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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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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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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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4

DUMMY

천막을 접어 수레에 실은 운부의 부민들은 가축을 몰아 회색 산맥을 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 선두에서 길을 잡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운유였다.


운유는 흡사 이 산맥을 여러 차례 넘어본 경험이 있는 듯 익숙하게 부민들을 이끌었다.


“운유 님은 어떻게 이런 길을 알고 계시는 거지······?”


부민들은 운유를 쫓아 이동하면서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본디 벼랑의 한 뼘 협로조차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지날 수 있는 게 사람인바. 제아무리 산세가 험하다 한들 사람이 지날 만한 길이 아예 없을 리는 만무했다.


다만 지금 운유가 안내하는 길은 그렇게 한두 사람만이 목숨을 걸고서야 겨우겨우 지날 수 있는 협로가 아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수레와 가축을 끌고서도 능히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이처럼 다수의 사람과 물자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은 그 지역에 대해 숙지하고 있지 않고서야 찾기 힘든 것이었다.


“분명 운유 님은 초행길일 텐데.”

“어쩌면 바람이 속삭여줄 걸지도 모르지. 하늘이 아끼는 장이족이시니.”


부민들은 호기심에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으나 운유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운유는 영락없는 어린애였건만, 장이족 전사를 참수한 이후부터는 어째서인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부민들은 그 무서운 위엄 탓에 좀처럼 운유를 쉽게 대할 수가 없었다.


반면 내막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운린은 운유가 길을 잡는 모습을 보고 그의 앞날 이야기에 좀 더 믿음이 붙었다.


과연 운유의 말마따나 이백 년쯤 방방곡곡을 종횡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길을 잘 알지 못할 테니 신빙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쟤가 검은 평원을 통틀어 제일가는 용사가 된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되긴 하지만.’


허풍처럼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나 괴리감이 너무 심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아버지를 떠올려봤다.


운린의 체감으로는 아버지 역시 용맹이 대단한 전사였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낭패를 당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아버지조차 하얀 초원의 최강자들을 비교하는 물망에는 거론되지 않았었다. 하얀 초원은 넓었고, 걸출한 전사들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운유가 하얀 초원 못잖게 드넓은 검은 평원에서 으뜸이었다고 하니, 운린에게는 너무도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하아아아암.”


지금도 저렇게 배불리 젖먹고 졸린 강아지처럼 하품하는 애가······ 미래의 최강자?


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뒤에서 운린이 고개를 흔들거나 말거나, 부민들이 별의별 해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말거나, 운유는 길잡이 노릇에만 충실했다.


운유가 이끄는 대로 부민들은 완만한 비탈을 오르기도 했고, 자갈 깔린 위에 듬성듬성 풀이 자라난 모래밭을 걷기도 했으며, 잔잔하고 작은 샘을 건너기도 했다.


“횃불을 준비해라.”


고갯길을 내려오자 괴물이 입을 벌린 것 같은 형상의 동굴이 나타났다.


횃불을 만들도록 분부한 그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동굴로 들어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내부는 스스로의 손바닥을 코앞에 가져다 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횃불의 불빛은 의외로 널리 퍼지지 않았기에 부민들은 발밑을 조심하면서 앞사람의 뒤통수만을 쫓아가야 했다.


운린도 수레에서 내려 걸었다. 동굴 바닥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도저히 타고 갈 수 없을 만큼 수레가 심하게 흔들렸던 탓이었다.


‘이 동굴은 언제 끝나는 거지······. 다들 잘 따라오고 있나?’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걷던 운린은 불현듯 뒷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촛불 같은 횃불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고, 수레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 가축들의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뒤섞여 은은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운린은 안심하며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데 하필 바로 그때 돌부리에 발이 걸려 버렸다.


휘청이는 와중에도 애써 똑바로 서고자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절뚝이는 오른쪽 다리가 또 말썽이었다. 기어이 균형이 무너지며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운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닥쳐올 아픔을 각오했다.


다행히 꼴사납게 자빠지기 직전 그녀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손이 있었다.


“고, 고마워.”


운린은 자신을 붙잡아 지탱해준 운유에게 감사를 표했다.


운유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무릎을 굽히며 그녀 앞에 등을 내보였다.


