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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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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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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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2

DUMMY

운부군[雲部君] 운로.


운씨[雲氏]가 지배하는,

부락[部落]을 통솔하는,

군장[君長],


운로는 대략 육백 년을 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몰랐다. 천 년을 살 수도 있었고, 만 년을 살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바로 내일 죽을 수도 있었다. 늙지 않는 장이족의 수명은 미지수였다.


‘또 사람이 꽉 찼군.’


하얀 초원은 척박했고, 유목으로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없었다.


끽해야 칠팔십 년을 사는 단이족들은 많이 죽는 만큼 많이 낳아댔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잉여들을 멀리 내보내야 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운로는 마침 슬하에 있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바라봤다. 네 번째였나 다섯 번째였나. 몇 번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으므로 기억해내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아들에게 독립을 분부했다.


“너는 비록 나이가 적지만, 철마를 길들였으니 어른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 부락에 사람이 너무 많아졌으므로 이제 독립해라. 기왕이면 네 병신 누나도 같이 데려가고.”


철마[鐵馬]는 이름 그대로 골육이 쇠와 같은 짐승이었다. 일생에 단 한 명의 장이족만을 단짝으로 삼아 등에 태우는 영험한 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장이족은 철마를 길들여야만 소년을 성년으로 인정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절차를 통과하지 않았음에도 자식을 독립시키는 건 장이족으로서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짓이었다.


다행히 이번에 독립시킬 아들은 그 철마를 매우 이른 나이에 길들인 별종이었다.


단이족 기준으로도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고 하물며 장이족 기준으로는 정말 턱없이 어린 나이의 아들이었지만 여하튼 관례대로는 어른인즉. 운로는 아들은 단호하게 독립시켰다.


음식만 축내는 병신 딸도 겸사겸사 딸려서.


그렇게 그의 아들과 딸은 이백여 명의 단이족들을 데리고 부락을 떠났다.


덜 자란 애송이 아들과 다 큰 병신 딸. 우두머리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자식들이었다.


하지만 운로는 그런 사소한 것에 대해 굳이 괘념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독립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남남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까. 죽든 살든 관심사가 아니었다.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로워진 부락을 바라보며 운로는 흐뭇하게 웃었다.



+++



“······우리가 떠나겠습니다.”


운유는 눈을 깜빡였다.


차갑고 모진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지나갔다.


몸에 두른 털가죽에는 간밤의 이슬이 얼어 있었고, 광활한 지평선에는 큰 구름이 산악처럼 솟아 있었으며, 말을 탄 단이족들이 그의 앞뒤로 대치하고 있었다.


“하하! 선뜻 양보해주어 고맙군. 한데 기왕 양보하는 김에 조금만 더 호의를 베풀기 바란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무슨······.”

“딱 절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너희가 가지고 있는 여자와 가축을 딱 절반만 내놓으면 순순히 보내주겠다.”


운유는 맹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에는 회색 산맥이 있었다. 곁에는 예전에 죽었던 단이족 청년 처녀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앞에는 예전에 죽였던 단이족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의 옆에는, 예전에 죽었던 운린이 있었다.


운유는 운린을 빤히 주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혹은 반응할 겨를이 없는 듯, 맞은편의 장이족 전사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 철마를 탄 장이족 전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너도 포함이다. 네 미색이 탐나거든.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버려주마.”


수레에 탄 운린은 장이족 전사의 희롱에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목숨 걸고 항전하면 서로 피를 많이 흘려야 할 겁니다.”

“오. 그럼 덤벼봐라.”


맞은편 장이족 전사의 거만하고 방자한 태도에 운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유는 문득 중얼거렸다.


“맥.”


평생의 단짝. 생명의 반쪽.


온몸이 새카만 쇳빛을 띤 철마 맥이 그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유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맥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말똥말똥한 맥의 눈망울 속에서 운유는 스스로의 표정을 마주했다. 어린애답지 않은 표정. 어쩐지 많은 것을 겪은 듯한 그 표정을.


‘맥. 너도 기억해? 네가 더 나아가지 못했던 그 순간을? 청동 귀걸이가 빛났던 그 순간을?’


운유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고, 별이 있는 하늘이 거꾸로 돌며, 한 그루 나무가 씨앗에 삼켜진 듯한 이 상황이, 머릿속에 선명한 기억이, 단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지.


맥은 실없다는 듯 콧김을 한 번 내고서는 고개를 내려 땅바닥의 풀 한 포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


운유는 손을 뻗어 스스로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소처럼 길고 뾰족한 귀. 그곳에 있어야 할 청동 귀걸이가 없었다.


신비한 힘이 있어서 가지고 다니면 모쪼록 좋은 일이 생길 거라더니······.


‘뭐야. 진짜로 만금의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히 신비하긴 했다.


‘이래서야 짠돌이라고 욕했던 게 미안해지는데.’


느닷없는 그의 폭소에 주변의 눈길이 모였다.


곁의 단이족들은 물론이요 맞은편의 적들까지 어리둥절하며 운유를 쳐다봤다. 그러나 운유는 실성한 사람을 보는 듯한 그들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낭랑하게 웃어댔다.


어색한 고요 속에서 그의 웃음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간신히 그쳤다.


