야지. 형이 말해. 난 못해.”
서림은 둘만 있을 때는 형이라 부른다. 이한은 그런 서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군을 점검하고 곧바로 녹도로 향했다. 그곳에 김대복이 교역선 세 척을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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