“왜?”

“어부바해줄게.”

“아, 아니. 방금은 한눈팔다 그런 거야.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녀는 질색하며 사양했다.


“그래.”


운유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겨 나아갔다.


그리하여 얼마나 더 걸었을까. 어디선가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에 웅크린 용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향해 포효하듯 웅장한 물소리였다.


단조롭고 장중한 폭포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걸은 그들은 마침내 빛의 동그라미에 닿을 수 있었다. 흐린 햇살이 쏟아지는 동굴의 입구였다.


제법 길었던 동굴을 통과하고 나자 그들은 양옆으로 만년설 봉우리가 늘어선 골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골짜기에는 물이 마른 지 오래되어 보였지만, 색과 결이 다른 바위들만은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윙윙대며 골짜기에 부는 세찬 바람은 마치 귀신처럼 곡하는데, 살을 에는 칼과 같았다.


간밤 찬서리가 이끼에 오돌토돌 돋아나니, 때는 바야흐로 겨울이 와닿는 늦가을이라.


운유는 서산으로 기울어 붉게 타는 석양을 일별했다.


“오늘은 저기서 숙영한다.”


그는 골짜기 중턱의 평평한 구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큰 바위가 지붕처럼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바람을 피하기 좋아 보였다.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지쳐 있던 부민들은 그 말에 힘을 내서 걸었다.


그들은 운유가 지정한 장소에 천막과 울타리를 치고 둔영을 마련했다. 일부 청년들은 근처에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해왔다. 다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했기에 일사천리였다.


사람들이 천막 치랴 불 피우랴 물 끓이랴 식사 준비하랴 부산스러운 동안, 배고팠던 가축들은 스스로 흩어져서 풀을 뜯어 먹었다.


이따금 지나치게 멀어진 가축은 영리하고 충직한 개들이 엉덩이를 살짝 깨물어 둔영으로 돌려보냈다.


“맥. 너는 배 안 고파?”


한구석에서 맥과 같이 노닥거리던 운유는 가축들이 풀 뜨는 걸 보고 물었다. 하지만 맥은 주변에 자라나 있는 잡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풀때기는 질렸구나.”


운유는 고개를 휘휘 젓는 맥의 투정에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살펴봤다.


때마침 하늘에는 대여섯 마리 새 떼가 날아가는 중이었다.


운유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무릿매를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주워서 일발 장전했다.


그가 무릿매를 힘차게 빙빙 돌려 하늘의 새 떼를 향해 돌팔매질하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간 돌멩이는 기가 막히게도 새 한 마리를 맞춰서 떨어뜨렸다.


돌멩이에 맞은 새가 곤두박질치는 자리를 눈여겨본 맥은 어슬렁어슬렁 새를 찾으러 갔다.


운유는 제자리에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혼자 새를 주우러 간 맥이 다른 산짐승에게 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었다. 철마는 늑대를 잡초처럼 짓밟아 죽이는 맹수였으므로.


이윽고 맥이 살 오른 새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돌아왔다. 맥은 쇳덩이 같은 이빨로 새를 뼈째 씹어먹었다.


새 한 마리로 포만감을 느낄 수는 없을지언정 간식거리는 될 터였다. 맥도 이것으로 만족한 듯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슬슬 추워지네. 가자.”


석양으로 불타던 하늘은 어느덧 다 식어버리고 사위는 어둑해져 있었다.


골짜기에는 물이 말랐지만, 만년설 산봉우리 사이로는 별의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옷깃을 여민 운유는 맥과 더불어 둔영 한복판의 천막에 들어갔다.



+++



천막 안에서는 화로의 열기가 감돌았고, 솥 안에서는 고깃국이 펄펄 끓었다.


운린은 건더기가 솥 바닥에 가라앉지 않게 국자로 고깃국을 휘젓고 있었다.


운유는 의자에 앉아서 고깃국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


“······.”

“······.”


둘 사이에는 고깃국의 냄새와 적막이 풍겼다. 딱히 새삼스러운 적막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대화를 많이 하는 오누이는 아니었기에.


기다리는 동안 심심했던 운유는 문득 주머니칼을 꺼내서 깍지를 다듬기 시작했다.