고개를 젖힌 운유는 하늘을 우러러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긴 숨을 내뱉었다.


광야를 주유하며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해온 세월이 대충 이백 년이었다.


그 이백 년간 흔적조차 안 남기고 불태운 부락과 그 밖의 이민족이 셀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누릴 만큼 누리고 즐길 만큼 즐긴 일생이었다. 더한 영달이 아쉽지도 않았다.


‘왜 다시 이때로 돌아온 걸까? 충분히 할 만큼 하고 죽었는데 말이야.’


다시 한번 생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기꺼움보다는 지겨움이 컸다. 그러한 심정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되었다.


“하. 귀찮네.”


그때 작은 손길이 운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운린의 손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미쳤어?”

“······.”


아주 가끔 떠오르곤 했던 이 목소리. 이 말투.


오랜만에 듣고 나니 감회가 사뭇 유별했다.


피식피식 웃으며, 운유는 다시 운린을 돌아봤다. 이번에는 운린도 맞은편 장이족 전사가 아닌 운유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일순 환각처럼, 스스로 목을 긋던 기억 속 운린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운린의 모습과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운린의 죽음. 육십이 삼십으로 줄었던 싸움에서의 죽음이었다. 짐짝 신세는 지긋지긋하다며 목을 그었었던.


거듭하여 보고 싶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운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넌 고생만 하다 죽었었지. 우리가 다정다감한 오누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미운 정이 있었는데. 네 시신을 그렇게 버려두고 달아나야 했었어.’


철마를 타고 달리는 동안 저만치 뒤에 남겨졌었던 운린이었다.


비록 뜻하지 않은 뒷걸음질이었으나, 기왕 이 어린 날까지 되돌아 와버렸으니, 새로 누릴 생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나란히 걸어볼 수도 있을 터였다.


‘말을 탈 수 없는 절름발이도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봐야겠다.’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혔다.


그렇다면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도 갈피가 잡혔다. 어떻게 그런 곳을 만들지는 느긋하게 궁리해보도록 하고, 당장은 맞은편의 적들을 쳐 죽여야 했다.


“가자.”


운유는 맥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읊조렸다.


철마가 장이족을 평생의 단짝으로 점찍은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일심동체였다. 맥은 운유가 원하는 바를 알고 그대로 해주었다.


맥은 맞은편을 향해 올곧게 질주했다.


운유가 구리 도끼를 꼬나쥐고 돌연히 앞으로 뛰쳐나가자, 양측의 단이족들은 이심전심으로 당황했다. 뜬금없이 웃다가 자살하러 달려드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유는 맹렬히 박차를 가했다. 가속이 붙은 맥은 창졸간 맞은편의 장이족 전사에게 쇄도해갔다.


이에 맞은편 장이족 전사는 살짝 빈정이 상했다. 애송이가 이렇게 주제 모르고 덤벼들 줄이야. 얕보인 듯해서 화가 났다.


“감히!”


장이족 전사는 정면으로 돌진하며 누렇게 빛나는 청동검을 뽑아 들었다.


“단번에 머리를 날려주마. 다시 태어나면 겸손하게 살아라!”


서로 마주 보고 달렸기에 간격은 찰나에 좁혀졌다. 장이족 전사의 날카로운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큰 키와 길쭉한 팔, 탄탄한 근육은 명백히 소년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운유는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잡것쯤은 이 작고 어린 몸으로도 족했다.


쏜살처럼 달려간 쌍방의 철마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머리통 하나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 잃은 목에서는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흠.”


운유는 고작 한 합의 격돌만으로 날이 상해버린 구리 도끼를 아깝다는 듯이 일견했다.


그의 등 뒤로 머리 잃은 장이족 전사의 몸이 쿵 하고 낙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침묵이 도래했다.


양측은 얼빠진 눈으로 죽어버린 장이족 전사와 살아있는 장이족 소년을 번갈아 봤다.


당연히 죽으리라 확신한 소년은 태연하게 구리 도끼날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당연히 죽이리라 예상한 전사는 머리 잃은 채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한 광경이었다.


갓 태어난 강아지를 씹어먹는 소처럼. 손가락이 여섯 개인 사람처럼. 한여름 몰아치는 눈발처럼. 무언가 뒤틀리고 뒤바뀐 듯하면서도 틀림없이 존재하는 기이한 현실이었다.


그 기이함에 혼미해진 사람들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무게의 고요함이 맴돌았다.


너무나도 무거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한 번 그 고요가 깨지고 나면 반드시 피바람이 닥쳐오고야 말 것을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예감했다.


그 예감에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고요를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운린이었다.


“쳐라! 적을 쳐부숴라!”


그녀의 호령에 운부의 단이족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말을 몰아 맞은편의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반면 우두머리를 잃은 맞은편 적들은 여전히 경악에 빠져 허둥대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맞은편 적들은 미처 혼란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들이닥친 기마에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양측의 운명은 그로써 한순간에 역전되어버렸다. 먼저 온 무리는 웃었고, 늦게 온 무리는 울었다.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하여 가차 없이 창칼을 휘둘러대는 운부의 단이족들.


운유는 목가적인 감흥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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