깍지는 엄지손가락에 반지처럼 끼는 도구였는데, 활시위를 편히 당길 수 있게 해주는 데에 그 효용이 있었다.


사각. 사각.


그의 깍지는 쇠뿔을 써서 만든 물건이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쓴 물건이라 손가락을 끼는 고리 안쪽 부분은 맨질맨질 반들반들했고, 고리 바깥쪽 부분은 흠집이 많았다.


“그거, 내가 만들어준 거네.”


멈칫한 운유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운린을 쳐다봤다.


운린은 여전히 고깃국을 젓는 데에만 집중하며 말했다.


“되게 오래된 거 아냐?”


그는 다시 주머니칼을 움직이며 대꾸했다.


“응. 아직 쓸 만해.”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뭐가?”

“넌 이백 년쯤 나이를 더 먹은 셈이잖아. 겉보기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운유는 턱을 긁적였다.


“그래. 이제는 내가 오빠지.”

“그건 아니야. 까불지 마.”

“여동생이······ 반말?”


운린은 국자로 국을 조금 떠서 맛보았다.


“다 됐어. 먹자.”


그녀는 투박한 질그릇에 고깃국을 떠서 운유와 맥에게 나눠주었다.


운유는 먼저 국물을 후르릅 마셨다. 따뜻한 기름과 국물이 몸을 데워주었다.


그는 크게 썰은 고깃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었고, 젖을 발효시켜서 만든 유락과 음료도 함께 먹었다.


골짜기에서의 저녁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수유차[酥油茶]는 목자들의 음료였다.


발효시켜 볕에 말리고, 빻아서, 다시 벽돌처럼 굳혀 보관한 찻잎을 물, 젖, 소금과 함께 끓여 만들었는데, 이는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힘든 초원의 목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역시 아침은 수유차 한 잔과 같이해야 든든하지.”


활짝 열어놓은 천막의 입구로 서늘하고 말간 아침의 볕이 화사하게 비쳤다. 질그릇에 수유차를 담아 마시니 간밤에 뻣뻣해졌던 몸이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운유뿐 아니라 부민들도 저마다 통풍과 채광을 위해 천막의 문을 개어놓고 수유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의자에 마주 앉아 마찬가지로 수유차를 홀짝이던 운린이 불쑥 질문했다.


“네가 말했던 그 좋은 땅까지는 얼마나 가야 해? 많이 멀어?”


잠시 생각하던 운유는 손가락으로 수유차를 찍어서 탁자 위에 세 개의 원을 그렸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나고 자란 초원이야.”

“응.”

“그리고 이 아래쪽에 붙은 원은 푸른 옥토야. 토인족이 징글징글하게 많이 사는 땅이지.”


하얀 초원을 상징하는 원과 푸른 옥토를 상징하는 원은 남북으로 딱 붙어 있었다. 운유는 그 동쪽에 있는 하나의 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은 평원은 하얀 초원과 산줄기로 분단되어 있고, 푸른 옥토와 바다로 분단되어 있어.”

“그럼 땅으로는 오직 초원하고만 연결되어있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산과 바다가 접하는 부분에 아주 가늘게 맞닿아 통하는 길이 있거든.”


운유는 검은 평원을 상징하는 원의 아래쪽을 짚었다.


“대강 이쯤에 혹처럼 튀어나온 땅이 있어. 우리는 그곳으로 갈 거야.”

“위쪽의 큰 부분이 아니라 아래쪽의 작은 부분으로? 왜?”

“따뜻하고, 물이 맑고, 정착하여 생활하는 토인족들이 있으니까. 그 토인족들을 잡아서 음식을 바치게 할 거야. 그럼 우리는 앉아만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테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푸른 옥토로 가는 게 낫지 않아? 땅도 더 크고, 토인족도 많다며?”


운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은 토인족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우리만으로는 땅을 빼앗을 수 없어.”


문득 그는 질그릇 속에서 넘실대는 수유차를 일별했다.


초원과 평원으로 진격해오던 물경 수십만의 토인족. 그들을 죽이고 또 죽여 만들었던 피의 호수가 질그릇 속의 탁한 수유차와 겹쳐 보였다.


그는 수유차를 쭉 들이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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